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산길
안산동산성은 대전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다. 계룡산을 바로 지척에 둔 곳이다. 백제가 우산봉(573m)이라는 꽤 높은 봉우리에서 뻗어져 내려온 성재산(226m)에 시루 핀을 두르듯이 쌓은 돌성이다.
오늘(5.9)은 안산동산성을 바라고 길을 나선다. 그곳에 다녀온 지 2년쯤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어득운리 마을을 지난다. 연기군 서면과 등을 기대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해가 비추는 시간이 짧고 어둡기 때문에 '어두니'라 불렀다는 마을이다. 그러나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실제로는 해가 빨리 지는 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옛날 누군가의 지나친 감수성이 사실을 과장한 이름인지 모른다.
맨날 겨울에만 이곳을 지나간 탓인지 신록이 파릇파릇한 봄날에 바라보는 마을 풍경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우산봉 아래 논들은 벌써 모심을 준비를 마쳤다. 논들이 마치 물을 받아놓은 함지박 같다. 문득 이병훈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아랫녘에서는 여태껏
빗물을 풀어 쓴다.
지붕으로 받은 빗물을
고샅길에 모아서
고샅길에 흐르는 빗물을
고래실에 모아서
차례차례 풀어 쓴다.
고래실 무논에서 풀려가는 빗물은
물꼬를 넘어 논배미로 갈려 간다.
논배미에서 논배미로 갈려 간다.
갈려 가면서 너비를 만든다.
- 이병훈 시 '논갈이 2' 일부
올봄은 비가 그리 자주 내린 편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무들이 약간 가뭄을 타는 것 같다. 지나오는 길에 이팝나무 꽃들이 벌써 시든 것을 보았다. 산자락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직전, 반가운 나무들이 눈에 띈다. 붉게 꽃을 피운 닥나무들이다. 이 길을 몇 번 지나갔지만 모르고 지나쳤는데 꽃이 피고서야 비로소 닥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어린 날, 닥나무 껍질로 팽이채를 만들면 얼마나 질겼던가.
길가엔 드문드문 찔레꽃이 피어 있다. 찔레 순 껍질을 벗겨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한데 내 생애는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버린 것인가. 늦은 봄날의 산길은 갖가지 생각을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게 한다.
이윽고 남문지에 도착한다. 이곳이 현재 성을 출입하는 주통로이다. 남문지 오른쪽 성벽은 남아 있지 않지만, 왼쪽 성벽이 남아 있어 문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산책로를 따라 오른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아올 작정이다. 동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자 제단이 나온다. 제단 앞에선 두 청년이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
산성이 있는 성재산은 대전 유성구 안산동과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연기군 금남면의 3개 시군의 경계에 걸쳐 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이 일대를 연기와 공주, 유성으로 분할한 결과다. 이름마저 각각 공주에서는 송곡리산성, 연기에서는 용담리산성, 대전에서는 안산동산성이라고 달리 부르고 있다.
1997년 이래, 3월 1일이면 제단이 있는 이곳에서 산성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왜 '덕진산성단'이라 하는 걸까. 여러 기록들은 덕진현이 대덕밸리 IC 앞인 유성구 화암동과 방현동·용산동 일대라고 알려준다. 따라서 그 근처에 위치한 적오산성을 덕진산성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일부에서 이 안산동산성을 덕진산성이라고 부르는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
제단의 위쪽은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꽤 너른 평지가 있다. 창고지가 있던 곳이라 한다.
여자가 군역을 대신했다는 걸 암시하는 전설의 내용
제단을 지나 성의 동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휘어진 곳을 지나면 갑자기 지대가 낮아진다. 그 직전에서 융기된 성벽을 만난다. 성벽의 측면 형태로 미루어 아마도 북문이 있는 자리가 아닌가 싶다.
우거진 나무 사이를 헤치고 아래로 내려가 성벽의 바깥면을 바라본다. 성벽이 아주 높은 것으로 보아 문 위에 석루를 설치했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석루는 성곽의 위엄을 나타내면서 유사시에는 지휘소로 이용하기도 하는 시설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대전향토사료관 자료 가운데 "서벽의 일부는 융기된 석루상(石壘狀)을 볼 수 있는데, 내벽 고1.1m, 외벽 고 6.3m, 상부 폭이 2.3m이다"라고 기술한 대목이다. 자료는 곧이어 "북벽의 외고는 6.3m이다"라고 쓰고 있다. 내가 보기에 "서벽의 일부는 융기된 석루상(石壘狀)을 볼 수 있는데"라고 한 대목은 잘못이다. 몇 번이나 돌아봤지만 서쪽엔 석루가 없다. 아마도 북벽과 서벽에 대한 내용을 혼동해서 섞어 쓴 게 아닐까 싶다.
