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여러 곳을 여행 하였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요, 불교의 중심 본사인 해인사를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곳이 나에게는 원시림같은 처녀지였다.
지난 달(26~27일)에 뜻밖의 행운으로 장롱 속 깊게 숨겨진 보석처럼 가야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해인사에서 자연과 불심의 깊고 심오한 세계를 한껏 호흡하고 돌아왔다.
전국에서 교육 받으러 온 공직자들끼리 맺은 특별한 인연이 계기가 되어 연례적인 부부동반 모임으로 자리 잡은 교육동기생들의 전국적인 인적 네크워크, 연우회 정기행사에 다녀왔다. 모임장소인 합천 해인사 관광호텔(모텔급)까지는 광주에서 88고속도로로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2002년 경기도 수원에 있는 자치인력개발원에서 ‘중견간부 양성반’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6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었던 그리운 얼굴들. 연 1회 만나 친목도 다지고, 정보도 교류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주고받고, 견문도 넓히고, 서로의 발전적인 삶을 격려하고 도와주고 있다. 아름답고도 소중한 모임이다.
그들과 함께 1박 2일 동안 물 맑고 숲이 아름다운 합천 가야산 남산 제일봉에 올라 자연의 맛 깊게 호흡하고, 밤새도록 여흥과 말의 향연으로 추억과 그리움 넉넉하게 나누고, 해인사의 풍광과 역사의 향기 무진장 들이키며 삶의 일탈 꿈꾸고, 자연의 산채나물로 건강 한껏 다진 즐거움과 행복 가득한 달콤한 시간이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세계기록유산이다. 그러면 해인사의 세계문화유산은 무엇인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고려 장경판전이다. 장경판전은 불경이나 그것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평소 장경판전을 소홀히 하고, 팔만대장경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알고 있었던 나의 어설픈 지식이 새롭게 눈을 떴다.
가야산 중턱에 위치한 해인사는 신라 예장왕이 802년에 왕후의 병을 치료해 준 부처님께 감사하다는 뜻으로 지었던 절이다.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8만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法寶)사찰로도 불리고 있다.
8만여 장의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지은 건물로,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1457년에 확장하였고, 1488년에 학조대사가 조선왕실의 후원으로 다시 지어 보안당이라고도 했다. 1622년과 1624년에도 장경판전의 수리가 행해졌다고 한다.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 고려 대장경판(국보 제32호)의 보관을 위해 조선 초기(1488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당시의 전통적인 목조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나무로 제작된 대장경판의 보존을 위해 건물 안의 습도와 통풍ㆍ기온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건물의 창을 독특하게 설계한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해인사 장경판전의 건물은 모두 4 개로‘ㅁ’자 형태를 이룬다. 15 칸(약 27m)에 이르는 큰 규모의 건물인 수다라장과 법보전이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고, 그 양 옆으로는 두 개의 작은 건물인 동ㆍ서사간전이 위치한다. 이 가운데 수다라장과 법보전에 보관 중인 8만 1258 장의 고려 대장경판 또한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으로 세계적인 유물로 꼽힌다.
장경판전의 건물 앞쪽의 창문은 위보다 아래쪽 창이 4 배 정도 크다. 건물 뒤쪽은 이와 반대로 위창이 아래 창보다 1.5 배 정도 크다. 이처럼 건물 앞면과 뒷면의 창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실내에 들어간 공기가 원활히 순환될 수 있도록 하여, 습기가 차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한편, 고려 대장경판(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24년(1237년)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게 해 달라는 국가적 염원을 담아 제작을 시작해 완성에만 무려 16 년이 걸렸다. 때마침 유네스코는 고려 대장경판의 높은 예술성과 역사성을 인정해 1995년 12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를 결정했다.
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방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대장경 간행 불사가 추진되어 1251년에 완성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 팔만대장경이다.
완성된 고려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그 뒤 조선시대 태조 임금 때인 1398년에 이곳 해인사로 다시 옮겨 모신 것이다.
경판의 수는 81,340장이며, 권수는 6,791권이다. 크기는 가로 68㎝, 세로 24.5㎝, 두께3㎝, 또 양끝에는 뒤틀리지 않게 각목을 붙이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로 장식하고, 저면에는 옻칠로 처리하여 부식하지 않도록 했다.
