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건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는 '대전 사랑'연초에 일어났던 국보 제1호 숭례문 화재는 온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문화나 문화재를 별것 아닌 것처럼 홀대하거나 비중을 낮게 취급하는 경향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문화의 질이 향상되지 않고는 삶의 질 향상이란 그저 의미 없는 중얼거림일 뿐이다.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 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관심 없이는 우리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은 결코 고양될 수 없으며 자신이 사는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도 발현될 수 없다.
시내 곳곳엔 '대전을 사랑합니다'라는 슬로건이 붙어 있다. 예전엔 시내버스마저 한동안 그런 슬로건을 간판처럼 달고 다닌 적이 있다. 그 구절을 볼 때마다 '시민들이 오죽 자신이 사는 대전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런 걸 달고 다닐까?'싶었다. 그것이 대전 사람들의 자화상이라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년 동안 대전에 산재한 문화재, 특히 산성을 답사하면서 난 마음속으로 울화증을 앓았다. 이현동산성 안내판이 장동산성에 버젓이 서 있다든지, 질현성에 고봉산성 표지석이 서 있다든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버거울 정도다. 그때마다 수시로 기사화하곤 했지만 단 한 차례도 시정된 예를 보지 못했다. '대전 사랑'은 슬로건만으로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눈 막고 귀 막으면 세상 살기 그처럼 쉬운 게 없다. "다시는 '쇠귀에 경 읽기' 같은 기사는 쓰지 말아야지" 다짐했지만 '제 버릇 개 주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대전의 관문에 선 잘못된 입간판
지난 5월 3일(토요일), 오랜만에 질현성·능성·갈현성·삼정동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걸었다. 노란 생강나무 꽃이 필 무렵에 오르고 나선 처음이다.
내가 알기로 이렇게 도심 가까운 산자락에 산성이 잇달아 있는 곳은 대전뿐만이 아닐까 싶다. 산을 타는 기쁨과 함께 조상의 숨결이 살아 있는 문화재를 접한다는 건 얼마나 커다란 행운인가. 그러나 이런 뿌듯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몇 개의 돌무더기로 남은 삼정동산성의 풍경은 문화재 보존의 현주소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삼정동산성에서 곧바로 산을 내려가면 대전에서 옥천으로 가는 4번 국도가 기다리고 있다. 판암 IC와 국도가 갈라지는 삼거리엔 대전지방경찰청에서 세운 대형 입간판이 서 있다. 아마도 2007년7월 2일, 충남지방경찰청에서 분리·개청한 직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 입간판을 보았을 적엔 무척 반갑기까지 했다. 경찰청이 세운 입간판에 문화재 사진을 넣은 시도는 상찬받을 만한 것이다. 문화재 사진 옆엔 문화재 지정 종목에 대한 설명조차 없이 간단하게 '동춘당'이라고만 쓰여 있다. 이것은 틀린 사진 설명이다. 입 간판 사진 속 문화재는 동춘당이 아니라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송용억가옥 사진이다.
이 국도는 명실상부한 대전의 동쪽 관문이다. 이런 곳에 세운 입간판은 대전의 얼굴 격이다. 그런 입간판이 이렇게 대전의 문화재에 대한 그릇된 설명을 달고 있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전을 방문하는 외지 분들께 처음부터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다.
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 차량에 탄 많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진을 찍나?'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밖을 내다보고 있다. 대전지방경철청장님, 공사다망하신 줄은 알지만 하루빨리 이 입간판 좀 고쳐주시면 안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