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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의 수호신, 왕버들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 왕버들에 피어난 봄 주산지의 수호신, 왕버들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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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초면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푸릇푸릇한 봄이 물씬 풍기는 경북 청송의 주산지와 주왕산 국립공원의 제1·2·3 폭포까지 이르는 오롯한 산책길입니다.

수십 그루의 왕버들이 주산지의 신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주산지와 어우러지는 옅은 녹음의 조화는 숫한 사진작가들을 필두로 봄을 그리워하는 뭍 여행객들을 불러모읍니다. 암산으로 이루어진 주왕산의 비경을 따라 걷는 넉넉한 발걸음은 뇌리 깊숙이 자리잡고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 되었습니다.

오랫만에 새벽을 달려봅니다. 청송으로 가는 길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청송까지 내려가는 여정에 대한 부담감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없이 긴 고속도로의 여정에 더해 국도를 타고 한 시간을 넘게 가는 거리다보니 나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고생쯤이야 쉽게 감수하리라 여기고 기분 좋게 출발을 합니다.

주산지를 깨우는 것은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

3일간의 연휴(5월 3~5일) 중이라 깊은 새벽인데도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은 여주, 문막까지 막힐 정도로 많습니다. 차량이 드물어지는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서안동IC로 나와 깊은 잠에 빠져있는 안동시를 지납니다. 깜깜한 임하호를 따라 영덕으로 달리면 34번 국도와 만납니다.

임동, 진보, 파천을 지나 청송을 지나면 그제서야 목적지인 주산지에 다가섬을 몸소 느끼면서 긴장감이 스물스물 빠져나갑니다. 주왕산을 빙글빙글 돌아 영덕으로 빠지는 914번 지방도를 따라 마지막으로 무티재를 넘자, 반가운 주산지 표지판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짝입니다.

새벽 5시 반, 주산지 입구에서 바라본 주산지의 풍경
▲ 이른 새벽의 주산지 새벽 5시 반, 주산지 입구에서 바라본 주산지의 풍경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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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반, 5시간 남짓만에 주산지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에는 벌써 도착한 차량들이 길었던 여정을 뒤로 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주산지의 새벽 풍경을 담으려는 사람들은 벌써부터 분주히 움직입니다.

새벽 5시가 넘자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주산지로 향한는 발걸음들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주산지를 깨우는 것은 산새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입니다. 그 소리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산새소리는 이내 묻혀버리는 듯 합니다.

주산지 입구 바위 위에 세워진 공덕비로 영조(건륭 36년)때 세워진 공덕비입니다.
▲ 주산지에 세워진 공덕비 주산지 입구 바위 위에 세워진 공덕비로 영조(건륭 36년)때 세워진 공덕비입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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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포위당한 주산지, 셔터 소리만 가득

주산지는 하류 지역의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 조선 숙종때 만들기 시작해 경종 원년인 1721년에 완공된 인공저수지입니다. 주산지 초입 바위 위에 오똑하게 서 있는 비석은 주산지의 역사를 그대로 알려줍니다.

'정성으로 둑을 쌓고 물을 막아 만인에게 혜택을 배푸니 그 뜻을 오래 기리기 위해 한 조각 돌을 세운다(一障貯水 流惠萬人 不忘千秋 惟一片碣).'

건륭36년이니 조선 영조때 세워진 공덕비인 것 같습니다. 200년이 훨씬 넘은 이 곳 주산지는 아직까지도 그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하니 왕의 덕목 중 하나인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한 것 같습니다.

주산지의 풍경을 담는 사람들은 끼어들 틈도 없이 주산지를 바짝 포위하고,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음 소리만 가득 합니다. 매번 찾는 곳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그동안 눈 속에 찌든 회색빛 때가 절로 벗겨지면서 환해지는 듯 합니다.

주산지 주변을 감싸는 산세의 막 피어오르는 여린 녹음과 수면에 비춰지는 또다른 산세 그리고 주산지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수십 그루의 왕버들 자태는 한 곳에 머물러 오랫동안 눈 속에 담고 싶은 절경입니다.

길고 긴 겨울의 갈색빛을 벗고 들썩거리는 듯 보드랍게 피어오르는 여린 녹색빛은 오랫동안 머물지 않습니다. 녹음이 짙어지고, 산세가 밋밋해지면 주산지의 봄은 여름으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주산지를 끼고 전망대로 향하는 오붓한 오솔길
▲ 전망대를 향해 가는 오솔길.. 주산지를 끼고 전망대로 향하는 오붓한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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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뒤에 숨은 일제시대 생채기

주산지를 끼고 안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은 길지 않지만 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숲의 아름다움을 만끽 하며 걷다보면 생채기 난 소나무들이 많이 보입니다. 일제 강점기때 송진공출의 흔적이 남아있는 소나무들입니다.

기름의 대체 역할을 했던 송진은 한반도 전역에서 공출하게 되는데, 이 곳 역시 일제의 날카로운 비수를 피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무에 난 생채기는 한때 서글픈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주산지의 왕버들에게만 시선을 던지는 뭇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많이 서운할 듯 합니다.

