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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임금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어린 임금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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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0일 거제 경남산업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김건선 선생님, 유치원에서 놀이 수학을 지도하는 조수미씨, 귀금속공예를 하는 이미영씨, 중학생 혜진이와 같이 단종의 흔적을 따라 강원도 영월로 여행을 떠났다.

아침 7시 20분께 마산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은 11시 40분께 청령포(강원도 기념물 제5호,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도착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여 마치 반도(半島) 같은 지형을 하고 있다. 동·남·북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여섯 개의 작은 봉을 이루고 있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육육봉의 층암절벽으로 가로막혀 나룻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도저히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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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약해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한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1452년에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 1년(1453) 10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년에 어린 임금은 결국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세조 2년(1456)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김질 등의 밀고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이 그렇게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이곳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어린 임금 단종의 눈물과 권력의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있는 청령포. 그 역사적 비극을 모른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곳이다. 그래서 권력의 비정함이 더욱더 슬프게 와 닿는 곳이다. 문득 금부도사 왕방연이 세조의 명에 따라 폐위된 어린 임금을 유배지인 청령포에 두고 돌아가는 길에 괴로운 심정을 읊었던 그의 시조가 떠올라 가슴 아픈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육지 속의 작은 섬인 듯 들어앉은 청령포를 향해 청령 1호라는 배를 탔다. 한꺼번에 50명 정도 탈 수 있는데 나들이 온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수심 3m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어린 임금이 세상과 단절된 두려움을 안은 채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었을 청령포는 배에  타자마자 이내 내리는 기분이 들 만큼 지척에 있었다.

관음송(觀音松)
 관음송(觀音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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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승정원 일지의 기록을 참고하여 기와집으로 재현해 놓은 단종어가(端宗御家)가 나온다. 그곳에는 영조 39년(1763)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글자를 새긴 비(碑)가 있어 단종이 기거했음을 말해 준다. 우리는 단종어가 안을 둘러본 뒤 소나무 숲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관음송(觀音松, 천연기념물 제349호)을 보러 갔다.

수령이 600여 년이고 나무 높이가 30m인 관음송(觀音松)은 땅위 1.6m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또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랐다. 단종이 둘로 갈라진 그 소나무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는데,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여 볼 '관(觀)' 자를,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해서 소리 '음(音)' 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노산대 가는 길
 노산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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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대에서 내려다본 서강(西江)의 풍경
 노산대에서 내려다본 서강(西江)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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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역사의 한 토막을 온몸으로 들려주는 듯한 관음송을 뒤로하고 우리는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돌을 주워 쌓았다는 망향탑을 거쳐 시름에 잠겨 자주 찾았다는 노산대로 올라갔다. 노산대에서 내려다본 서강(西江)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때 어린 임금은 애타는 그리움, 절절함, 막막함, 두려움과 분노 등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노산대에서 내려가는 길에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백성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워 둔 금표비(禁標碑)를 본 뒤 배를 타고 청령포에서 나왔다. 그리고 관풍헌 부근 식당에 들어가 점심으로 보리비빔밥, 칡국수와 감자전을 맛있게 먹었다.

관풍헌을 거쳐 단종의 얼이 살아 숨쉬는 장릉으로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관풍헌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관풍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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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풍헌(觀風軒,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은 조선 시대 영월 객사의 동헌(東軒)으로 지방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 건물이었다.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자 단종은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겨 와 있었다.  그런데 세조 3년(1457) 9월에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사되는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이 되고 결국 1457년 10월 24일 유시(오후 5〜7시)에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사약과 교살에 의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우리는 단종이 관풍헌에서 지낼 때 자주 올라갔다는 자규루(子規樓)를 찾았다. 본디 매죽루(梅竹樓)라 불리던 이 누각에서 단종은 자신의 처지를 두견새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빗대어 자규시(子規詩)를 지었다 한다. 그 시가 너무 처절해서 사람들이 슬퍼하여 누각 이름을 자규루로 바꾸게 되었다는 거다.

관풍헌은 현재 조계종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이용되고 있어 나는 적이 당황했다.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단종의 능인 장릉(사적 제196호,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서는 단종의 얼이 살아 숨쉬는 듯한 느낌에 내 마음이 점차 편안해졌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무덤 장릉(莊陵)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무덤 장릉(莊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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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죽임을 당한 지 241년만인 1698년(숙종 24)이 되어서야 단종은 임금으로 복위되었다. 그래서 잔인한 권력의 비수로 무참히 희생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충절이 빛나는 곳이 장릉(莊陵)이다.

단종의 무덤인 장릉은 능의 양식이 간단하다.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石物) 또한 왜소하면서 간단한 편이다. 능 앞에 놓인 상석(床石) 좌우로 망주석(望柱石) 한 쌍이 있고 상석 아래로 사각지붕 모양의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그리고 장명등 양쪽으로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 한 쌍이 각각 서로 마주하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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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봉분을 사이에 두고 등지고 서 있는 양 모양의 석수(石獸) 한 쌍이 신기했다. 왜 그것은 서로 마주 보지 않는 걸까. 게다가 망주석의 모양이 괜스레 붓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 직후 세조가 폐지해 버린 집현전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까.

능침 언덕 아래에는 해마다 한식날에 지내는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98인, 환관군노위 28인, 여인위 6인을 합한 264인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은 배식단사(配食壇祠), 한식 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하는 영천(靈泉) 등을 볼 수 있다.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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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 정려각
 엄흥도 정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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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東江)에 던져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남몰래 묻은 영월 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 2년(1726)에 세워 둔 엄흥도 정려각 앞에 서서 나는 그의 용기에 감사했다. 그가 없었다면 단종의 피맺힌 한을 어떻게 풀어 줄 수 있었겠는가. 어린 임금의 피눈물을 보는 것 같은 청령포와 관풍헌과 달리 단종의 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장릉에서 나는 마음의 편안을 얻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경부,중부고속도로→신갈,호법 분기점(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제천 I.C(38번 국도)→청령포 I.C→청령포 좌회전(59번 국도)→청령포

* 경부,중부고속도로→신갈,호법 분기점(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제천 I.C(38번 국도) → 서영월 나들목 → 장릉 방향 우회전(59번 국도)→장릉

* 경부.중부고속도로→신갈.호법 분기점(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신림I.C(88번 국도)→주천(영월 방향)→북쌍 삼거리(좌회전)→영월 삼거리→장릉



태그:#어린임금의눈물, #청령포, #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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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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