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으로 이뤄진 긴 문화재 회랑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에서부터 이어진 산줄기를 따라 질현성→능성→갈현성→삼정동 산성으로 이어지는 십 리 산길은 산성으로 이뤄진 문화재 회랑이다. 해발 250m를 넘지 않는 능선길을 힘들이지 않고 따라가면서 옛 성과 더불어 아기자기하고 예쁜 들꽃도 만날 수 있다. 어느 때는 뜬금없이 이 작은 들꽃들이 혹 삼국시대 변방에 수자리로 살면서 적과 싸우다가 사라졌던 옛 병사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지난 토요일(5.3), 우암 송시열이 제자를 가르쳤다는 남간정사 뒷길로 해서 산에 올랐다. 성을 답사함과 아울러 저물어 가는 봄의 정취를 맛보기 위함이었다. 남간정사 뒷산 꼭대기에는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인 능성이 자리 잡고 있다. 능성을 대충 둘러보고 나서 이내 갈현성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오늘 내가 중점적으로 둘러보고자 하는 곳은 갈현성이다.
산 비탈길을 지나다 보니 은방울꽃 군락지가 눈에 들어온다. 은방울꽃은 종 모양으로 생긴 작은 꽃이 아름다운 꽃이다. 어찌나 예쁜지 앙증맞기까지 하다. 향기가 은은해서 향수 재료로도 쓰인다고 한다. 생긴 것과는 달리 유독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강심 작용과 이뇨작용이 있어 심장 쇠약·부종·타박상 등의 치료에 쓰인다고 한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는 옛말을 새삼스럽게 생각나게 하는 꽃이다.
이름에서 짐작하다시피 갈현성은 갈고개에 있다. 갈고개는 지금의 대청 호숫가인 옛날 대덕군 동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무더운 날씨다. 벌써 숨을 헉헉거릴 만큼 더운 날이 찾아 오다니 큰일이다. 이윽고 갈현성이 있는 산의 정상부(해발 263m)에 도착한다.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장대란 돌로 쌓아 높게 만들어 장수가 올라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정상부의 중앙에 저장시설이 있었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미 매몰된 지 오래인 것이다. 또 봉수대가 있었다면 성의 북쪽, 가장 높은 곳인 이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역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정상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성의 남문이 있었던 남문지에 닿는다. 남문지 오른쪽엔 원형에 가까울 만큼 완전한 성벽이 남아 있다. 나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2.6m이다.
한편 서쪽 성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원래 자연 지형을 활용하여 암벽이 있어 험한 곳은 자연 그대로 놔두고 보강이 필요한 곳만 부분적으로만 성벽을 쌓았던 것인데 그마저 거의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남벽에서 서벽으로 전환되는 지점엔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7~8단의 석축이 남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옥천 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
남문지에서 동쪽으로 전개되는 기다란 남벽은 갈현성에서 가장 완벽하게 성돌이 남이 있는 곳이다. 성벽을 쌓은 방법은 내외협축 방식이다. 즉 안팎으로 모두 돌을 쌓고 내부를 흙으로 채운 형태이다. 눈으로 대충 길이를 재면 남벽은 길이가 대략 50m쯤 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이곳에 허물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석축 부분을 보면 높이가 약 2.5m 정도 된다. 아래로 허물어져 내린 돌의 숫자를 감안하면 원래 높이는 약 5m 가량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성돌은 네모난 돌로 앞면을 맞추어 쌓았다. 기단석으로부터 조금씩 들여서 쌓은 4단은 거의 수직이다. 그러나 5단째 돌부터는 안쪽으로 조금 심하게 기울여 쌓았다.
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향토사료관 자료는 "실측한 성의 둘레가 약 350m이며 성내 곳곳에서 삼국시대의 토기 파편과 기와 파편이 밝견되었다"고 전한다. 이로 미루어 이 성이 삼국시대부터 사용하던 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옥천 방면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현재도 이 산성의 동남쪽 아래로는 대전-옥천 간 국도가 지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지정학적 가치는 개발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내가 틈틈이 산성을 답사하는 이유
남쪽으로는 길을 나선다. 갈현성에서 봉우리 두어 개를 넘으면 삼정동산성이 나온다.
삼정동산성 표지석이 서 있는 곳에 닿기 전 먼저 서낭당처럼 돌무더기가 수북이 쌓여 있는 산봉우리에 닿는다. 이곳엔 석축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마도 삼정동산성의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금 더 내려오면 표지석이 서 있는 성의 중심에 닿는다. 이곳에도 역시 돌무더기 몇 개밖에 남아있지 않다. 남고북저의 형태였다고 전하는 이 산성은 지금은 철저히 파괴되어 단지 돌무더기 몇 개로 존재한다. 아마 표지석조차 없다면 사람들은 이곳에 성황당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 산성들이 대전시 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인 1990년 초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파괴가 진행되진 않았을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곳엔 20여m 간격으로 표지석이 2개나 서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성을 잘 지키지 못해 미안한 '지못미' 회원들이 관청에도 있는 게 아닐까. 자꾸만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사라져 가는 게 안타깝다. 산을 내려가면서 오래전 소설가 박태순이 내렸던 '국토'에 대한 정의를 떠올린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한반도는 불행한 땅덩어리이며 미국으로 이민이나 떠나버리고 싶은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한반도는 자기가 어떻게 선택할 수도 없는 '국토'가 된다. 국토는 그냥 땅이 아니다. 자기 삶을 얹혀 놓고 있는 인생의 터가 된다. '국토'는 국가의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국민의 땅, 민토(民土)라는 의미이다. 민중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땅이 곧 국토이다.
- 박태순 저 <국토와 민중>(1983) 14쪽
비록 오랜 시일이 흐르긴 했지만 아직도 용도폐기될 낡은 것이 아닌 국토의 개념이 아닌가 싶다. 주름이 간 것이거나 천하 절경의 땅이거나를 막론하고 국토는 어느 한 부분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다. 더구나 산성은 민중들이 생명을 걸고 국토를 지켜내려고 목숨 바쳐 싸운 장소이다. 신경만 쓴다면 돌이 살아서 걸어가겠는가. 신발처럼 닳아지길 하겠는가. 문화재 가운데 가장 지키기 쉬운 게 석조 문화재 아닌가 말이다.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대전 지역 산성의 표정을 읽어내고 기록하고 싶다. "자기가 어떻게 선택할 수도 없는 '국토'"를 지키려고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숨결을 더듬어 그 일부분만이라도 오늘에 되살려냈으면 하는 게 내 작은 희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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