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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며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 김 훈의 소설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며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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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즉부터 남한산성에 와 보려는 요량이었다. 늦었지만, 이 초록 만발한 봄이 서둘러 여름으로 넘어가버리기 전에 나는 꼭 한 번 광주산맥 줄기 해발 490m에 자리한 남한산성에 오고 싶었다.

예로부터 한양(서울)의 외곽을 방어하는 사방의 요새로 일컬어진 네 곳이 있다. 그러니까 동으로는 바로 이 곳 남한산성이 있는 광주요, 서로는 강화도, 남으로는 수원, 북으로는 개성이다. 아마도 적들은 호시탐탐 이들 요새를 넘보고 훔쳐보며 노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남한산성 산성로를 따라 자동차는 기운을 쓰며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5월의 신록을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이 몰고 온 로봇 달구지들이 너나없이 뒤꽁무니에 줄을 서 바짝 내 뒤를 따르며 서두름을 독촉한다.

구불구불한 산성로를 따라 오르는 도로 길가 옆에는 봄눈처럼 하얗게 피어난 아까시 꽃이 군데군데 풍성하게 무리를 지어 진하고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보시오, 산으로, 산으로 어서들 오시오!"

나는 '만차' 팻말이 놓여지기 바로 직전 로터리 주차장으로 간신히 들어가 차를 세우고서 주위 사방을 빙 둘러 보았다. 이곳저곳 시선을 옮길 때마다 숱하게 보이는 가든, 주점, 음식점, 가게들이 시쳇말로 너저분하게 즐비하다.

남한산성의 북문으로 오르는 언덕
▲ 남한산성의 북문 남한산성의 북문으로 오르는 언덕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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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으로 향해서 걸어 오르는 길가 곳곳에는 제법 여러 그루의 키 큰 층층나무가 그야말로 층층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올라 북문에 도착했다. 성벽의 하단을 받치고 선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커다란 자연석의 막쌓기와 그 위에 얹혀진 비교적 다듬어진 윗돌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어울려 보인다.

자연석으로 막쌓기 한 후 조금 다듬은 작은 돌로 얹어쌓은 성벽
▲ 성벽 자연석으로 막쌓기 한 후 조금 다듬은 작은 돌로 얹어쌓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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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며 병자호란의 몽환에 빠져 마음을 서성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소설 속에 그려진 1636년 1월의 혹한, 좌절, 슬픔, 치욕을 기억하고 있다.

쓰라린 추위와 굶주림, 포위와 고립, 그 속에서 펼쳐진 이판 최명길과 예판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현실론(주화파)과 명분론(척화파)의 첨예한 대립과 칼날 같은 논쟁을 기억하고 있다. 결론적으로는 대상이 달랐을 뿐 사대주의적인 인식에 얽매였던 두 갈래의 견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북문의 성곽 능선을 따라 급하지 않은 마음으로 쉬엄쉬엄 걸어 올랐다. 주위에 무성한  붉은 소나무들의 고요함을 바라보니 한량없이 상쾌하다. 나는 '북장대지'를 지나 평탄한 능선을 걷고, 비교적 경사가 가파르다는 남한산성에서 아주 높은 곳 '연주봉 옹성'에 도착했다. 옹성의 계단 위에 올라 사방을 조망해보니 뿌연 하늘이 온통 스모그로 뒤덮여 성남(분당)과 수원쪽, 광주와 송파 등이 흐릿하게 보일락 말락 시야에 들어온다.

망루 겸 봉수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설
▲ 연주봉 옹성의 망루 망루 겸 봉수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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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자기 망루와 봉수대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연주봉 옹성 망루에서 멀리 송파나루에 진을 치고 있던 청나라 대군을 주시하며 두려움과 추위에 떨었을 외소한 조선의 군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혼자 독백했다.

'힘없는 백성에게 나라(국가)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임금(군주)은 백성에게 어떤 존재인가? 또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인조 14년(1636) 만주족, 몽고족, 한족으로 이루어진 10만의 청나라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진하여 조선을 침공해 왔다. 헛것이나 다름없던 조선 변방의 봉수대는 이 사실을 무려 열이틀이 지난 13일에 이르러서야 조정에 알리게 되었고, 이것은 병자호란의 결정적인 비극적 요인이 되었다.

허술한 변방 군영의 어이없는 실책으로 인해 강화도로 피난하려던 왕의 행차가 늦어졌다. 그리하여 남한산성으로 선회한 인조와 신하들은 이로 인하여 씻지 못할 역사적 오명을 안게 된다. 청나라의 군사를 따돌리기 위해서는 강화도로 피난했어야 했는데, 그 시기를 놓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절망의 서막이었다. 

