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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함께 가는 길

 

내 집에는 일백 평 남짓한 텃밭이 딸려 있다. 해마다 봄이면 그 텃밭을 갈아엎고는 여러 가지 푸성귀를 가꾸면서 싱싱한 남새를 맛보고 있다. 푸성귀를 가꾸는 일은 주로 아내가 하지만 밭을 뒤집거나 밑거름을 내고 두둑에 비닐을 덮는 일은 주로 내 몫이다.

 

올봄은 호남지방에 부지런히 다닌다고 여태 두둑에 비닐을 덮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연휴를 맞아 아이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어제 녀석과 밭두둑을 고르고 비닐을 덮자 밀린 숙제를 끝낸 양 후련했다. 부자가 밭에서 함께 일을 했던 그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내가 사는 마을 길 건너편에는 박씨 부자 농사꾼이 사는데, 부자가 같이 농사일을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지난해 늦봄 산책길에 이들 부자가 옥수수밭에서 나란히 옥수수 모종에 흙을 덮어주는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카메라에 담고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기사를 한 편 쓴 일이 있었다. 누리꾼들도 아름답게 보았든지 조회 수가 무척 많았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부자가 함께하는 직업인이 되고 싶다. 아버지가 가는 길을, 어머니가 가는 길을, 자식들이 묵묵히 따라가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 일인가. 아마도 인류의 문화도, 역사도 그렇게 전수된 것일 것이다.

 

 

살아남은 가족들의 고난

 

전해산 의병장 취재로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를 마치고 호남의병에 불씨를 붙인 면암 최익현 선생을 찾는 것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리려고 했는데 오성술 의병장 손자 오용진 순국선열회 부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부 겸 답사 일정을 묻기에, 호남지방 답사는 마쳤다고 하였더니, 영광에 김용구 김기봉 부자 의병장을 빠트렸다고 당신께서 길 안내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올해 75세의 노구에도 손수 핸들을 잡고 전적지 곳곳을 안내하겠다는데 어찌 그 말씀을 따르지 않으랴. 4월 28일 이른 아침 안흥을 출발하여 대전에서 오 부회장을 만나 청양의 모덕사와 예산의 면암 묘소에 절한 다음,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부지런히 영광으로 달려갔더니 다행히 해가 지지 않았다.

 

후손 김근순(전 대마면장)씨가 집으로 안내하려는 것을 산소부터 가자고 하였더니 집에서 부르면 대답할 거리인 앞산에 증조부 김용구, 조부 김기봉 부자 의병장을 모셔두었다. 최근 묘역을 크게 손 본 듯, 석물에는 풍상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오 부회장과 함께 절을 드린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건넌방에서 대담을 나눴다.

 

김근순씨는 증조할아버지 김용구 의병장, 할아버지 김기봉의 의병장의 충절보다 할머니 청송 심씨의 효열부(孝烈, 효성과 절개를 지킨 열부)를 더 높이 평가했다.

 

"남자들은 나라를 위해 한목숨 바치는 게 당연한 일일 테지만, 꽃다운 20세에 청상(靑孀, 젊은 과부)이 되어 온갖 고난을 다 이기고, 송죽(松竹) 같은 절개를 지키며, 시아버님이 남기신 의소일기(義所日記)인 <신담록(薪膽錄)>을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모진 일제 강점기를 넘겨 세상에 빛을 보게 한 그 정성은 부덕(婦德)의 한 본보기"라고 자랑했다.

 

이번 답사길에 후손들을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들으면 순국한 의병장보다 남은 가족들의 삶이 더 가시밭길이었다. 한 의병장 후손은 '꿀꿀' 거리는 돼지우리 옆에 짐승처럼 살았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김근순 후손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뿐 아니라 당신 아버지(김두호)도 6·10 만세를 주동한 삼대 독립투사로, 일제에게 밉보여 집조차 불을 질러 여러 곳을 전전하였지만. 어찌 우리 집만 그랬겠느냐고, 고생한 얘기는 말을 아꼈다.

 

당신은 고등학교를 어렵게 나온 뒤 대학진학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출발하여 20년을 근무했는데, 당신은 집안 종손에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난바, 부모를 일찍 여읜 바람에 아내가 혼자 고향에서 시동생 시누이를 돌보고 자녀까지 기르고 있었다.

 

더 이상 아내의 수고를 볼 수가 없어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 때 이기수 부시장을 찾아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전근을 신청하자 남들은 서울로 오지 못해 안달복달인데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끝내 뜻을 굽히지 않자 대마면장으로 발령 내줘 면장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당신은 '충효보국(忠孝輔國)'이 몸에 밴 모범 인생으로 가훈이 "선조의 유지를 받들고, 정직하게 살자"라고 소개했다.

 

밤이 늦도록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는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광주로 나왔다.

 

 

단장의 영산강 포구

 

이튿날 돌아오면서 이번 호남의병 순례에서 빠트린 중요 전적지를 더듬어 보았다. 먼저 나주 영산강 포구로 갔다. 구한말에 일제가 호남의병을 체포한 뒤 수괴급에 해당하는 인물은 대구감옥소로 보냈는데 그 시절에는 교통이 불편해 바로 이 포구에서 배를 태워 목포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한 다음, 육로로 대구에 갔던 탓에 가족들과 생이별했던 단장(斷腸, 창자를 끊음)의 아픔이 새겨지고 피눈물이 뿌려진 곳이라고 오 부회장은 설명했다.

