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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검당 안 일로향실. 남명 스님께서 거처하던 곳이다.
심검당 안 일로향실. 남명 스님께서 거처하던 곳이다. ⓒ 안병기

내가 처음 순천 선암사에 간 것은 80년대 초였다. 그 때 나는 몇 달째 무전여행 중이었다. 초파일 전날, 공교롭게도 난 전남 순천 시내를 지나가고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나서 그 대가로 설거지를 해줬다. 그리곤 그 날의 숙박 예정지인 선암사를 향해 걸어갔다. 숙식을 대개 절집에서 해결하곤 했던 것이다.

5월 초긴 했지만, 몹시 무더운 날씨였다. 걷기가 몹시 팍팍했다. 지나가는 분을 붙들고 "선암사까지 얼마나 가야 하느냐"라고 물었더니 걸어서는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기 힘들 거라고 한다.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태워달라고 무작정 손을 들었다. '도보여행'이라는 원칙을 깬 것이다.

차를 몇 대나 지나친 끝이었던가. 겨우 봉고 트럭을 얻어 탔다. 마침 선암사로 가는 차를 잡았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운전석 옆엔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짐칸에 타야 했다. 짐칸엔 무언지 모를 화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발밑이 물컹거리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뭘까.

조금 있으려니, 하얀 포대 속에서 핏물 같은 것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기겁을 하고 놀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차에서 내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짐칸에 실었던 것은 초파일에 선암사에 오는 대중들이 공양할 돼지고기였던 것이다.

1981년, 순천 선암사에서 겪었던 초파일

선암사엔 우리보다 먼저 어둠이 도착해 있었다.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에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아침에 일어나 막 세수를 하려는데 누가 불렀다. 늙은 중이 오늘 하루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 했다.

'남명'이라는 법명을 가진 이 스님은 붓글씨 잘 쓰기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었다. 그의 글씨를 받고자 전남·광주뿐 아니라 서울에서까지 손님이 찾아올 정도였다.

온종일 먹을 갈고 차를 끓이고, 손님들이 놓고 가는 사례비를 장부에 기재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틈틈이 공양간에 가서 스님의 '일용할 양식'인 곡차를 가져오기도 했다. 붓글씨 한 폭 쓰고 나면 곡차도 한 잔이었다. 글씨를 쓰려고 곡차를 마시는지 곡차를 마시려고 글씨 핑계를 대는지 알 수 없었다.

더는 손님들이 오지 않는 저녁 무렵. 스님과 단둘이만 남게 되자, 술이 얼큰해진 스님은 내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 의사였던 그는 서독으로 유학보낸 부인이 돌아오기를 10년이나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림이 덧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늦깎이로 입산하고 만다.

세수 일흔여섯 살. 그만큼 늙었어도 상처를 지우지 못했던 걸까. 자신을 배신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남명 스님은 늙은 거위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울음이 진정되고 나자, 이번엔 나를 대중이 앉아노는 만세루로 끌고 갔다. 함께 춤을 추자는 것이었다. 내가 끝끝내 거절하자, 그는 홀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춤 한 마당에 마치 서럽고 안타까운 생을 사위기라도 할 듯이.

곡차를 즐기는 스님. 계율을 의식하지 않는 무애행. 반면에 동양학에 대해 놀라울만치 박식한 스님. 남명 스님과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와 보낸 1981년 초파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인상 깊고 잊지 못할 석탄일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나  세월이 흘러간 재작년,  난 오마이뉴스에 '첫사랑, 아홉 그루의 영산홍으로 다시 피다'라는 제목으로 남명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기사가 나간 지 일년이 지난 작년 4월, 뜬금없이 '김태범'이란 분에게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쪽지가 날아왔다.

'남명스님과의 깊은 인연의 글 잘 읽었습니다. 남명스님께서는 8, 9년 전 울진 신계사에서 입적하셨습니다. 입적하시기 전에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목우사에서 스님의 상좌이신 철우(도선)스님과 계셨구요. 저도 거기서 남명스님 뵙고 글도 얻었습니다.

어제도 도선스님과 남명스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목우사에는 남명스님이 남기신 많은 글과 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5월 27일 남명스님 기일에는 목우사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몇번 쪽지를 주고받은 끝에 김태범이란 분과 통화했다. 그 분은 내게 "남명 스님은 좌탈입망(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 하셨어요" 라고 말했다.

