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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 입구의 세진정. 세상에 있던 마음 속 번뇌와 티끌을 맑은 계곡 물에서 모든 더러움을 닦고 깨끗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동학사 입구의 세진정. 세상에 있던 마음 속 번뇌와 티끌을 맑은 계곡 물에서 모든 더러움을 닦고 깨끗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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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곳에서의 '숨은그림 찾기"

해마다 석탄일이 되면 고민거리가 하나 더 는다. '올해는 어느 절로 가서 석탄일을 맞을까?'라는 것이 그것이다. 석가께서는 고통의 바다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못난 중생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이 오신 것 때문에 중생들의 고민거리가 더 늘어날 거라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으리라.

수십 채 망상의 집을 짓고 부순 끝에 올해는 그냥 가까운 동학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동학사는 '금남의 집'이다. 아니, 남녀를 부문하고 세속의 사람들에겐 출입이 금지된 '청정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 동학사를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아직도 거기 가보지 못한 곳이 남아 있다. 출입금지가 해제되는 석탄일은 그런 금단의 구역에 다가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니던가.

오전 9시, 아직 이른 시각이건만 동학사로 가는 길은 인파로 넘쳐난다. 계곡엔 벌써 녹음이 짙푸르다. 목련이 필 적에 여기 왔다 갔건만…. 이윽고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세진정이란 정자에 닿는다, 세진정이란 사바 세계에서 가져온 마음 속 번뇌와 티끌을 이 맑은 계곡물에 다 씻고 나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세진정을 지나자 동계사와 삼은각, 숙모전이 길손을 맞는다. 동계사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며, 삼은각은 고려말 이성계에 저항하다 죽은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의 넋을 위로하려고 초혼제를 지냈던 단에 세운 사당이다. 숙모전 역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원통하게 희생된 단종과 사육신 등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그러나 이 세 집은 언제나 문전박대를 일삼는다. 자신의 문앞까지만 나그네의 발길을 허용할 뿐이다.

'동학사'라는 현판이 걸린 육화요.
 '동학사'라는 현판이 걸린 육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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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범조루 뒤편에 있는 육화당으로 들어선다.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결합한 'ㄱ'자 형 건물이다. 1968년에 지은 이 건물은 내 눈과 가장 친숙한 건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봤으니 삼십 년 지기도 더 되는 셈이다.

육화당은 현재 대중 스님들이 발우공양을 하고 경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육화(六和)란 불교 교단의 화합을 위해 설정한 '신(身)·구(口)·의(意)·견(見)·계(戒)·리(利)'의 여섯 가지 규범을 말한다. 몸을 같이하면 동체가 되고 뜻을 같이하면 동지가 된다는 등 여섯 가지 규범은 절집 생활에서 생길 수 있는 불화나 분열을 막으려는 방편이다.

육화당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작고 앙증맞은 건물이 한 채 있다. 현재 주지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염화실이다. 예로부터 경봉·호경 스님 등 강백들의 처소였다고 한다.

법요식이 여리고 있는 대웅전 앞마당.
 법요식이 여리고 있는 대웅전 앞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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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중심인 대웅전으로 간다. 1980년에 지은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에 단 분합문에는 매란국죽 4군자의 문양이 아름답게 조각돼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를 주존불로 모시고 우측에 아미타여래 좌측에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대웅전 마당엔 벌써 봉축식에 참여할 대중들이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초파일 대중을 수용하기엔 마당이 너무 비좁아 보인다. 동학사가 가진 애로사항이라면 터가 넉넉하지 못해 전각들을 한곳에 모아두지 못한 채 동에서 서로 길게 배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문득 대웅전 왼쪽 배롱나무 아래에서 수행자 냄새 아닌 인간의 냄새를 맡는다. 두어 평 가량의 돗자리 위에 잔뜩 널린 취나물을 본 것. 재배한 것을 뜯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학인 승려들이 공부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 산에 올라가 뜯어온 것이리라. 수행자이기 이전에 아직 젊은 처자들이니 그런 낭만도 없지 않을 터.

