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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계획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게 더 많습니다. 아이와 나선 길에서는 특히 더 그렇지요. 촘촘히 짜둔 데이트 계획도 쿠하의 졸음 앞에서 여지 없이 무너지고, 때로는 엄마의 호기심 때문에 빵빵했던 일정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듭니다.

서울시 정동은 역사적 건축물이 많고, 문화적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데이트 코스가 즐비합니다. 찜해둔 곳들이 너무 많아 아침 일찍 서둘러도 하루에 다 보기 힘듭니다. 금요일 오후, 쿠하와 함께 가려 했던 코스는 '덕수궁 산책 - 세실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로 점심 식사 - 서울시립미술관 부르델 전시 관람 - 정동제일교회 - 서대문 농업박물관까지' 걷기. 아이의 체력이나 인지 용량은 고려하지 않은, 루트만 야무진 일정은 출발 지점에서 끝나버렸습니다.

3년 넘게 자원활동을 하는 '우리궁궐지킴이' 류석정님을 만난 건 오후 2시.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 들고 산책이나 하려던 덕수궁에서 해설을 듣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대한문을 지나자마자 나오는 궁궐 해설 프로그램 간판 앞에 서면 자원봉사자나 덕수궁 직원들이 교대로 나옵니다.

아기와 함께라서 모든 것을 볼 수 없으니, 다른 궁에 없는 덕수궁만의 특별한 공간만 소개해 달라고 미리 부탁드렸습니다. 그러자 대뜸 덕혜옹주 이야기부터 꺼냅니다. 역사에 무지한 엄마가 덕혜옹주가 누군지 알 턱이 있나요.

임진왜란 때 선조가 낳은 아이인지, 고종황제가 환갑이 다 되어 얻은 늦둥이인지 전혀 감이 안 왔습니다. 한창 보수 중인 건물 펜스를 사진과 설명으로 기록해둔 노력이 가상합니다. 그 벽에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처럼 안스러운 인생을 살다 간 여자, 덕혜옹주를 만나게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맨 오른쪽 아이가 96년전 오늘(5월25일) 태어난 덕혜옹주 입니다.
 맨 오른쪽 아이가 96년전 오늘(5월25일) 태어난 덕혜옹주 입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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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96년 전 오늘 태어나셨군요) 할아버지 같은 고종황제의 늦둥이 딸로 태어났습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가 깰까봐 아기 옆에 누워있던 유모도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는 일화가 아니더라도, 옹주인데도 황제가 머무는 함녕전 앞에 두고 가까이에 살았다는 기록이 없어도, 궁 안에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어 줬다는 특혜를 받지 않았더라도 흰 수염이 길게 자란 아버지가 60갑자나 차이 나는 어린 딸을 얼마나 아꼈을런지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을 어디로 볼 것인가는 유아교육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소학교를 마친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억지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유학길에 오르는 아이의 표정이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36대 대마도 영주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을 합니다. 나라가 망하면 여자와 아이들이 제일 고통스러워진다는 사실을 덕혜옹주의 인생역정이 대변해 줍니다.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죽음과 침략국 일본에서 보낸 청소년기는 우울증 걸리기에 딱 좋은 환경이지요. 게다가 일본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정혜가 실종되어 의문사 한 뒤 정신을 놓아버린 덕혜옹주는 설상가상으로 이혼까지 당합니다.

짚신을 신고 살살 걸어도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침입자를 알 수 있는 예민한 황토 마당 궁궐에서 고임 받고 자라던 옹주. 그가 낯선 땅에서 당한 왕따와 이혼, 딸의 죽음 등 일련의 정신적 고통을 생각하니 딱하고 불쌍한 마음에 한숨마저 나옵니다. 덕혜옹주의 일생을 중심으로 고종황제 일가 이야기는 드라마 <이산>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집니다.

함녕전 복원공사 펜스에 장식된 사진들. 덕수궁의 옛 사진들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함녕전 복원공사 펜스에 장식된 사진들. 덕수궁의 옛 사진들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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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크레믈린'이란 별명이 딱 어울리는 러시아 대사관

대한제국의 암울한 역사가 곳곳에 스며있는 덕수궁. 이만큼 상처 입은 궁궐이 또 있을까요? 숯으로 은근히 방을 덮히는 아궁이에서는 절대로 불이 날 리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길이 솟구쳐 올라 삽시간에 오래된 목조 건물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방 데우는 데 숯을 사용했다는 설명을 듣자, 속으로 '망한 나라 임금이 너무 호화판으로 산 것 아니냐'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황족의 생활이야 어쨌든 오래된 목조 건축을 보호하는 조상의 지혜가 외세의 총칼 앞에서 허물어진 사진 속 궁궐은 퇴락한 왕조의 운명을 닮아 있었습니다. 현재 복원 중인 건축물들이 완성된다 해도 러시아, 미국 등 주변에 널린 외세의 흔적은 여전합니다.