남명 스님이 한낱 땡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게 마치 나 자신의 명예라도 되찾은 듯이 기뻤다. 목우사 철우 스님과도 통화했다. 이렇게 남명 스님의 존재가 잊히지 않고 있다는 건 그의 현생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언제가 기회가 오면 목우사에 가서 그가 이 세상에 떨구고 간 삶의 부스러기들을 돌아보고 올 참이다.

그 밤 선묘 낭자가 지은 '불전'에서 날을 세웠다

 초파일 전날 밤 꽃등을 켠 풍경.
초파일 전날 밤 꽃등을 켠 풍경. ⓒ 안병기

 불기 2548년(2004) 초파일 부석사 안양루.
불기 2548년(2004) 초파일 부석사 안양루. ⓒ 안병기

지금쯤 부석사로 올라가는 길옆 사과밭의 사과꽃은 다 졌을 것이다. 왜 사과나무 하얀 꽃은 석탄일이 올 때까지 진득하게 피어 있지 못하는가. 왜 좀 더 머물러 있어 꽃과 향기로 부석사를 장엄하지 못하고, 무엇이 바쁘다고 그렇게 빨리 떠나버리는가.

부석사는 내가 여러 번 다녀온 절집이다. 그냥 다녀온 게 아니라 며칠 묵기도 했던 곳이다. 부석사에는 여기저기 요사가 많다. 누구든지 새벽 3시 반에 열리는 예불에 참석한다는 조건만 수락하면 선뜻 방을 내주고 공양까지 준다. 그렇다고 해서 꼬박꼬박 출석 체크를 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다녀온 부석사지만 정작 내가 그 곳에서 초파일을 맞은 것은 불기 2548년(2004년) 딱 한 차례 뿐이다.

부석사에 도착한 것은 석탄일 전날 해거름녘이었다. 그 때까지 요사에 빈 방이 남아있을 리 만무하였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서 무량수전 바닥에다 좌복을 깔고 앉았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을 앉아 있으면서 무량수전의 이곳 저곳을 샅샅이 바라보았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가구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장난이 아니었다. 눈을 돌려서 정면을 바라보면 이번엔 당당한 체구의 아미타불이 내 마음을 압도했다.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의상 대사를 따라 이 곳까지 달려온 선묘 낭자도 오늘 밤 나와 같이 이 무량수전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저 아미타불은 의상 대사의 화신이 아닐까.

그러나 시방 내가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에 앉아있다는 생각조차 달려드는 추위를 어쩌지는 못했다. 자정이 넘어가자, 더 이상 추위를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부석사 여기저기를 서성거렸다. 안양루 누하에는 돗자리를 편 늙은 보살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이든 보살들은 춥지도 않은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꼿꼿이 앉아서 줄창 "석가모니불"을 외고 있었다. 난 그 때 처음 알았다. 내가 추위를 참지 못하는 것은 체질 탓이 아니라 신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아침 여섯 시. 공양을 마치자마자 일찌감치 부석사를 떠났다. 초파일을 맞은 부석사의 표정을 재빨리 기사화하고픈 생각이 나를 서두르게 한 것이다.

부석사를 내려오다가 잠시 당간지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들어있는 정호승의 시 '그리운 부석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마지)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 정호승 시 '그리운 부석사' 전문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부석사를 그리워할까. 부석사의 가람 배치가 절묘해서? 무량수전이 아름다워서? 그보다는 의상 대사에 대한 선묘의 가없는 사랑이 낳은 '뜬 돌'의 전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불전(佛殿)인 동시에 극락이다. 부석사에 가거든 무량수전 왼쪽에 있는 부석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곳에도 또 한 채의 무량수전이 있고, 또 한 분의 아미타불이 앉아 계실는지도 모르니.  

폐쇄의 명분과 개방의 실익 사이

 봉암사 입구 차량을 통제하는 스님. 내가 사진을 찍자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제 모델료는 비쌉니다"라고. 그래서 "제가 사진 찍어드리는 촬영료는 훨씬 더 비쌉니다."라고 되빋아쳤다.
봉암사 입구 차량을 통제하는 스님. 내가 사진을 찍자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제 모델료는 비쌉니다"라고. 그래서 "제가 사진 찍어드리는 촬영료는 훨씬 더 비쌉니다."라고 되빋아쳤다. ⓒ 안병기

 금색전 마당.
금색전 마당. ⓒ 안병기


불기 2549년(2005년) 석탄일엔 문경 봉암사를 찾아갔다.

