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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대산리 마을 앞에 가면 옛 절터에 석불 3구가 있다
▲ 함안 대산리 목 잘린 석불 함안 대산리 마을 앞에 가면 옛 절터에 석불 3구가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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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불자들 대부분은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자신이 평소에 자주 다니던 절을 찾아 예배를 올리며 성인의 탄생을 기린다. 나그네도 어릴 때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어머니의 뒤를 따라 형형색색의 연등이 줄지어 매달린 불곡사(창원시 대방동)에 가서 맛난 절밥을 배 터지게 얻어먹으며 '우리 부처님! 우리 부처님!' 했다. 

그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나그네는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가까운 절을 찾았다. 하지만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절에 가지 않고 경남 함안의 고즈넉한 마을에 갔다. 그 마을 한가운데 오래 묵은 느티나무 아래 목이 잘린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불의 못다 한 사연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목 잘린 석불은 경주 남산과 경주박물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경남 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나그네 또한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들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하지만 경남 지역에서 목이 잘린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석불의 모습은 이곳 함안 대산리에서 처음 보았다.

목 잘린 석불에 대한 설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숭유억불(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누름)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유생들이 석불의 목을 부러뜨려 계곡이나 우물 속에 버렸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임진왜란)하면서, 조선의 기를 꺾기 위해 석불의 머리를 잘라버렸다는 설이다.

이 두 가지 설이 맞든 틀리든,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석불의 목을 잘랐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누군가 몹시 얄밉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이는 힘이 좀 세다고, 국력이 좀 세다고, 자기 나라 사람들은 먹지 않는 미친 소를 몽땅 우리나라에 팔아먹겠다는 미국 정부의 못된 심보와 무에 다르겠는가. 

석불군 곁에 마늘밭이 있다
▲ 갓 수확한 마늘 석불군 곁에 마늘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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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석불의 목은 누가 잘랐을까
▲ 함안 대산리 석불 저 석불의 목은 누가 잘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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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잘린 석불 뵈러 가는 길에서의 심상

함안 대산리로 가는 길목 곳곳에도 하얀 아까시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향긋한 내음을 짙게 흩뿌리고 있다. 잠시 다가가서 한 송이 따먹고 싶다. 나그네가 어릴 때에는 저 아까시꽃을 따서 간식처럼 먹곤 했다. 하지만 아까시꽃은 향긋한 내음에 비해 막상 따먹으면 약간 비릿했다. 때문에 아까시꽃을 많이 먹고 속이 메스꺼워 마구 토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초록빛 이끼가 작은 호수를 온통 뒤덮고 있는 이수정을 뒤로 하고, 대산리 마을 쪽으로 들어선다. 아직은 초록빛을 더 많이 띤 채 누릇누릇 익어가는 보리밭을 바라보며 마을 안으로 200m쯤 더 들어가자 저만치 마을 한가운데 오래 묵은 정자나무가 연초록 잎사귀를 파르르 떨며 나그네를 반긴다.

이 느티나무에 담긴 사연도 깊다. 느티나무 아래 서 있는 작은 표지석에는 "여기 절터에 심어졌던 느티나무는 천수를 누리다가 가고 그 자리에 이 마을 출신 고동원, 조용수 두 어른께서 어린 느티나무를 심어 이렇게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그 마음을 기려 돌에 새긴다. 앞으로도 사나운 비바람에 꿋꿋이 잘 자라거라"라고 씌어져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71호로 지정된 함안 대산리 석불 3구(경남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 1139)는 그 느티나무 아래 있다. 이곳 주민들이 이 마을에 큰 절이 있었다는 뜻으로 '대사리(大寺里)' 혹은 '한절골'로 부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곳이 어느 큰 사찰의 절터였다는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협시불
▲ 좌 협시불 협시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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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시불
▲ 우 협시불 협시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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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 마을 앞 논과 밭에서 가끔 기왓장이 나와예"

"요새도 마을 앞 논과 밭에서 가끔 기왓장이 나와예."
"근데 저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석불의 목은 언제부터 없었습니까?"
"그건 잘 모르지예. 마을 어르신들 말로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이 저 석불의 목을 잘라가꼬 어디론가 들고 갔다고 했어예."

색색의 연등이 예쁘게 매달린 대산리 석불 3구 곁 밭에서 마늘을 수확하고 있는 50대 남짓한 아낙네. 그 아낙네의 말에 식민의 슬픈 역사가 다시 되살아나는 듯하다. 갑자기 입맛이 씁쓸해진다. 향과 초라도 가지고 왔더라면 이 목 잘린 석불의 뼈아픈 시련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을 텐데. 

이곳 대산리 석불은 모두 3구다. 목이 잘린 석불은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며, 그 좌우에 협시보살로 보이는 2구의 석불이 우뚝 서 있다. 특히 서 있는 2구의 보살은 손모양만 조금 다를 뿐 전체 모습은 쌍둥이에 가깝다. 두 석불의 머리에는 두건을 닮은 높은 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길쭉하다.

두 석불의 눈과 코, 입은 평평한 편이다. 두 석불이 걸치고 있는 두껍고 무거운 느낌이 드는 옷은 일반 석불의 어깨에서 비스듬히 아래로 흘러내린 옷과는 달리 우리나라 고유의 한복인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어깨의 매듭과 양 무릎에서 시작된 타원형의 옷주름이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시대 지역화 된 석불들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부처님 발가락은 어떻게 생겼을까
▲ 협시불 발 모양 부처님 발가락은 어떻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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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목을 자른 자들은 제 명을 채웠을까
▲ 목 잘린 석불 부처님 목을 자른 자들은 제 명을 채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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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그늘 아래에서는 그 어떤 소중한 것들도 다 망가진다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는 두 석불의 대좌(臺座)는 상대와 하대로 나누어지는 2단으로 되어 있다. 윗단 아래 8각의 단에는 각 면마다 귀꽃(석등이나 돌탑 따위의 귀마루 끝에 새긴 꽃 모양)을 새겨놓았다. 이 같은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불상 양식이 고려 초기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 있는 두 협시보살 사이, 약간 뒤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석불이 머리가 없는 석불이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이 석불은 온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나 등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와 석질, 조각기법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불상"이라고 적혀 있다.

목이 잘린 석불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좌대는 8각이다. 하지만 8각에 붙어 있는 돌의 크기와 모습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게다가 목이 잘린 석불의 손과 발 모습도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언뜻 바라보면 누군가 이 석불의 목을 부러뜨릴 때 손과 발 모습까지 억지로 깨뜨려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체 저 석불의 목은 어디로 갔을까. 저 석불의 목을 부러뜨린 이와 저 석불의 목을 부러뜨리게 지시한 사람들, 그 나쁜 사람들은 과연 제 명을 다 채우고 갔을까. 목이 잘린 석불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나그네의 목까지 선들하다. 식민의 슬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우리의 초라한 문화유산.

협시불의 등에도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다
▲ 협시불의 뒷모습 협시불의 등에도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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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 외세의 그늘 아래서는 우리의 그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도 모두 제멋대로 망가진다는 것을. '부처님 오신 날' 목 잘린 석불을 바라보면서, 미국산 '미친 소 오신 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목숨이 잘려나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그네 혼자만의 지나친 망상일까.

덧붙이는 글 | ☞가는 길/ 서울-마산-내서읍-함안군청 4거리 우회전-79번 국도-괴항마을-이수정 20m-대사골-대산리 석불



태그:#함안 대산리 석불군 , #목 잘린 부처님, #협시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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