이 성벽을 보면 안산동산성이 화강암과 편암계 돌로 가로쌓기와 모로쌓기를 병행하여 바깥면을 맞추어 쌓은 내탁외축의 성벽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성벽 사이에서 군데군데 기린초가 자라고 있다. 사적 제355호인 계족산성 북벽에서도 기린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걸 보면 돌나물과에 속하는 기린초는 돌을 좋아하는 식물이 틀림 없다.
이곳 말고 달리 남아 있는 북벽은 없다. 본래부터 쌓지 않은 것인지 허물어져 묻힌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설은 이 성이 애초부터 미완성이라고 전한다. 예전에 내가 연기군에 사신다는 노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옛날에 이 지역에 힘이 장사인 남매가 있었다고 한다. 둘은 누가 더 힘이 센지 내기를 걸었다. 오빠가 무거운 쇠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는 동안 누이동생은 성을 쌓기로 한 것. 오빠는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누이는 마지막 돌만 쌓으면 끝나는 긴박한 찰나.
어머니는 팥죽을 쑤어서 딸에게 들고 갔다. 딸의 작업을 지연시키기 위해서다. 마침 배가몹시 고팠던 누이는 어머니가 내미는 팥죽을 넙죽 받았다. 누이가 팥죽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막 죽을 먹으려는 순간, 오빠가 돌아왔다. 그렇게 내기에 진 누이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래서 안산동산성이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딸보다 아들이 이기기를 바라는 어머니에게서 엿볼 수 있는 남존여비의 사상이다. 그리고 누이가 성을 쌓았다는 건 집안에 수자리 살 남자가 없을 적엔 여자가 대신 끌려가기도 했다는 가혹한 군역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벽을 쌓지 않았던 것은 북쪽에서 침입해 오는 적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따금 높다란 석루에서 올라 북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북벽을 쌓지 않게 한 건 아닐까.
성돌은 나뭇잎처럼 많은 입을 가졌다
이윽고 서문터에 닿는다. 서문터는 고대산성으로는 드물게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심정보가 쓴 대전 지역의 관방유적에 관한 글에 따르면 "서문지의 문 폭은 4.9m이고, 문지의 성벽 육축 폭은 5.7m, 높이는 5m"라고 한다.
육축(陸築)이란 출입 지역에 두껍고 높게 축조한 대(臺)를 말한다. 육축에는 '무사석'이라 부르는 일반 성돌보다 큰 돌을 쌓았다. 육축의 대 위에 올라서면 우뚝 선 계룡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공주군 반포면·연기군 금남면 일대와 도로 옆을 흐르는 금강의 지류인 용수천을 볼 수 있다. 적의 동태를 살피기엔 그만이다.
몇 번이나 개축했는지는 모르지만 천 년을 넘은 성문 터가 보존돼 있다는 건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문에서 원래의 출발지인 남문터로 가는 길은 잡풀이 우거져 길이 보이지 않는다. 풀숲을 즈려밟고 걸어간다. 속으로 '혹시 뱀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다. 아까 산으로 올라오는 길에 뱀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지만, 여기서 남문에 이르기까지가 성돌이 가장 양호하게 남아 있는 구간이다.
남문이 가까워지면 평탄하던 길이 갑자기 가파른 오르막길로 변한다. 산성 내 지형이 서북쪽이 낮고 동남쪽이 높기 때문이다. 대전향토사료관 자료는 남벽과 서북벽과의 고저 차이가 40m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남문지로 돌아왔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이 안산동산성은 성의 둘레가 약 600∼900m 정도 되는 성이다. 가까운 청주의 상당산성이나 계족산성처럼 오랜 시간이 걸려야 돌 수 있는 큰 성은 아니다.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출토되기도 한, 백제산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단식의 산성이다.
이 안산동산성은 유성을 거쳐 공주로 진격하는 적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담당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백제엔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산성이었을 것이다. 현재도 성 가까이 대전-조치원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돌에겐 입이 없지만 성돌은 나뭇잎처럼 많은 입을 가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입을 열어 조잘대지는 않는다. 묻는 이에게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러므로 산성을 찾아가는 것은 돌과 인터뷰하러 가는 것이다. 내가 좋은 질문을 던져야만 돌들도 그제서야 생각난 듯 좋은 대답을 해준다.
성돌들은 내게 자신의 삶은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자신의 역사는 인터뷰어에 의해 늘 새롭게 쓰여지는 현재라고 말한다. 산성을 답사할 적마다 난 자신에게 반문하곤 한다. "나는 과연 좋은 인터뷰어인가?"라고.
아까와는 달리 산 뒤쪽으로 내려간다. 여태 산의 앞 모습만 봤으니 마지막엔 뒷모습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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