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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이들이 '0교시 수업을 받다가 미친 소를 먹고 쓰러져, 의료보험 민영화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죽으면 대운하에 뿌려지는' 미래를 상상해보았는가.

 

모였다 하면 전날 밤 TV 오락프로그램의 이야기를 간식거리 삼아 깔깔대던 학생들이 요즘은 0교시, 우열반, 영어몰입교육에 대해 성토하고 광우병 쇠고기가 나오는 급식은 먹지 않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말하고 있다. 금방 중간고사를 마치고 단기방학에 들어가 있는 중고등학생들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 6일 저녁 7시, 청계천 광장에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귀가시킨다고 몰려오고, 학생들은 변함없이 촛불을 들었다. 벌써 세번째 대규모 집회다. 참여자 대다수가 10대로 이루어진 이 촛불문화제에 대해 정부는 배후에 정치세력이 있다며 불법집회로 규정, 주동자를 소환해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결국 세번째 촛불문화제는 10대들의 안타까운 외침과 어른들의 따뜻한 응답 속에서 아름답고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살고 싶다. 살기 위해 여기 왔다"

 

이날 집회에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을 비롯해 영화배우 정찬씨 등이 발언대에 섰지만 발언자의 대다수는 10대 청소년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중집회에서 청소년이 이만큼 많은 발언을 한 역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투표권도 없고, 매일 공부에 치여 사느라 아무 것도 모를 거라고 어른들끼리만 착각하고 있었던 10대들. 그러나 그들은 당차고 야무졌다.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른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가 왜 미친 소를 먹어야 하느냐고. 나는 아직 15살밖에 안 되었는데 더 살고 싶다고. 살기 위해 이곳에 나왔다고.

 

저녁 7시가 되자 질서있게 대열을 정비하며 시작된 청계천 광장의 촛불문화제. 이날도 진행은 '미친소 닷넷' 인터넷 카페에서 맡았지만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집회와는 달랐다. 자원봉사자들이 양초와 문건을 나눠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 가운데 자유발언과 즉흥적인 문화공연으로 이어진 촛불문화제는 집회문화의 새로운 첫페이지를 쓰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딸을 데리고 청계광장에 나온 최명숙(40·강동구 고덕동)씨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공약을 인정할 수 없어 다른 후보에게 투표를 했다. 극작가로 일하며 딸을 키우고 있는 최씨는 "광우병 쇠고기 때문에 생존의 위기감을 느껴서" 촛불문화제에 참여했다면서, "경제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 뿐 아니라 대운하를 개발해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도 반대다.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것을 망치고서는 경제고 뭐고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제 자식한테 나쁜 음식 억지로 떠먹이는 격"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언론 보도를 연일 지켜보면서 충격을 받았다는 60대 부부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정책을 너무 흐지부지하게 해서 서민경제를 살리지 못했고, 과거사 청산에 매달리거나 언론과 싸우기만 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하고 시내버스 제도를 닦아놓은 지금의 대통령에게 '경제 살리기'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이 부부는 "취임 후 6개월 정도는 그래도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은 이 정부가 정책을 잘한다 못한다를 따지거나 내가 이 대통령을 잘 뽑은 건가 잘못 뽑은 건가를 따질 때는 아닌 것 같다"면서도 광우병 위험이 높은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수입하기로 한 이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서는 힘을 주어 반대했다.

 

특히 남편 쪽보다 아내 쪽에서 정부의 쇠고기 수입 결정과 한-미 관계에 대해 더 강한 불신감을 표했다.

 

"이 대통령이 미국에 순방을 다녀오는 모습을 보면서 강한 나라에 아부만 하고 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제가 덜 발달하더라도 국민의 건강만큼은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번 쇠고기 협상은 아버지가 그 음식이 아주 해롭고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제 자식한테 그 나쁜 음식을 억지로 떠먹이는 것과 똑같다."