 

당신 할아버지 오성술 의병장도 오랏줄에 묶인 채 이 영상강 포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때 나루터에는 부인이 석 달된 아들을 포대기에 안고 나와 부자의 첫 상봉이자 생이별을 했던 곳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거기서 다시 북상, 구진포에서 잠시 머물고는 의병 전적지로 유명한 용문산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고막포 전적지에 이르렀다. 무심한 세월은 옛 격전지 모습을 말끔히 씻어버리고는 들에는 보리가 벌써 팼고 둑에는 샛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이곳은 전해산 의병부대가 일제 병참 기지를 공격하였던 전적지라고 하였다.

 

다시 북으로 한 시간 남짓 달리자 고창이 나오고 거기서 좁은 산길을 30여 분 더 들어가자 문수사가 나왔다. 이곳은 후기 호남의병의 첫 승첩지라고 할 만큼 1907년 190월 21일~22일 양일간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가 일제 군경을 격퇴한 곳이었다.

 

주지 선법(善法) 스님을 뵙고 지난 역사를 여쭙자, 문수사 뒷산 정상 부근에는 50~60명이 숨어 지낼 수 있는 자연동굴인 자장굴이 있는데 거기서 의병부대가 머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자장굴은 국난 때마다 피난처로 한국전쟁 때도 빨치산들이 그곳에 머물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요즘은 어느 산이나 숲이 매우 우거져 도저히 오를 수도 없기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벗어났다. 문수사는 멧부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움푹한 골짜기로 우리 의병들이 지형지물을 이용, 몰려오는 일 군경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지형이었다. 싱그러운 신록의 빛깔과 향기를 마음껏 즐긴 뒤, 다시 북으로 달려 대전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오 부회장과 헤어졌다.

 

김용구 행장

 

김용구 의병장은 전라남도 영광 출신으로 본명은 용구(容球)요, 자는 유성(有聲), 호는 후은(後隱)이다. 1907년 8월 8일 수학(修學)하던 중에 구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삼연과 함께 비밀히 국사를 도모하여 무기를 운반하여 두었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수련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모든 의사들을 모아 놓고 피를 뿌리며 단에 올라 천지에 맹서하고 호남 창의 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였다. 그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장 기삼연(奇參衍)

통령 김용구(金容球)

참모  김엽중(金燁中)

후군 이남규(李南奎) 김봉수(金鳳樹)

운량 김태수(金泰洙)

종사 김익중(金翼中)

총독 백효인(白孝仁) 서석구(徐錫球)

감기 이영화(李英華) 전수용(全垂鏞)

좌익 김창복(金昌馥) 이석용(李錫庸)

우익 허경화(許景和)

선봉 김준(金準)

포대 김기순(金基淳)

중군 이철형(李哲衡)

 

이들 중 상당한 수의 인물이 뒤에 개별 의진을 구성하여 호남 의병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1907년 8월 11일, 동지 박용근(朴溶根)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자 수백 인의 자원병이 그를 따랐다. 그날 밤으로 그들을 무장시켜 가지고 다음날 영광읍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적병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 병기가 좋지 못하여 적에게 패하였다.

 

8월 26일 화개에서 왜적 10여 명을 잡아 죽였고, 이튿날 다시 칠불사에서 적 수 명을 죽였다. 9월 6일에는 연곡촌에서 적병 10여 명을 죽이니 나머지 적병은 모두 도망쳤다. 9월 16일 문수사에서 적 10여 명을 사상시켰고, 9월 25일 무장 읍내에서 적병을 무찌르니 적은 모두 놀라 도망쳤다. 이후에도 고창·법성포·장성 오동촌·백양사·함평·고부 등지에서 적병을 무찔렀다.

 

12월 28일 행군하여 순창 복흥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성재 기삼연과 서로 동서로 나뉘었다. 기삼연은 발을 다친 까닭에 걷기가 불편하여 더 이상 종군할 수 없었다.

 

기삼연은 김용구에게 후임을 맡기면서 "군중의 제반 일을 그대가 모두 맡아 신중히 처리하여 국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하고, 도장과 칼을 맡겼다. 김용구는 군병(軍兵)을 대신 거느리고 행군하여 장성 조양리로 갔다.

 

한편 기삼연은 순창 흥복산 속에서 치료하며 재기를 꾀하고 있었으나 음력 정월 초하루에 적의 포위를 받아 결국 체포당하여 음력 1월 2일 광주시 서천교에서 적의 흉탄에 순국하였다. 그 뒤 김용구 의진은 기삼연의 중군장이었던 김태원· 김율 등과 연합 의진을 구성하기도 하면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1908년에 들어가면서 적의 공격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에서, 2월 19일 고창 읍내, 이튿날 장성 토정리, 2월 24일 장성 송치(松峙), 3월 2일 영광 오동리, 3월 12일 구수산, 3월 23일 영광 홍농면 대덕리, 4월 11일 무장 선운사, 17일 무장 와공면 유동 등지에서 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마침내 적에게 패하였고 김용구는 부상을 당하여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김용구는 군권을 박도경에게 맡기고 장성 백암산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3, 4년을 숨어서 치병하는 가운데, 병은 좀 나았으나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경술국치를 당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다시 후사를 도모할 목적으로 더 깊은 산중인 금산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울분과 노환이 겹친 데다가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변고를 듣고 음독, 1918년 12월 21일(음력) 절사(節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기봉 행장

 

김용구(金容球)의 아들이다. 정미7조약 체결 후 군대해산이 단행되자 김기봉은 아버지와 함께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회합에 참여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을미의병 때에 기우만(奇宇萬)의 광산회맹소(光山會盟所)의 의병운동에 기삼연과 함께 장성 의진을 거느리고 참여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아버지는 기삼연 의진의 통령(統領)이 되어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김기봉은 아버지를 따라 작전을 수행해 오다가 1907년 12월 10일 흥덕 안치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기사는 호남 의병 전적지 마지막 순례로 면암 최익현 선생 편입니다. 


태그:#호남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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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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