미술관으로 쓰이는 석조전 서관 뒤로 통신 안테나를 탑재하고 있는 러시아대사관.
 미술관으로 쓰이는 석조전 서관 뒤로 통신 안테나를 탑재하고 있는 러시아대사관.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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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정동 크레믈린' 러시아 대사관은 '아관파천'의 부끄럽고 슬픈 과거를 기억나게 합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이 보낸 자객에게 당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가 피신했던 사건을 처음 배울 때,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지 비겁하게 도망가는 게 어딨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관파천 자리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몇 해 전 폐쇄적인 러시아 스타일의 대사관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류석정님의 설명으로는 지붕 위에 있는 안테나로 엄청난 양의 우리나라 정보를 취합한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궁궐지킴이 류석정 님의 해설로 그저 공원처럼 다니던 덕수궁에서 발길이 멈췄습니다.
 우리궁궐지킴이 류석정 님의 해설로 그저 공원처럼 다니던 덕수궁에서 발길이 멈췄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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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받아쓰기 하는 엄마, 포도주스에만 관심을 쏟는 쿠하.
 열심히 받아쓰기 하는 엄마, 포도주스에만 관심을 쏟는 쿠하.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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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처음 듣는 고종황제 가족의 구체적인 불행과 덕수궁이 견뎌낸 아픈 역사에 푹 빠져버립니다. 할아버지 선생님의 빠른 말투와 알아 듣기 힘든 단어들이 밀려드는 시간, 쿠하는 괴로운 표정입니다. 함께 간 이모를 졸라 겨우 포도주스를 얻어내더니 멀찌감치 떨어집니다.

쿠하처럼 어린 아이들에게 문화재 해설사나 숲 해설사의 긴 설명은 견디기 힘듭니다. 사실 관심 없는 어른들에게도 기관총처럼 따따따 쏟아지는 정보들은 그리 달갑지 않아 보입니다. 해설사로 봉사하기 위해 시험과 교육을 거쳐야 하고, 자비를 들여 활동하기도 하는데 정작 설명을 해 달라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아이를 배려하지 않고 엄마 마음대로 해서인지, 오늘 따라 유난히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발에 걸릴 것 없는 궁궐은 특별히 신경쓰지 않아도 위험할 물건이 없어 좋습니다. 뭔가 깨뜨리거나 꽃을 꺾을 일도 없습니다. 단지 문화재 보호를 위해 정해둔 출입제한 구역에만 가지 않으면 안심입니다.

집에 있으면 놀아달라고 엄마를 괴롭히지만, 밖에서는 혼자서도 잘 노는 쿠하.
 집에 있으면 놀아달라고 엄마를 괴롭히지만, 밖에서는 혼자서도 잘 노는 쿠하.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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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석조전 서관에서는 까르띠에 소장품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비싼 보석이라 그런가? 평소 보기 힘든 전시장 입구의 경비원들.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석조전 서관에서는 까르띠에 소장품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비싼 보석이라 그런가? 평소 보기 힘든 전시장 입구의 경비원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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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운영하는 미술관 두 곳에서 경쟁적으로 보석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예술의 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는 6월 8일까지 티파니 보석전을 합니다. 덕수궁미술관 까르띠에 소장품 전은 7월 13일까지 80일도 넘게 미술관을 차지할 예정입니다.

젊은 취향의 티파니 보석전에 비해 까르띠에 소장품 전에는 쿠하 할머니 연배의 관객도 꽤 많아 보입니다. 입장료가 1만 원으로 싸지도 않고 딱히 보석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과감히 패스~합니다.

목도 축일 겸, 다리도 좀 쉬어갈 겸 석조전 앞 분수대 근처에 앉아 있으려니 평일 오후 치고는 관객의 발걸음이 꽤 잦아서 전시품이 괜히 궁금해집니다. 값 나가는 보석 때문인지 일반적인 미술 전람회에서 보기 드문 까만 양복의 경호원들이 여럿 눈에 띄네요.

