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러 가자던 친구의 말에 따라나선 길이었다. 활기찬 일주일을 시작해야한다는 압박감으로 더욱 피곤한 월요일. 영화를 본지도 오래되었다. ‘그래, 머리도 식힐 겸.’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자주 가던 학교 근처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도 30여분이 걸리는 작은 영화관이었다. 상업 영화가 아닌, ‘독립 영화’라 불리우는 그런 영화들을 선물해 주는 곳. 우리가 찾은 곳이었다.
1년 전, 그 영화관이 이전하기 전 처음으로 독립영화를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독립 영화’ 라는 말 자체도 생소했고, 상업 영화가 아닌 것에 대해 불안함도 있었다. 수업의 일환으로 찾은 곳이라 더더욱 낯선 공간이었다.
그때 보았던 영화는 지금도 내 머리 속에 생생하다. 독립 영화로서 꽤 큰 흥행을 불러 일으켰던 ‘우리 학교’가 그 작품이다. 바다 건너 다른 땅의 우리 국민들의 이야기. 고향은 남쪽이지만 조국은 북쪽이라던 그 들. 해맑에 웃음지어 보이던 그 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을 감싸 안지 않았던 우리 정부. 유쾌하고 즐거운 그들을 보면서 마음 속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지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1년만에 찾은 그 곳에서 나는 또다시 무거운 돌 하나를 더 가지고 와야했다. 또, 또 나는 알 수 없는 미안함에 울며 돌아서야 했다.
평택 대추리. 그래, 시위가 잦았던 곳이었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미군기지가 그 곳으로 이전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반대를 했다. 그렇게 주민들과 전·의경들이 싸우는 소리를 티비로 얼핏 들은 것 같다. 이것이 내가 아는 대추리의 전부였다.
땅을 빼앗겨야 했다. 단지 그 곳에 살고 있었단 이유로. 우리나라를 지켜주겠다는 또 다른 그들을 위해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평생을 바쳤던 곳에서 내몰렸다.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 결정하신 ‘국책사업’을 위해 국민을 버리는 순간이었다.
소주를 생수처럼 들이키며 쓰린 속 달래시던 할아버지. 군부대를 동원해 없애버린 길. 방패를 든 전경들이 지켜보는 그 곳. 농사를 위해 그 길을 새로이 만들어 경운기를 들이고 농약을 치며 피어오르던 할아버지의 미소. 그렇게 자식보다 귀히 여기며 가꿔온 논,밭을 한 순간에 엎어버리던 그 들. 사람의 얼굴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그 절망감. 미안해 하는 얼굴로 주민들을 향해 방패를 들어야 했던 스무살, 스물한살의 전경들. 그걸 보며 떨려오는 내 손과 눈물은 무엇에 미안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 땅을 지키기 위해 930여일간 투쟁(이것이 왜 투쟁이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하던 주민들은 지금 임시거주지에서 살고 계신다고 했다. 농사철이라 새로 옮겨진 그 곳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여전히 바쁘시다고 한다. 내가 보았던 모습 그대로 정부에서 허락지 않는 하지만 가야만하는 그 길을 또다시 만들어 가고 계시지 않을까.
무지한 나를 일깨워준 고마운 영화였다.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주던 대추리 마을 지킴이들의 낭랑한 노랫자락이 아직도 귓가에서 들려온다.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이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
가고 싶은 곳을 장애인도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평화
이 땅을 일궈온 농민들이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
성매매 성폭력 성차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이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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