 

무대에서는 "미친 소를 청와대로, 우리는 살고 싶다!"를 외치고 있었다. 뒤이어 매력적인 랩퍼 박하재홍씨가 등장해 '꽃들에게 힙합을'이라는 노래를 촛불의 소녀들에게 선사했다.

 

그 자리에 들러리로 들어서는 꽃다발들, 뿌리잘려 나간 화사한 얼굴, 하루 지나 냉큼 죽어버릴 이쁜 꽃들에게 힙합을, 낮은 곳에 희망을, 깜깜한 빛 속에도 꿈틀대는 비트를, 꽃들에게 힙합을, 낮은 곳에 희망을이라는 노랫말이 진정 광우병 쇠고기 협상과 사교육 천국, 입시지옥에서 시달리는 소녀 꽃들의 처지를 노래하는 것만 같았다.

 

무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서로 꼭 붙어 다정하게 무대를 바라보던 앳된 여고생 두 명은 목동에서 왔다고 했다. 지난 주말에도 시험이 끝나자마자 촛불문화제에 참석했다면서 요즘은 학급 내에서도 급식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임다정 양은 "지금은 단기방학기간인 학교가 많은데, 당장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가면 급식 먹을 걱정이 앞선다"면서 "시험 기간에는 시험문제나 성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평소에는 텔레비전에서 본 재밌는 것들이 주된 화제였는데 요즘은 광우병 이야기로 학교가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수줍음을 잘 타서 남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평범한 여학생들이었지만 이곳에서 이 소녀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저항하고 있었다. 무대에서는 또 다른 소녀들이 나와 '텔미' 춤을 추고, "왜 우리가 미친 소를 먹어야 합니까?"라며 "학교에서 배운 정의는 이것이 아니었다"고 '불의'한 어른들을 향해 야무지게 바른 소리를 했다.

 

의료보험 민영화, 한미 FTA, 대운하…대한민국은 지금 불안하다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건물 앞 난간에 기대서있던 정아무개(32·강남)씨는 지금 대한민국이 너무 불안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쇠고기만 안 먹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쇠고기를 안 먹더라도 양념으로 어딘가에 섞여서 나올지도 모르고 광우병 걸린 쇠고기가 무언가의 원재료가 되어서 내 몸 속으로 전달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되서 미국에 가자마자 미국산 쇠고기를 무제한적으로 전면 수입하기로 결정하는 것을 보고 삶 자체에 위협과 공포를 느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5년 후, 10년 후에 우리에게 닥쳐올 재앙이 걱정이다."

 

현 정부의 정책 중 정씨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의료보험 민영화와 대운하 건설이라고 한다.

 

"이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민의 건강을 지켜줄 공공 의료보험은 사멸하고, 우리의 생명마저 값비싼 사기업에 담보 잡혀야 한다니 이제는 병에 걸리면 소리없이 고통당하다가 그대로 죽으라는 거다. 이건 인권의 문제다.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이나 인권, 생명권이 이 나라에서 과연 보장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회사 안에서는 다들 자기 일에만 바빠서 정씨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정씨는 앞으로도 시간이 되는대로, 촛불문화제가 계속되는 한 끝까지 참여하겠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대한민국은 대다수 국민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최고 상위층만을 위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이 전보다 더 심해지고, 소수가 행복하되 다수는 불행한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대로 침묵한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온다. 촛불의 힘은 약해보이지만 사람 수가 늘어날수록 정부도 부담감을 가져 함부로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오늘 현장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준 종이에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라고 적혀 있는데, 대한민국 국민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될 때까지 모였으면 좋겠다." 

 

국회에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는 가운데, 지난밤 청계천 촛불문화제와는 별도로 여의도에서도 촛불의 함성이 자정까지 울려 퍼졌다. 9일과 16일에도 촛불문화제가 이어질 계획이며, 1500여 개의 전국 시민·사회단체와 인터넷 모임으로 결성된 긴급대책회의는 22일 국회 앞에서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태그:#광우병 쇠고기, #청계천광장, #촛불문화제, #한미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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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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