삼청동 부엉이박물관의 외벽.
 삼청동 부엉이박물관의 외벽.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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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세웠던 계획을 말끔히 포기하자 마음이 후련합니다. 쿠하는 <팥죽 할멈과 호랑이>를 자주 읽어준 탓인지, 먹고 싶은 걸 말하라면 주저없이 "팥죽!!"이라고 외칩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일그러진 데이트. 팥죽이나 먹으러 가자!'

시청 앞에서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삼청동 '서울에서 두 번째 잘하는 집'으로 향합니다. 버스 안내방송을 놓쳐서 한 정거장 더 간 김에 부엉이 박물관(www.owlmuseum.co.kr)에도 들릅니다.

실내가 어두워서인지 아이는 들어가기를 꺼립니다. 그래도 외벽에 그려진 부엉이가 좋았는지 "부엉이네~"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데…" 동요를 흥얼거립니다. 피곤한데도 발품 판 보람이 있어 다행입니다.

드디어 밤마다 그리던 팥죽을 먹다

한 그릇으로 둘이 먹던 호시절은 이제 안녕!
 한 그릇으로 둘이 먹던 호시절은 이제 안녕!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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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팥죽 한 그릇 먹는 데도 인내심이 필요한 가게지만, 금요일 늦은 오후에는 빈자리가 쉽게 납니다.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팥죽이 달달해서 맛있었는지 엄마가 한 숟가락 먹을 때, 쿠하는 서너 숟가락씩 훌훌 넘겨버립니다.

29개월 아기라고 제대로 1인분 취급 안하고 한 그릇으로 나눠먹었는데, '먹보 최쿠하'님께도 따로 한 그릇 시켜드려야 할 판입니다.

삼청동 거리는 특이한 가게가 많아서 망원렌즈까지 탑재한 카메라가 종종 눈에 띕니다. 아웃테리어가 예쁜 카페 앞에서는 쇼핑몰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고, 더러 쇼윈도 앞에서 사진을 찍지 말라는 가게 주인의 잔소리도 들립니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도 대학로나 홍대 입구처럼 시끌벅적 하지 않고, 대체로 조용한 것도 이 거리의 특징입니다. 아마 주변 간판이나 상인들의 분위기가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벌써부터 예쁘고 화려한 소품에 꽂힌 쿠하는 주현이 이모의 특이한 패션센스를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벌써부터 예쁘고 화려한 소품에 꽂힌 쿠하는 주현이 이모의 특이한 패션센스를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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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자가게 '꽁블'. 불어로 꼭대기, 절정에 있는 순간들을 의미하는 삼청동 총리공관 앞 '꽁블' 앞에 다다르자 쿠하와 주현이 이모는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열두 달 전, 햇빛을 가릴 요량으로 씌워둔 모자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창밖으로 벗어던졌을 정도로 모자를 싫어하는 쿠하가 '꽁블' 앞에서는 180도 돌변합니다. 할인 상품으로 가게 밖에 내놓은 모자들을 이것 저것 써보더니 결국 가게 안으로 스윽 들어갑니다.

말릴 겨를도 없이 들어간 두 사람, 제대로 진상을 떨고옵니다. 25만 원이 넘는 투명한 비닐 모자를 써보는 주현이 이모와 아기용 수제 모자를 기어이 써보겠다는 꼬마손님 때문에 주인장이 이리저리 분주합니다. 밖에서 보다 못해 서둘러 가자고 재촉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지요.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모자가게 '꽁블'에서 가게 앞에 둔 모자를 쿠하와 주현이 이모가 주인장 허락도 안 받고 써 봅니다.
 모자가게 '꽁블'에서 가게 앞에 둔 모자를 쿠하와 주현이 이모가 주인장 허락도 안 받고 써 봅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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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정리하다 알게 된 사실 하나. 쿠하는 학습효과 만점인 덕수궁 보다 지갑만 얇아지는 삼청동에서 더 즐거운 표정입니다. 아이의 취향이 엄마를 따라갈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초보 엄마의 착각일 뿐입니다.

쿠하는 립글로스조차 바르지 않는 엄마보다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이모님들에게 더 환호합니다. '꽁블' 앞에서 몇 년 후의 우리 모녀를 상상해 봅니다. 아침마다 예쁘게 꾸며주지 않는다고 엄마를 괴롭히는 공주풍 유치원생이 곧 나타나겠지요?


태그:#걷기, #쿠하, #덕수궁, #삼청동, #서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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