문경 봉암사는 4월 초파일 하루밖에는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절집이다. 용맹정진 하는 선 수행 도량으로서의 상징성을 지키고자 함인지는 몰라도 난 진작부터 이 지나친 폐쇄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폐쇄에 갈음할 만큼 봉암사가 근래에 수행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대중에게 절집을 돌려주는 게 더욱 합당한 게 아닐까. 

그래도 봉암사는 언젠가 한 번쯤은 다녀오고 싶었던 곳이다. 어찌 됐건 그 유명한 봉암사 결사의 현장이 아니던가.

1947년 가을, "부처님 법대로 살자"라며 청담·성철·자운·보문·우봉 스님 등 20~30대 서슬푸른 납자들이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당시 불교 전반에 만연해 있던 일본식 불교의 해독을 털고 조선 불교의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뒤미처 향곡·월산·혜안·법전·성수·법웅·보안·보경·지관 스님 등 30여 스님이 뒤따름으로써 결사체는 바야흐로 힘을 받기 시작했다. 공동 생활을 위한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채택했다. 그 규약에 따라 소작료나 시주에 기대지 않고 하루 2시간 이상 직접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하고 탁발했다. 비단으로 만들던 가사도 삼베나 면으로 바꿨다.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기로 했으며 사사로운 잡담을 금했다.

봉암사 결사는 1950년 초에 이르러 공비들이 자주 출몰하자 장소를 경남 고성 문수암으로 옮겼다. 그 뒤로  6·25가 일어나고 대중들이 흩어지면서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그러나 '봉암사 결사'는 오랫동안 용맹정진하는 조계종의 수행 가풍을 상징하는 아이콘 구실을 해왔다.

 대웅보전 마당에 걸린 흰색 등.
대웅보전 마당에 걸린 흰색 등. ⓒ 안병기

 마애불이 있는 백운대 계곡.
마애불이 있는 백운대 계곡. ⓒ 안병기

도착하자, 시간이 벌써 정오였다.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어치우고 나서 지증대사·정진대사 부도, 백운대 마애보살상 등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 곳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문화재가 아니었다. 봉암사 결사 당시의 치열함을 엿볼 수 있는 토굴 등이었다. 아니, 토굴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의 선원인 태고선원만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나 선원의 출입문인 '진공문'조차도 굳게 닫혀 있었다.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으로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버려라"고 쓰인 주련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잠시 '백운대로 가서 탁족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떠올리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해서 금색전 경비를 서던 젊은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일반인에게 일년에 한 차례밖에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봉암사 스님들의 수행이 성과를 내고 있는가. 그 수행의 성과가  대중에게 얼마나 유익을 끼쳤는가. "그렇지 않다면 대중에게 출입을 허락하는 게 오히려 부처님께 공덕을 쌓게 하는 일이 아니냐?"라고 따지듯 묻기도 했다. 개방과 폐쇄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실익이 큰 지를 따지지 않은 채 무턱대고 개방을 허락치 않는다면 그건 스님들의 오만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내일이면 다시 초파일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문경 봉암사는 또 대중에게 선심이라도 쓰듯 문을 열 것이다. 그러면 호기심 가득한  대중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주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것이고.

세상의 모든 관행은 반드시 중간 점검을 해봐야 한다. 계속돼도 좋은지, 아니면 이쯤에서 사슬을 끊어야 하는지. 의미 없는 관행은  더 이상 계속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속세의 일도 그렇지만 불문(佛門) 안의 일이라고 해서 예외가 있을 수 있을까.

초파일 봉암사로 가는 길은 십리도 넘게 빼곡히 차들이 주차돼 있다. 사람들은 불국토를 맛보려고 들어가지만 되돌아 나올 때 겪게 되는 건 교통지옥이다. 그래도 한 번은 봉암사의 석탄일에 가보길 권하고 싶다. 선종 사찰의 상징인 하얀 등이 이루는 장관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장관이다. 그리고 지증대가부도에 새겨진 비천상과 공양상을 눈여겨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교통지옥이라는 댓가를 치르고도 남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선암사 #부석사 #봉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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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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