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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선답 에세이? 이런저런 매체들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유명세를 팔아먹자는 얄팍한 계산의 책은 아닐까?'

 

거의 매일 들락거리는 인터넷 서점에서 <산중일기>(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를 만난 순간 들었던 반감이다. 유명한 소설가, 유명한 시인이 쓴 수필이라 믿고 샀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아니 세상에 떠도는 좋은 말들을 적당히 짜깁기해 실망했던 책들이 순간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어쭙잖은 선입견이 참으로 부끄럽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란 첫 번째 글을 읽으며 공감했고, 세 번째, '깨깨 씻어라. 인호야' 편을 읽다가는 연민으로 결국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삶과 가족이라는 세상 가장 숭고한 종교에 합장

 

"목욕 한 번 가려면 어머니는 북만주로 이주를 떠나는 유랑민처럼 세숫대야에 비누, 수건들을 가득 담아 집을 나서곤 하셨다.…(중략) 번번히 창피를 당하거나 들키곤 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목욕탕에 가실 때마다 여전히 빨랫감들을 암시장에 나가는 쌀장수처럼 몰래 숨겨갖고 들어가시곤 하셨다. 남의 눈치가 보이면 내게 옷을 대 여섯 개 껴입게 하셨는데... 목욕탕에 갈 때면 으레 대여섯 개의 윗도리에다 대여섯 개의 바지와 내복을 껴입어야 했다."

 

이렇게 어머니와 목욕탕 앞에 이르러 주인이 "몇 살이냐?"고 물으면 어머니의 완고한 다짐대로 "아홉 살이에요" 혹은 "3학년"이라고 어김없이 대답한다.

 

주인의 눈을 무사히 통과하면 목욕탕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많은 여인들의 무서운 눈초리와 직감적인 나이 구별. 하지만 어머니의 굽힘 없는 억척으로 중 1때까지 '아홉 살 인호'였다.

 

좀 더 자라 처음으로 어머니와 헤어져 목욕탕에 들어가던 날, 어머니는 남탕과 여탕을 구분한 칸막이 너머로 소리소리 질러 잔소리를 한다.

 

"깨깨(사투리) 씻어라 인호야!" "뜨거운 물에는 들어갔느냐?" "머리는 세 번 감았느냐?"

 

옆에서 천 번까지 세며 참고 참던 어떤 할아버지가 "극성스럽기도 하구나. 지독한 어미로군!"이라고 핀잔을 할 만큼.

 

어머니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나이 대접을 제대로 받고 싶은 소년의 우쭐한 마음. 작가는 "나는 참 치사했다"는 말과 함께 그토록 억척스럽게 아들을 여탕으로 끌고 다니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저자의 대중 목욕탕 이야기는 한편으로 아기자기하게 재미있고 한편으론 가슴 찡하다. 그래서 재미있게 빠져들어 읽다가 나이를 속여서라도 언제까지든 곁에 두고 때를 씻기고 싶은, 아들을 항상 품에 품고 싶은 어머니의 애잔한 사랑. 그 연민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톨릭 신자인 작가 최인호의 '절간과의 인연'

 

1부는 주로 저자의 일상 이야기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늙어가는 아내가 마음 아프다"는 작가의 일상인으로서, 문학인으로서 소소한 일상에서 얻는 깨달음에 관한 글들이다. 그래서 부제는 '산으로 내가 갈 수 없으면 산이 내게 오게 할 수밖에'.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 '나는 <가족> 안에서 풍요로웠고 <가족> 안에서 스승과 부처를 만났다'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결국 온전히 버려지는 시간이란 없다' 등의 17편.

 

제목만으로도 선(문)답이 느껴지는 이 글들에서 <가족> <별들의 고향>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상도> <해신> <유림> 등 그간 우리에게 워낙 좋은 작품을 많이 안겨준 작가 최인호의 삶과 가치관, 문학세계와 작품이 가능했던 인연 등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수많은 작품 중 내게는 <샘터>에 연재했던 <가족>과 경허 스님의 무애행과 스님의 제자인 만공 스님을 만나게 해준 <길 없는 길>이 가장 인상 깊었다. 내가 불자인지라 가톨릭 신자인 저자의 불교적 냄새가 그윽한 <길 없는 길>의 사소한 이야기들은 특히 궁금했다.

 

마침내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궁금함을 어느 정도는 풀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다음호가 나오기를 기다릴 만큼 기다려 읽었던 <샘터>와 <가족>의 감동을 다시 만나 좋았다.

 

<산중일기>로 만나는 작품은 모두 45편, 작가의 집필도 45년이란다. 그동안 작가의 작품을 좋아했던 사람들, 나처럼 <길 없는 길>이나 <가족>에 특별한 감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작가의 작품이 가능했던 인연들을 만날 수 있는 에세이다.

 

당뇨병이 있어서 건강을 위해 경허 스님이 출가한 청계사가 있는 청계산에 자주 오르는 작가는 어느 날  약수터 옆 소나무 등걸에 붙여진 어떤  글을 만난다.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 6월 X일 오후 X시경 청계산 산행을 하던 중 갑자기 고통을 느끼고 쓰러져 여러 등산객들의 고마우신 도움으로 신속하게 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고 마침내 쾌차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고마우신 여러분의 댁내에 만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불시에 겪는 고통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긴 어떤 사람의 답례의 글이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어떤 장면이 떠올라 가슴 뭉클하게 읽었다.

 

산으로 내가 갈 수 없으면 산이 내게 오게 할 수밖에

 

<산중일기>에는 이처럼 가슴 뭉클한 감동도, 불가와 선승들의 깨우침과 같은 등골 서늘해지는 글들도 많다. 산에 가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산에 갈 수 없다는 누군가에게, 책 한권 읽을 여유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내 친구들에게, 누군가에게든 꼭 전하고 싶은 그런 말.

 

"도대체 나에게 있어 나는 누구인가"

 

"심청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야말로 심 봉사란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심청이가 아침  저녁 수발을 들고 오가는데도, 나는 공양미 300석을 따로 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없다. 나쁜 말 한마디도 그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이 어디론가 날아가 나쁜 결과를 맺으며 좋은 인연도 그대로 사라지는 법 없이 어디엔가 씨앗으로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산중일기>-최인호 선답 에세이(최인호 글/백종하 사진/랜덤하우스 코리아 2008년 4월 25일/11800원)


산중일기 - 최인호 선답 에세이

최인호 지음, 백종하 사진, 랜덤하우스코리아(2008)


태그:#최인호, #길 없는 길, #샘터, #산중일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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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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