해인사를 법보종찰이라 함은 고려 팔만대장경판인 무상법보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지칭힐 때 팔만 사천이라는 숫자를 쓰며, 따라서 끝없이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섬 지방에서 벌목해 온 자작나무와 후박나무로서,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 년 동안 담궜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불교의 모든 경전을 집대성한 대장경판은 150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판각을 했음에도 마치 한 사람이 새긴 듯 글자체가 모두 같다고 한다. 무려 52,000개의 판 가운데 틀리거나 빠진 글자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당시 외적을 물리치려는 국가적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짐작이 간다.
공기가 다르고 자연의 그림이 다른 해인사에서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의 소중한 가치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생애의 큰 축복이었다.
참고로 세계문화유산이란 유네스코(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가 1972년 11월에 열린 제17차 정기총회에서 채택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 협약"에 따라 지정한 유산을 말한다.
인류문명과 자연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산인 세계문화유산은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수해야 할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진 유산이다.
한국은 1988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 협약"에 가입하였으며, 1995년 12월 6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회의에서 종묘,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전이 등재되었고,
이어 수원 화성, 창덕궁이 제21차 회의 (1997년 12월 1일- 6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등재되었으며, 2000년 제24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경주역사유적지구와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이 추가로 등재되어 현재 총 7점의 유산이 세계유산목록에 올라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문화유산은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의 의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있다.
고려 장경판전이 있는 해인사(海印寺)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의 하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해인사는 불교의 삼보(三寶)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삼보란 불보, 법보, 승보를 의미하는데 이 중 해인사는 법보사찰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절인 것이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팔만대장경을 의미한다.
해인사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장경판전,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삼성각(三聖閣), 응향각(應香閣), 퇴설당(堆雪堂), 행해당(行解堂) 등 수많은 전각들이 있다
또 국보 제32호의 팔만대장경판, 국보 제52호의 장경판고(藏經板庫), 보물 제128호의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 元景王師碑), 보물 제129호 월광사지(月光寺址) 삼층석탑, 보물 제222호 합천 치인리마애불입상(緇仁里磨崖佛立像), 중요민속자료 제3호 광해군(光海君)내외 및 상궁 옷 등과 70여종의 유물 등 다수의 국보적인 보물들이 있다.
특히 대적광전은 해인사의 주 법당으로 비로자나불상을 모셔놓아 대적광전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친필주련이 있고, 벽에는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자체를 상징하는 불상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이외에도 화엄전과 비로전이 있다.
해인이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로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에 의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의 자리에 창건되었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로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이로 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해인사에서 만난 모든 물상들은 그야말로 불심의 정수요 인연의 창고요 광대무비한 우주의 세계였다. 해인사의 첫 관문으로 주위와 조화를 이루어 붉은 강을 연상케 하여 '홍하문'이라고 부르는 일주문,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과 밀적금강, 나라연금강 두 역사가 탱화로 그려져 있는 봉황문, 해인사 상문의 마지막 문으로서 이곳을 지나야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해탈문, 사물(법종, 법고, 목어, 운판)을 모아 놓았으며, 이 악기들을 연주함으로 인간과 동물의 영혼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범종각 등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우리의 귀중한 보물들이었다.
또한 범당에 들어갈 수 없는 승도들이 모여법당을 향해 예불하고 큰 스님의 설법을 듣던 구광루, 전체적으로 뛰어난 균형미와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는 정중 3층 석탑,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던 날 고사되었다는 1200년 나이테의 고사목, 대적광전 곳곳에 장식된 벽화와 각종 설화, 그리고 의상대사가 그렸다는 법성계로 만들어 놓은 형형색색의 길(연등을 달아 놓은) 등도 모두 신비와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고려 장경판전 앞에서는 위대한 문화재의 힘, 위대한 선조들의 힘을 강하게 느꼈다.
기회가 나면, 다시한번 해인사를 방문하여 해인사의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의 정취를 물씬 호흡하고, 주변의 수많은 암자들에 얽힌 신비의 전설들을 가슴에 몽땅 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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