1864년에 개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강원

서쪽에서 바라본 동학사. 중앙에 있는 건물이 대웅전이며 그 좌측에 삼성각과 그보다 큰 건물인 조사전을 배치했고 조사전 맞은 편에는 강사스님들의 연구실로 사용되는 동림당을 두고 있다.
 서쪽에서 바라본 동학사. 중앙에 있는 건물이 대웅전이며 그 좌측에 삼성각과 그보다 큰 건물인 조사전을 배치했고 조사전 맞은 편에는 강사스님들의 연구실로 사용되는 동림당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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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일곱 분의 조사를 모신 조사전. 좌측에 보이는 나무는 염주나무이다.
 역대 일곱 분의 조사를 모신 조사전. 좌측에 보이는 나무는 염주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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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왼쪽엔 삼성각이 있다. 평상시라면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려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객을 맞는 건 우측에 있는 조사전이다. 1985년에 지었다는 조사전 안에는 만화·금봉·경허·만우·경봉·호경 등 일곱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비구니 승가대학인 동학사에 웬 비구승들이신가?' 의아해할는지 모르겠다.

잘 알려졌다시피 동학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강원(승가대학)으로 유명한 도량이다. 그러나 동학사 창건은 서기 724년(신라 성덕왕 23) 상원조사로부터 비롯한다. 상원조사는 남매탑 전설로 잘 알려진 분이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강원이 개설된 것은 1864년의 일이다. 현대 우리나라 강원 중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곳 가운데 하나다. 처음 강주였던 만화 스님의 뒤를 이어 경허 스님이 강백의 자리에 앉자 전국에서 수많은 학인이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한다.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된 것은 1956년 2월의 일이다. 대현 스님께서 주지로 취임하면서 경봉 스님을 강주로 모시고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강원을 연 것이다. 이곳에선 매년 이 조사 스님들을 기리고자 매년 정초와 추석에 다례를 모신다고 한다. 평상시엔 사집반의 강의실로 사용한다고 한다.

오늘, 조사전 안에선 대중에게 나눠줄 점심 공양 준비를 하느라 보살들의 손길이 부산하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잘 모르겠다만, 저 일곱 분 조사가 오신 뜻은 알겠노라.

가장 서쪽에 있는 전각인 화경헌(좌)과 강설전(우). 멀리 계룡산 천황봉 근처 석문이 바라다 보인다.
 가장 서쪽에 있는 전각인 화경헌(좌)과 강설전(우). 멀리 계룡산 천황봉 근처 석문이 바라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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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전에서 서쪽을 향하면 높은 언덕에 두 채의 전각이 잇는 것을 볼 수 있다. 왼쪽 건물이 승가대학장이 계시는 화경헌이다. '위로 공경하고 아래로 화합하라'는 뜻에서 화경헌이라 지었다고 한다.

불법을 강설하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 강설전은 2층 목조건물이다. 처마 밑의 단청이 곱고 외방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1층은 도서관으로 이용되며 내과와 외과에 관련된 논문과 자료집 등을 열람하고 복사하거나 대출할 수 있다. 또 한글대장경과 신수대장경 및 고려대장경 등 모든 경전을 갖추고 있다 한다. 2층은 서예와 사군자 및 컴퓨터 특강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쓰인다.

화경헌 앞뜰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나무가 있다. 붉은 인동이 그것이다. 붉은 인동은 인동과의 반상록 덩굴식물이다. 붉은색 꽃이 무척 아름다운데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이상하다. 작년 석탄일엔 갑사와 대자암을 거쳐 이곳에 왔었다. 그때는 만개한 꽃을 보았다. 더구나 올해는 고온 현상이 계속됐지 않은가 말이다.

경허, 100년 전 이 땅에 왔던 부처

실상선원 입구의 편백나무 숲.
 실상선원 입구의 편백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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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스님이 깨침을 얻은 자리에 세운 실상선원.
 경허 스님이 깨침을 얻은 자리에 세운 실상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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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세운 실상선원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동학사 경내에서 가장 큰 나무인 염주나무 좌측엔 북쪽으로 가는 작은 길이 나 있다. 이 길이 실상선원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은 등산로가 아니라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니 출입을 금해 주시면 고맙겠다'라는 표지판이 한쪽으로 밀쳐져 있고 몇몇 사람들이 앞서 가고 있다.

조금 올라가자, 쭉쭉 뻗은 편백나무 숲이 나그네를 맞는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이다. 측백나무 숲 가운데로 난 길을 조금 들어가자 이내 실상선원이 장중한 자태를 드러낸다. 아, 이곳이 정녕 경허 스님이 견성했던 곳이란 말인가.

