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중에 나는 봄 산을 좋아 한다. 잿빛이 남아있는 산 틈에 초록을 채우면 산 전체가 초록으로 다시 태어나서다.
찬바람에 얼어붙은 가지에서 다시는 이파리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따뜻한 봄 햇살의 정성에 나뭇가지는 연초록 이파리를 들어낸다. 산은 인간에게 인생을 두 번 가르쳐 준다. 한번은 사계절이 바뀌면서 눈으로 보여주고 다른 한번은 산에 들어 산을 오르내리면서 마음과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을 찾고 그 곳에서 삶의 힘을 충전한다.
지난주 토요일, 직원들과 장성군과 담양군에 걸쳐 있는 병풍산에 갔다. 병아리 솜털처럼 부드러운 이파리들이 벌써 진한 색으로 변해 가고 진달래꽃 뒷자리에 철쭉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다. 내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스께끼~ 아이스께끼가 있습니다."
40여 년 전 시골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산 중에서 들린 것이다.
"아이스께끼가 왔습니다" 대신 "아이스께끼가 있습니다"라고 표현만 다를 뿐 목소리나 높낮이가 똑같았다.
아직은 때 이르지만 감꽃이 떨어질 때부터 시골에서 아이스께끼 장사는 어린이들에게 최고 인기였다.
빈병, 헌 고무신, 양은 냄비 등으로 아이스께끼를 바꿔 먹었다. 빈병은 냄새가 나지 않아야 했다. 석유나 기름을 넣어 두었던 병은 받지 않았다. 지금처럼 세척제가 있었다면 감쪽같이 씻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것이 없어 아무리 깨끗이 씻어 와도 아이스께끼 장사는 금방 알아차리고 병을 받지 않았다. 고무신도 검정고무신은 받지 않고 하얀 고무신만 받았다. 아버지 몰래 흰 고무신을 가져다가 아이스께끼와 바꿔 먹고 혼쭐이 난 녀석들도 있었다.
나무상자 안에 들어 있는 얼음이 녹아 밖으로 흘러내리는 그 물을 만지려고 아이스께끼 장사 뒤를 따라 다녔던 기억, 한 번에 베어 먹지 못하고 빨아먹던 가난한 시절이 떠올랐다.
나무상자는 자전거의 크기에 맞춰 나무판자와 경첩, 못 등으로 짰으며 얼음을 넣어 아이스께끼가 녹지 않게 하였다. 지금은 동네 가게 등지에서 쉽게 빙과류를 살 수 있지만, 냉장고가 보편화되기 이전인 60, 70년대에는 아이스께끼를 이처럼 나무로 만든 통 안에 넣어 직접 운반하여 판매하였다
아이스께끼를 파는 상인이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갔다.
겉을 스티로폼으로 씌운 프라스틱 상자 안에 아이스께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제과점에서 500원에 살 수 있는 께끼였다. 1000원에 팔고 있는 아이스께끼는 어렸을 때 먹었던 아이스께끼는 아니다. 그때 아이스께끼는 감미료·향료·색소 등을 섞은 물을 동결관(凍結管)에 넣고 가운데에 가는 막대기를 꽂아서 얼린 냉과(冷菓)이다. 즉 얼음과자라고 할 수 있다.
맛이야 지금의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못했지만 그때는 정말 입술이 얼 정도로 실컷 먹고 싶었다.
병풍산 정상을 오르고 하산하는 길에 다시 아이스께끼 장사를 만났다.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아이스께끼를 많이 가져왔는데 안 팔리네요. 하나 더 드시고 가세요. 싸게 드릴게요."
40Kg이 넘는 아이스께끼 통을 짊어지고 700여 미터가 더 되는 산 중턱에서 아이스께끼를 팔고 있다. 그 주위에는 어린이도 빈병 흰 고무신도 없다. 산에서 만난 아이스께끼 장사, 나에게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산에서 먹어 볼 수 있게 해 고마웠지만 아이스께끼 만큼 마음 한 구석이 시리다.
여름날 아이들의 우상(?)이 힘없어 보여서 일까, 아니면 허겁지겁 사는 우리들의 현실을 산 속에서 라도 잊으려 했는데 그 자리에 서있는 나를 만나서였을까. 점점 초록이 짙어져 신록의 계절로 바뀌고 있다. 살기 힘든 우리들에게도 신록의 풋풋한 푸르름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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