연주봉 옹성의 동쪽 뒷편을 보니 온통 산이다.
▲ 연주봉 옹성에서 아래를 보다. 연주봉 옹성의 동쪽 뒷편을 보니 온통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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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곽에 서서 솥단지처럼 둥글고 움푹한 지형을 하고 있는 오목한 산성촌을 내려다보았다. 아래로 보이는 곳은 요새는 요새이되 철저하게 고립된 요새,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빈틈없는, 요즘말로 보호 감호소였다.

연주봉 옹성을 내려와 다시 서문을 향해 걸었다. 서문의 성루 위에 올라 남쪽을 한 번 조망하니 역시나 뿌옇고 흐릿하다. 나는 성벽에 박혀 몇 백 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랜 세월 묵묵히 제 몫을 다하며 사람의 역사 속에 여전히 살고 있는 성벽의 돌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나에게 거칠지만 안쓰럽다는 느낌이 소스라치게 다가왔다.

45일간의 고립과 투쟁은 지독한 굶주림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싸우기 위해 견뎌야 했다. 싸우기 위해선 말이 필요했고, 말에게 먹일 마른 풀이 필요했다. 마른 풀이 떨어지자 산성촌 초가의 지붕은 뜯겨져 말에게 먹여졌고, 굶어 쓰러진 말은 식량이 떨어져 굶고 있던 신하와 군졸들의 고깃국으로 먹여졌다. 그 와중에서도 조정에서는 비굴하지만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항복과 살아도 죽은 것과 같다면 죽음으로 맞서야 한다는 논쟁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성벽 위 여장에 손을 짚고서 마침내 눈 내린 산과 들판을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러 가는 인조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몽환의 상상에 빠졌다. 순간 울컥한 분노와 치욕에 대한 절망이 가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릅을 꿇고서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로 항복의 예를 치뤘다.
▲ 삼전도의 굴욕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릅을 꿇고서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로 항복의 예를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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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서 송파나루 수항단까지 힘겹게 걸어가서 청 태종에게 무릅을 꿇고 '삼배구고두' -세 번 크게 절하고, 머리를 땅에 아홉 번 찧는 치욕적 항복의 예-를 감당했던 인조의 이마에 흐르던 유혈이 낭자한 슬픔의 피를 떠올려 보았다.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은 순식간에 피가 되어 흘렀고, 나는 흐르는 땀을 연신 옷소매와 손수건으로 닦았다.

서문을 지나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0일간 직접 장졸들을 지휘하기도 했다는 '수어장대'로 향했다. 2층의 누각으로 이루어진 '일장산'의 정상에 선 수어장대는 항복의 요새에 역사의 증거물로 남아 있었다. 영조는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온갖 고초를 겪은 것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무망루'라는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수어장대 옆 작은 건물 안에 걸려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직접 40일간 군사들을 지휘했다고 하는 수어장대
▲ 수어장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직접 40일간 군사들을 지휘했다고 하는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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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어장대를 내려와 그 옆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는 '청량대'를 둘러보았다. 산성축성 당시 남측 공사를 담당했던 '이회'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사당이었다.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모략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이회는 죽기 전에 '내가 죄가 없다면 죽는 순간 매가 한 마리 날아올 것이고,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게 죄가 있는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나는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결백을 위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회'의 사당이다.
▲ 청량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회'의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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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대를 지나서 나는 언덕을 요리조리 휘어 감으며 아래로 흐르는 산성의 숲길을 호젖하게 걸어 내려왔다. 나는 하산의 숲길에서 병자호란 당시 강화로 피난한 빈궁과 대군들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서 끝내 치욕의 굴복을 받아들이기로 한 인조의 절망과 조정 신하들의 대책 없는 어리석음과 무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길가 옆 나무 밑에 애기똥풀이 노오랗게 꽃을 피워 군락을 이룬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이름 모르게 흔하디흔한 무수한 들풀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파릇한 초록의 들풀(잡초)들을 바라보며 소설 속에 등장한 대장장이의 아들 '서날쇠'를 떠올려 보았다. 최악의 고립과 포위 속에서도 다가올 봄날(훗날)을 대비하기 위해 항아리에 똥과 오줌을 모아 거름을 만들었던, 결코 쓰러지지 않으며 죽지 않는 민초의 삶과 영원성을 상상해 보았다.

밟아도 밟아도 끝내 쓰러지지 않는 잡초 같은 민초들이 생각났다.
▲ 소나무 아래 애기똥풀 군락 밟아도 밟아도 끝내 쓰러지지 않는 잡초 같은 민초들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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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문인 '지화문'을 거쳐 다시 내가 처음 이 곳에 발을 내린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가 옆에는 정신 사나운 간판과 현수막, 음악소리가 가득했다. 산행객의 주린 배와 허기진 음주의 욕심을 자극하는 여전히 많은 가든, 주점, 식당들이 즐비했다. 나는 치욕과 항전의 역사가 서린 산성 안에서 놀자판, 먹자판으로 하루를 보내는 뭇 사람들의 행락을 바라보며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5월 17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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