기나긴 겨울을 이겨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다.
▲ 주산지의 왕버들 기나긴 겨울을 이겨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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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의 풍경은 나무 데크로 구성된 전망대에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주산지의 전경과 함께 물 속에 좌정한 듯 앉아 있는 왕버들의 자태를 감상하는 데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만큼 이곳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기만 합니다.

주산지의 왕버들은 주산지를 병풍처럼 두른 산세를 배경삼아 한 폭의 절경을 만들어 냅니다. 지난 겨울 잎 하나 없는 갸날픈 몸으로 포효하는 듯 날카로운 모습으로 서 있더니, 이제는 푸릇푸릇한 생명을 안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 부드러운 모습입니다.

물 속에 잠겨있는 왕버들의 모습은 주산지를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고고하면서도 신비로운 자태는 왕버들 전체를 휘감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는 감탄사를 내뱉게 합니다.

주산지에 투영된 새로운 세상...주산지는 거울이 되어 찾아온 봄을 알려 줍니다.
▲ 주산지가 만들어내는 또다른 왕버들... 주산지에 투영된 새로운 세상...주산지는 거울이 되어 찾아온 봄을 알려 줍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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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거울, 찬연히 빛나는 또 하나의 봄

주산지가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풍경. 물 속으로 투영된 또하나의 풍경은 또 다른 세상입니다. 거울을 빌어 아리따운 모습을 들여다보는 아가씨의 모습처럼 주산지를 감싸고 있는 산세는 주산지를 거울 삼아 그들에게 찾아온 봄을 들여다 봅니다. 주산지는 그렇게 자연의 거울이 되어 찬연히 빛나는 또하나의 봄을 만들어냅니다.

물 속에 들어앉은 왕버들 역시 하루하루 다르게 피어나는 봄빛을 들여다 봅니다. 물 속에 투영된 왕버들의 자태를 담으려는 사람들은 어느새 수면 가까이 내려가 있습니다. 수면이 잔잔할 때는 쌍둥이 같은 똑같은 왕버들을 담기도 하지만, 잔잔한 수면이 흩어질라치면 왕버들의 자태를 뒤로한 채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파동을 잡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매번 올때마다 느끼지만, 주산지의 모습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앙상한 가지만 남은 왕버들 매번 올때마다 느끼지만, 주산지의 모습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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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다했는지 새 생명을 틔워낸 다른 왕버들과는 달리 푸른 잎 하나 없는 가지만이 수면 위에 앙상하게 올라 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새생명을 틔워보고픈 절실함이 가득하지만 앙상한 가지만이 안타까운 절규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주산지의 수면이 떨리자 그 안타까움에 더해 치를 떨 듯 파르르 떨립니다.

주산지 입구에서 주산지에 이르는 여유로운 숲길
▲ 주산지를 떠나며... 주산지 입구에서 주산지에 이르는 여유로운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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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틀 무렵부터 별산 위로 해가 떠올라 따뜻한 햇빛이 수면 위에 내려 앉을 때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주산지의 모습을 담습니다. 주산지를 돌아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고혹적인 주산지의 매력에 젖어 있다보면 한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떠나는 발걸음은 아쉽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주산지에 남아 맘껏 담았다 해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좋은 여행지의 매력은 멋진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아쉬움을 뒤로한 채 나중을 기약함에 있습니다. 내려가는 길, 이른 아침 어둑어둑한 길에서 보지 못했던 숲길의 풍광이 주산지의 풍경만큼이나 매혹적입니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과 길을 따라 우뚝 솟은 나무들, 그리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뒷모습까지 주산지의 남은 여운을 말끔하게 씻어주고도 남습니다.

유혹에서 벗어나니, 또 다른 유혹이...

주산천 주변 사과밭에 만개한 하얀 사과꽃과 민들레 군락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 주산천변 사과밭에서 만난 하얀 풍경 주산천 주변 사과밭에 만개한 하얀 사과꽃과 민들레 군락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 문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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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은 사과의 산지로 유명합니다. 온난화가 한창인 지금 충주를 거쳐 강원도 땅에서도 사과가 나는 요즘이지만, 청송사과의 옛 명성을 보여주기라도 하 듯 제법 너른 사과밭이 많습니다. 주산지를 나와 절골계곡에서부터 시작되는 주산천을 따라 사과꽃이 한창입니다. 하얀꽃이 몽글몽글 맺힌 사과나무 또한 차에서 내리게 만들 정도로 유혹을 합니다. 잠시 내린 사과밭에서는 사과꽃 만큼이나 하얀 씨앗을 매단 민들레가 무리지어 있습니다.

금세라도 '하나둘셋' 하면 날아가버릴 것같은 민들레 홀씨들이 만발한 사과꽃과 함께 일대 장관을 이룹니다. 큰 바람 한 번 일어 민들레 홀씨들이 한꺼번에 하늘로 날아오른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주산지에서 가까스로 떨친 발걸음이 또 한 번 묶이고 말았습니다.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태그:#주산지, #왕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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