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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새벽

좁혀드는 총칼의 숲에 밀리다가

차가운 꽃 한 송이로 스러진

용사여 젊음이여

너를 여기둔 채 외치는 그 어떤 역사도

역사 아니다

 

- 이시영, '무명용사의 무덤 곁에서' 中

 

광주의 5월은 한 움큼의 울컥임을 치올리는 힘이 있다. 80년 광주에서 자행된 무자비한 만행과 그에 맞선 처절한 싸움은 지난 20여 년 동안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다. 올해로 5·18 행사에 참여한 것이 꼭 7년째. 지난해까지 5·18 전야제는 여러 공연팀과 증언자들이 무대에 올라 역사로서의 광주를 환기시키고 5·18의 현재적 의의를 조명해 주는 자리였다. 5·18 묘역을 참배하며 맘의 결기를 다독이고, 역사와 자신을 성찰하는 것 이상으로 전야제 행사가 주는 울림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는 일은 각별한 의미로 남아있다. 올해 다시 금남로에 서서 사전마당을 둘러볼 때까지만 해도 예년 행사들을 곱씹으며 기대감에 젖었던 이유다.

 

그런데, 올해 행사는 사뭇 달랐다. 공연은 최소화됐고, 심지어 출연한 공연팀에 대한 소개멘트조차도 생략되기 일쑤였다. 대신 전야제의 대부분은 시민들의 자유발언으로 채워졌다. 사회자는 줄곧 ‘쇠고기 멘트’를 놓지 않았다. 발언하는 시민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야제에 온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론, 무슨 일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분명 진행 중이다. 쇠고기협상의 문제는 이미 미국 고깃덩이를 얼마나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범위를 떠났다.

 

대통령 탄핵을 포털사이트에 발의한 ‘안단테’라는 고등학생이 사법처리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시민들 수천 명이 경찰청 홈페이지를 ‘습격’해 ‘나부터 잡아가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쇠고기 정국’이 가져온 놀라운 사건이다. 현재 지형은 ‘쇠고기 혁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경이롭다. 누구도 예상 못한 에너지가 넘실대는 지금의 공간은 누군가에겐 악몽이겠지만,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광주에서 전야제를 촛불집회 형식으로 치르게 된 것은. 먹거리 문제로 민심의 폭발이 임계점에 다다르기 직전인 지금의 상황이 5·18의 현재적 계승지점과 매우 적절하게 맞아떨어진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맞다. 우리의 삶을 우리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문제에서 볼 때 현재 촛불집회에 나서고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5·18의 후계자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단상에 올랐던 한 아주머니의 말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이 시대를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함께하는 것은, 사안의 급박성과 중요성을 생각하더라도, 뿌듯하고도 유쾌한 경험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행사를 주도한 이들은 너무 쉽게 대중의 분노와, 그로 인한 폭발적인 힘에 편승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한 대학생은 5·18을 되새기는 자리에 쇠고기 문제를 너무 전면화시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발언까지 했다. 그러나 사회자는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 한마디로 이 항변을 비껴나갔다. 되려 이후에 발언대에 오른 한 취업준비생이 앞의 발언자를 비판하며 부당한 일들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5·18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는 거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급기야 몇몇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이게 무슨 추모행사냐”며 자리를 뜨기도 했다. 물론, 행사 자체는 매우 생기발랄하게 진행됐다. 14살 중학생부터 대학생, 취업준비생, 부끄럼에 몸 둘 바 몰라하는 어른들까지. 발언대에 오른 이들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었고, 하나같이 폐부를 찔러대는 진솔한 감동이 묻어났다. 참가자들은 몸짓패의 율동을 삼삼오오 따라하거나 손피켓을 흔들기도 하며 전야제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 분위기만큼은 역시 명랑하고 참신하게 느껴졌다. 참가자들은 전야제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금남로에 남아 풍물패와 어울려 뜨거운 열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전야제만 두고 본다면 역사로서의 5·18을 현재의 정세와 엮어내는 과정이 비어있었다. 또 쇠고기 이외에 비정규직, 한미FTA, 한반도 대운하 등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짚어내는 키워드들에 대한 접근은 퍽이나 모자라 보였다. 분명, 각종 사전행사나 인쇄물에는 이 구호들이 담겨있었음에도 전야제 행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못했다. 내용은 갖춰졌으되 이를 시민들과 함께 나누려는 자세는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아쉽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태그:#5·18 , #5·18 전야제,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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