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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80년 5월 이후 지금까지 3년에 두 번꼴로 민주 영령들이 잠든 망월동 5·18 국립묘지를 참배했습니다. 작년에도 다녀왔는데요, 올해는 못 갈 것 같아 안타깝네요. 해서 작년에 다녀온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까 합니다.

 

 

1981년 5월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구 묘역을 참배한 이후 아내와 함께 참배를 하기도 했고, 모임에서 단체로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부산에 사는 친구가 제의를 해와 양산에 사는 친구와 함께 셋이서 다녀왔습니다.

 

부산 친구는 환갑을 넘겼고, 저와 양산 친구는 육순을 바라보고 있으니 '경상도 노틀(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들의 망월동 참배'라고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닐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광에 사는 후배가 법성포에서 조기 정식도 맛보고 다음날 안내를 하겠으니 하루 앞당겨오라고 하더군요. 해서, "얼씨구나!" 하고 1박2일로 다녀왔지요. 

 

저는 2002년 3월부터 부산에서 살고 있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경상도 친구의 제의로 경상도 친구들과 망월동을 참배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다르더군요.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청잣빛 하늘이 더욱 싱그럽게 다가왔습니다. 

 

영광 친구의 과분한 환대

 

 

이런저런 일들을 회상하다 보니 어느덧 버스가 광주에 도착했는데, 영광읍 버스터미널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후배가 광주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광주에 도착한 경상도 노틀들은 마중을 나온 두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법성포로 향했습니다. 법성포에 도착하니까 비린내가 제일 먼저 반겨주더라고요. 역겹기는커녕 선창가가 고향인 저에게는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도시의 고급 한정식집 못잖은 식당에서 백세주에 조기 정식으로 배를 채웠는데, 병어찜, 갈치튀김, 게장 등으로 포식했습니다. 이튿날 집에 돌아와서도 법성포 식당 반찬들이 눈에 아른거려 3일 만에야 겨우 입맛을 되찾았으니까요. 

 

2차는 코를 쏘는 홍어에 막걸리였는데 배가 너무 불러 서비스로 나온 김치 전도 먹지 못하고 모텔로 돌아와 이야기꽃을 피우다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과음하지 않아서인지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도 속이 편하고 상쾌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은 영광읍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마을 영양탕 전문식당에서 먹었습니다. 시원한 등나무 그늘 평상에서 얼큰하고 시원한 탕을 어찌나 잘 먹었는지 그때의 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산을 끼고 도는 바다 풍경이 그만이라는 영광 해변도로를 드라이브하자는 의견에 "영령들을 참배하기 전 유흥을 즐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라는 양산 친구의 일침에 곧바로 광주로 향했습니다.

 

5년 전 광주천변의 식당 아주머니

 

 

저는 해마다 5월 17일이면 광주천변의 작은 한식당에서 만난 60대 중반의 아주머니를 떠올리곤 합니다.

 

2003년 5월 17일 망월동을 참배하려고 아내와 광주에 갔는데, 도착하니까 배가 출출해서 광주천변의 작은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때가 아니어서인지 60대와 7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이 담소를 나누며 한가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시원한 식당 마루에 앉아 백반과 김치찌개를 주문했습니다. 아주머니들과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망월동을 참배하려고 부산에서 왔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4천 원짜리 백반을 시켰는데, 찬 종류가 많고 맛도 좋았습니다. 특히 담백한 맛의 배추 나물과 고소한 콩나물 무침이 돌아가신 어머니 손맛을 생각나게 하더라고요. 상을 차려준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곱상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다가왔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대화는 끊어지지 않았고, 80년 5월의 광주 얘기가 화제가 됐는데, 제 입에서 "23년 전 불쌍하게 돌아가신 분들"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딴에는 아픔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였는데, 알고 보니 실언이었더라고요. 해서 칠순이 다된 할머니에게 80년 광주의 비극에 대해 강의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니쥬, 불쌍헌 사람들도 아니고 불쌍허게 죽은 사람들도 아니쥬~, 그 사람들은 억울헌 사람들이고 억울허게 죽어간 사람들이쥬~, 옛날 솜이불 알쥬? 밖가트서 총소리가 들리는 날 서있으믄 총을 맞는다고 허니께, 우리 식구들은 솜이불을 둘러쓰고 부엌 아궁이 미티로 납작 엎드리고 있었쥬··· 그 때 생각허믄 징그라서··· 하이간 불쌍헌게 아니고 존 세상 구경도 못 허고 죽은 억울헌 사람들이쥬··하이고 징그라···."

 

아주머니의 설명은 충청도 말씨가 섞여 느릿했고, 당시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아주머니가 "하이고 징그라···"라며 내쉬는 긴 한숨은 1981년 처음 망월동을 방문했을 때 묘역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넋 나간 양반처럼 담배만 피우시던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아주머니 말씀이 맞네요. 제가 잠시 흥분해서 말실수를 했습니다. 그 양반들은 억울하게 생죽음을 당한 분들이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신 분이구요"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밥상강의를 마쳤습니다.

 

경상도 노틀들의 망월동 참배

 

망월동에 도착하니 점심 때라서 그런지 한가하더군요. 경상도 노틀들은 분향을 마치고 영령들이 잠든 묘소를 둘러보았습니다. 

 

영혼 결혼식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탄생시킨 윤상원, 박기순님 부부의 묘비.

 

80년 당시 여고생 신분으로 시체를 정리하다 관이 모자라 관을 구하러 가다 주남마을에서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박현숙님의 묘비.

 

장애인임에도 계엄군의 폭행으로 광주학살의 최초 희생자가 된 김경철님의 묘비에 "아빠! 늘 어디서든 저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은 있지만, 가슴 저미게 뵙고 싶을 때가 많아요. 단 한 번이라도 아빠 얼굴 보고 아빠를 불러보고 싶은 이 소망 아실런지"라고 새겨진 딸의 편지를 보며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묘역을 둘러보는데 10~20명씩 그룹을 지은 남녀 대학생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리더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부산 동아대 학생들이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왔더라고요. 아버님 제삿날에 와준 손님처럼 어찌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또 그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내일의 희망도 보았습니다. 몸은 빈약해 보였지만 목소리는 힘찬 리더의 선창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데, 노틀들도 옆에서 따라 불렀습니다. 

 

감격을 참지 못한 저는 2003년 5월17일 광주천변 식당 아주머니의 강의를 참고해서 인생후배인 학생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계엄군의 학살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대항한 민중항쟁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곳에 묻힌 영령들 대부분은 윤상원이나 이한열처럼 민주열사가 아닙니다. 그냥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를 빼앗긴 억울한 형제요 자매들이지요. 우리는 이분들의 억울함을 풀어 드려야 하는데 내일을 책임지고 있는 여러분이 앞장서야 합니다."

 

설명 도중 "그래요!"를 연발하는가 하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는데요. 진지하게 들어주는 학생들이 고마웠습니다. 

 

1년 전 망월동 참배는 많은 것을 배웠고, 의미도 있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해서도 그냥 헤어지기 서운하다며 딱 한 잔만 하자는 양산 친구의 제의로 양념 갈비에 소주를 한잔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지요. 

 

글을 마치려니까 무엇을 놓고 내린 사람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친구들의 아쉬워하던 모습이 그려지네요. 요즘은 어떻게들 지내시는지, 내일은 안부전화라도 드려야겠습니다. 

 

80년 5월 금남로와 충장로의 아스팔트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꽃잎처럼 쓰러져간 넋들을 기리면서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필통(http://blog.hani.co.kr/chongani/)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망월동#5·18 국립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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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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