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비해 여권이 향상된 건 사실이지만 한국땅에서 여자로 살면서 여성에 대한 비하적 태도를 한번도 접하지 않았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조직내 중요직책을 맡기거나 승진대상에 오르는 것에서부터 성적 개방성에 대한 선입견이며 일상적인 언어사용 등 암암리에 자행되는 남녀차별은 사회 곳곳에 만연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으로, 그것도 젊음을 최고의 현실적 가치로 쳐주는 작금의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젊지않은 여성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소수자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체득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른바 동성애자나 장애자, 불법체류자 등 잘못된 사회통념상 음지로 밀려나는 소수자들의 처지와 그들이 당하는 문제에 자기도 모르게 관심이 기울기 마련이다. 그게 남의 일이 아닌 바로 여성으로 살며 겪은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자각 때문이다. 내가 '시골뜨기 부처'라는 소설을 집어들게 된 것도 결국은 이런 관심과 자각의 연장선에서였다.
인도 이민2세인 영국 청년의 성장소설이라는 평에 관심의 눈길이 갔던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읽지 않았다면 책을 펴들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로에 해당하는 분량의 일과 틈틈이 읽기에는 책의 두께가 만만찮아서였다. 거기다 하니프 쿠레이시라는 작가의 이름도 낯설었다. 그런데 표지안쪽에 실려있는 작가 소개글을 보니 몹시 우중충하고 불안하고 불길했던, 통증 같은 걸 느끼며 봤던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의 극본을 쓴 작가라는 거였다. 결과적으로 소설을 펼쳐든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소설은 인종 갈등과 동성애 등 소수자의 삶을 십대에서 이십대로 넘어가는 카림의 호기심과 욕망과 방황을 따라가면서 날카롭고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1200매를 훨씬 넘어가는 장편을 읽는 내내 한순간도 지겨운 느낌을 받지않았던 건 작가 쿠레이시가 등장시킨 인물들의 다양한 면면과 그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고 해야겠다. 그는 카림을 비롯해 주변 인물들에 현미경을 들이대듯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들의 현실과 내면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묘사하고 재현해 낸다. 한 문장도 무의미하게 던져진 게 아닌 듯한 글발도 글발이지만 단락에서 단락으로 경쾌하게 넘어가면서 산뜻하게 전환되는 스토리전개는 이 책이 쿠레이시의 첫 번째 소설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런 게 필시 소설가로서의 재능이리라.
아무튼 이 소설은 6.8혁명의 영향으로 인종 간 갈등과 성의 자유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표면에 떠올랐던 1970년대 런던과 그 근교를 배경으로 젊음이들의 삶을 그려낸 일종의 풍속도라 할 수 있다. 하니프 쿠레이시는 런던에서 태어난 파키스탄계 영국작가로 영화와 연극을 비롯한 전방위적 글쓰기에서 영국사회 속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문제들을 다루는데 첫소설인 이 작품에서부터 영국 사회 속에 사는 개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첨예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가 붙잡고 있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그러나 소설 내용까지 무겁고 칙칙한 건 아니다. 외려 대단히 코믹하다. 참으로 부당하고 억울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불합리한 상황을 야기하는 건 대개 편견에 사로잡힌 못난 인물들의 행태 아니던가.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인물들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그러나 애정을 갖고 다룬다. 또한 그 인물들이 고수하는 삶의 방식과 사고의 틀로 집적되는 사회 분위기를 철없고 호기심 왕성하며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젊은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자칫 증오와 분노를 촉발할 사태를 가볍고 여유있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드러낸다.
가볍게 유머러스하게 다루면서도 인물들이 겪는 가치관의 혼란과 고통과 슬픔의 코드를 놓치는 법 없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는 따지고 보면 별 사건이랄 것도 없다. 그저 카림과 그의 주변 인물이 겪는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일들을 천천히 따라가게 하는 것으로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쿠레이시가 소설뿐 아니라 극본과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한 이력이 빛나는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지문 사이사이 인물끼리 주고받는 대사처리도 시나리오작가로서의 저력이 발휘되는 부분이지만.
실로 방점을 둔 것 같지 않게 툭툭 내뱉는 대사를 보면 런던이라는 사회뿐 아니라 인종문제를 주로 다루는 이 작가가 인간의 심리에도 정통한 작가라는 게 느껴진다. 아시아의 전통을 지키려다 자기모순에 빠지는 가난한 이민자와 사회적 신분상승을 노리는 영국 하층계급들과 진보를 표방하는 연극계 인사들과 동성 이성 가리지않고 섹스를 하고 마약을 하는 것으로 전통적 가치에 반항하는 청년문화를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는 인물들의 일상적 삶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심리학이나 인류학 같은 어떤 이론적 문구 하나 꺼내지 않고 사회상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과 심리의 근간을 짚어내는 묘사를 보면 소설을 쓰든 뭘 쓰든 정말이지 공부를 제대로 하고 써야겠다는 걸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사실 이 소설의 경우 여기서 줄거리를 세세하게 늘어놓는 건 별 의미가 없겠다. 섹스와 우정과 연인 가족 간의 사랑을 깨달으며 자신의 청제성에 눈을 떠가는 카림의 성장 여정을 따라가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 소설의 매력은 소설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각 인물들의 캐릭터 자체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 또하나 이 소설의 매력으로 빠트릴 수 없는 게 적절한 암시와 비유를 적절히 살린 '시골뜨기 부처'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다. 부처가 누구인가. 삶의 조건 앞에 고통받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희열을 느끼며 때로는 사기치고 강간 살상하며 추악하게 늙어가는 생로병사의 인생들을 통해 마침내 득도하신 분 아닌가. 인도출신의 아버지 하룬이 영국 사회에 편입해 말단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명상 수업을 통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고, 카림이 실력이 아닌 정글북의 모글리 같은 역을 연기하는 것으로 배우로 출발하는 데서도 '시골뜨기 부처'의 의미는 일단 드러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카림을 잡아주는 손과 보이지 않는 얼굴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손과 얼굴이 의미하는 게 종국에는 시골뜨기 부처로 가닿는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소수자의 삶에 한번이라도 눈길을 보낸 사람이라면 단언할 수 있다. 펼쳐든 책을 정신없이 읽고나서 마지막 장을 넘기기 직전, 그 시골뜨기 부처의 얼굴을 눈에 보이게 완성해 갈 미래를 열어두는 것으로 희망을 던져놓는 작가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보내게 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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