주왕산 어귀에서 31번 국도로 돌아 나오다가 영덕 방면으로 좌회전해 나지막한 산을 넘는다. 길가로 잇달아 펼쳐진 사과밭에 사과꽃이 한창이다. 밭에 무성하게 자란 민들레 노란 꽃과 사과의 하얀 꽃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조화가 아지랑이 속에 넉넉하다.
제법 가파른 고개를 넘으면 시야를 막는 왼편 산골짜기가 이른바 '내주왕(內周王), 절골계곡'이다. 그 계곡으로 들어가는 좁은 포장길을 달리다 중간쯤에서 직선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주산지에 닿는다.
주산지는 주왕산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저수지다. 주왕산 자락에 있어서 '주산지(周山池)'일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제 이름은 '물댈 주(注)'자를 쓰는 '주산지(注山池)'다. 이 인공 호수는 조선 숙종 46년(1720)에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경종 원년(1721)에 완공되었다. 저수지의 물은 산 아래 60여 가구가 짓는 6천여 평 남짓한 논밭으로 흘러든다.
정작 사람들은 청송은 물론이거니와 주왕산 근처에도 와 본 적이 없고 호수의 이름조차 몰라도 용케도 이 호수가 철마다 연출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익숙하게 떠올리곤 한다. 가을날,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녘의 호수, 수면에 비친 핏빛 단풍의 장엄한 풍경, 그 이미지로 사람들은 이 호수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다. 주산지는 인근 봉화 출신인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배경이 되면서 온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낳게 되느니라."
영화 속, 신비로운 호수 위 암자의 아름다운 사계 위에 그려지는 한 인간의 파란 많은 삶이 가르치는 것은 '인과응보'다.
처음 주산지를 찾은 건 십몇 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이 외진 호수는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늦여름이었는데 호수에 물이 잔뜩 불어 있었고 물빛이 몹시 어두웠다. 물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왕버들 노목과 수면에 드리운 적막이 낯설었고 뭐랄까, 섬뜩하다고 해야 하나, 잠깐 무섬증을 느끼기도 했다.
주산지는 길이 100m, 넓이 50m, 수심 8m 정도의 아담한 호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못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호수 속에 자생하는 약 150년생 능수버들과 왕버들 30수는 이 외진 연못의 상징이 되었다.
왕버들은 원래 호숫가나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높이 약 20m, 지름 1m의 버드나무과의 낙엽교목이다. 밑동의 반을 물에 담그고 있는 주산지의 왕버들은 그것 자체로 일찍이 보기 드문 비경을 연출한다. 특히 새벽녘에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의 왕버들은 숱한 사진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주산지는 밝아지고 친근한 호수가 되었다. 영화 덕분에 이 호수의 아름다움을 찾는 이들로 호수 주변은 늘 시끌벅적하다. 입구에 큼직한 주차장이 들어섰고, 호숫가엔 전망대까지 만들어졌다.
한때는 호수까지 차를 타고 올랐지만 지금은 주차장에 차를 버리고 한 10여 분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덕분에 주변은 비교적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고, 간이 화장실 외에 어떤 시설도 들어서지 않아서 그 호젓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주차장은 이미 각지에서 온 차량으로 혼잡하다. 완만한 언덕길을 10여 분 올라 산속의 호수 ‘주산지’를 만난다. 호수 주변의 연둣빛으로 타고 있는 신록의 물결을 담고 호수는 그윽하고 조신한 얼굴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방 왼편의 바윗돌 위에 '이공제언성공송덕비(李公堤堰成功頌德碑)'라 새긴 돌비 하나가 서 있다. '이공이 제방을 쌓아 이룬 공덕을 기리는 비'다. 비문에는 "정성으로 둑을 막아 물을 가두어 만인에게 혜택을 베푸니 그 뜻을 오래 기리고자 한 조각돌을 세운다"고 새겨져 있는데, 정작 이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호수 왼쪽으로 돌아 골짜기 안까지 이르는 길은 산책로로 다듬어져 있다. 예년과 달리 호수 물가로 접근을 막는 목책을 설치해 놓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책을 넘어 호수를 렌즈에 담았을까. 군데군데 물가로 이어진 언덕배기가 반질반질하다.
주산지는 다양한 야생동물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호숫가 안내판에는 천연기념물인 수달·솔부엉이·소쩍새·원앙을 비롯해 고라니·너구리·노루 등이 주산지 일대에서 서식하는데 4·5월은 이들의 번식기여서 탐방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골짜기 안쪽의 호수 가장자리 부근에 전망대가 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란히 목책에 붙어서서 호수 안의 왕버들과 물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목책 한가운데 설치된 스피커에선 끊임없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고 지척의 거리에 왕버들 새잎과 가지가 신선했다.
더러 말라죽은 왕버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죽은 나무에 새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죽은 묵은 나무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는 새잎은 우리네 간난의 삶의 길, 봄에서 여름,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돌아가는, 그 유전하는 시간의 순환을 넌지시 가르친다.
그러고 보면, 전망대에서 건네다 뵈는 호수 가운데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무대인 암자가 서 있던 곳이다. 영화의 주무대로 만들고자 바지선을 만들고 그 위에 목조 건물을 세웠는데 여기 든 비용이 3억 5천만원이었다던가.
동자승이 소년이 되고 청년,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는, 한 인물의 다섯 단락 인생 이야기를, 각 계절의 시작과 끝의 이미지를,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내재하고 변해가는 속성과 숙성의 의미를, 그렇게 순환되고 생성하는 우리의 삶을……, 순수 속의 잔인함, 욕망 속의 집착, 살의 속의 고통, 번뇌 속의 해탈을……. 기가 육체를 만들고 육체가 단풍처럼 변하고 썩어 이슬로 땅에 스며드는 사람이, 사계절의 반복과 무엇이 다른가? - 2001년 1월 미국 선댄스에서 김기덕280여 년 전에 지어진 오래된 산속 호수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은 영화가 그려낸 인간의 생애, 그 매듭진 세월과 다르지 않다. 봄에서 다시 새 봄을 맞을 때까지 이 산중 호수가 철마다 갈아입는,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헐벗은 자연의 성장(盛裝)이 희비와 고락으로 얼룩진 인간의 삶과 무엇이 다르랴. 김기덕의 영화뿐이 아니다. 주산지의 사계는 그러한 삶과 자연의 진실을 시방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