이곳은 경허 스님께서 견성오도하신 자리이기도 하지만, 1814년 (이조순조 14년)에 금봉 화상께서 실상암을 지었던 자리이기도 하다. 경허 스님이 토굴을 짓고 참선 삼매에 드셨던 당시에도 실상암이라 불렀기 때문에 선원의 이름도 그를 좇아 지은 것이다. 일체 존재의 참모습을 참구하는 장소라는 뜻에서 실상이다. 1989년 당시 주지였던 일초 스님이 복원을 시작하여 성원 스님이 완공한 건물이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라고 일컫는 경허 스님(1849 ∼ 1912). 전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9세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이곳 동학사와 서산 연암산 천장암에서 깨침을 얻은 뒤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수좌들을 지도했다. 이후 다시 천장암으로 돌아와 수월·혜월·만공 스님 등 뛰어난 선지식을 길러내신 뒤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을 거쳐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에서 잠시 머물고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 도하동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온갖 기행으로 얼룩진 경허 스님에 대한 글은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소설가 최인호가 쓴 네 권짜리 <길 없는 길>(1993.  샘터사)이 대표적이다.

1918년, 3권 2책으로 된 한국의 불교사인 <조선불교통사>를 기술한 역사학자이자 불교학자인 이능화(李能和)는 근대편에서 경허 스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경허화상이 변재(辯才)를 갖추었고, 그가 하는 설법이 비록  조사(祖師)들을 따르고는 있지만 지나치지는 않다"고 하지만, 호탕하여 삼가고 경계하는 것이 없으므로 사음·살생계를 범하는 데에까지 이르고서도 (그것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 (요즈음) 선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이를 따르고 있다. 심지어는 미치광이처럼 말을 하고 술을 마시며 고기를 먹기까지 하면서도 보리에 막힘이 없다. 도적질을 하고 음난한 행동을 하면서도 반야에 거리낌이 없다.

(그러면서) 이것을 일컬어 '대승선(大乘禪)'이라고들 하면서, 그 무행(無行)이 지나친 것을 가리고 꾸미기 위해 당당하게 이 모두가 옳다고 한다. 대개 이러한 잘못된 풍습은 실은 경허가 처음으로 잘못된 풍조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총림에서는 그런 까닭에 (그것을) 마설(魔說)이라고 한다. 내가 감히 경허 선사의 오처(悟處)와 견처(見處)를 알지는 못하지만, 만약 불경과 선자(禪書)들을 가지고 그 일을 논한다면 옳지않은 것 같다.

위의 글은 길 글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고기를 먹었다고 전하는 전제(顚濟) 화상과 현자 화상의 예까지 들어가며 호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능화의 비판이 그릇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쓰러져 가던 근대선맥을 다시 일으킨 경허 스님의 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1879년 11월15일, 동학사 강주로 있던 경허 스님은 절 아래 학봉리에 살던 이처사라는 분이 던진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한마디를 전해 듣고는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길고 긴 오도송을 읊었다. 아래 네 구절은 마지막 부분이다.

홀연히 들으니 사람이 말을 하되 콧구멍이 없다 하네(忽聞人語無鼻孔)
문득 깨치고 보니 삼천대천 세계가 다 내 집일세.(頓覺三千是吾家)
한여름 연암산 아래 길에서 (六月燕巖山下路)
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

실선선원 앞마당에선 천황봉과 그 옆에 있는 석문이 빤히 바라다 보인다. 어쩌면 오도송을 읊고 난 경허 스님은 환희심에 잠겨 마치 사자처럼 펄쩍펄쩍 뛰지 않았을까. 그런고 나서 마음이 진정되자, 저 천황봉과 석문을 우러러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가사를 벗어던진 채 덩싱덩실 춤이라도 추었는지 모른다. 모르긴 해도 경허 스님뿐 아니라 모든 선승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에 매달리는 건 그런 한순간의 환희를 위해일 것이다.

마치 경허 스님을 친견한 듯한 기분을 안고 길을 내려온다. 길을 거의 다 내려와 강설전 뒤편 산기슭에 있는 고추밭으로 올라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공양을 타려고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다.

불기 2552년 석탄일. 나이들수록 영혼이 더욱 배고파지는 나여. 저런 밥 줄이 아니라 영혼의 밥 한 그릇을 타려는 길고 긴 줄에 내 육신을 서 있게 하라. 

강설전 뒤편 산기슭에 있는 고추밭. '백장청규'를 실습하는 곳이다.
 강설전 뒤편 산기슭에 있는 고추밭. '백장청규'를 실습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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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암 건너편 계곡에 있는 부도밭. 여가저기 흩어져 있던 부도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길상암 건너편 계곡에 있는 부도밭. 여가저기 흩어져 있던 부도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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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계룡산 , #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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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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