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 시간은 26일 새벽 1시입니다. 요령껏 잘 피한 것인지 운이 좋았던 것인지 저는 어쨌든 지금 집으로 왔습니다.

 

얼떨결에 오전 집회 사회자를 맡다

 

25일 오전, 경찰과의 격한 몸싸움을 거친 우리들은 다시 청계광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들 말이 아니었죠. 다친 분들도 많았고, 일단 밤새 격렬하게 움직였기에 피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자리를 떠나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늘어났습니다. 오후 5시경에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 운동본부'가 합류할 때까지, 청계광장에 자리잡은 200명 가량의 참가자들은 대략 1500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다들 지친데다가 오전에는 햇볕도 꽤 따가웠습니다. 그래서 축 처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집회를 진행할 주최도 없으니 사회자가 있을 리도 만무하죠. 희망에 따라 한 분 한 분 자유발언을 진행했습니다. 그 축 처진 상황을 지켜보면서 저도 뭔가 울컥한 것이 있었나 봅니다. 저도 모르게 자유발언을 하기 위해 대기하는 줄에 서 있었습니다.

 

자유발언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다소 같은 패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조금은 깊이 파고든 이야기를 시도했습니다. 먼저 <다음> 블로거뉴스 기자이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취재를 하다가 아예 합류를 결심했다고 말씀드리니, 시작부터 박수와 환호성으로 맞이해주시는 것이 무척이나 놀라웠습니다.

 

자유발언을 통해, 지난 1년간 이명박 대통령을 주시하면서 나름대로 얻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정보 그리고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 제가 그동안 추적한 정보를 쉽게 풀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듣던 분들이 무척 놀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저도 처음 알았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던 이야기들이었으니까.  

 

제 자유발언은 그래서 나름대로 많은 호응을 얻으면서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뿌듯하기도 했고 기뻤습니다. 뭔가 각오를 다질 계기가 필요하던 상황이었는데 제 이야기가 나름의 역활을 한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가 좀 묘했습니다. 상황에 대해 뭔가 궁금한 것이 생기신 분들이 저에게로 다가와 이것 저것 여쭤보시다가 어떻게 그리된 것인지 판단조차 잘 되지 않습니다만, 제가 어느덧 사회자가 돼 있더군요. '주최'가 없는 집회라는 점이 다들 불안하셨던 모양입니다. 사회자를 맡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는데 얼떨결에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사회자, '중압감'이 엄청났다

 

일단,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해보자니 일단 밤새 지치고 뙤약볕 아래에서 또다시 체력전을 벌이시는 참가자 분들의 안전까지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고민도 컸고 중압감도 엄청났습니다.

 

저, 20대 중반에 불과합니다. 참가자 분들의 태반이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여성과 노약자도 많았습니다. 대기중이었다고는 하나 경찰에 포위된 상황이었습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참가자 분들이 다양하게 저에게만 제보해주시는 정보 중에서 '경찰'에 관련된 정보가 가장 두려웠습니다. "경찰이 곤봉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거나 "경찰 고위관리가 직접 와서 상황을 관장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특히 그랬습니다. 

 

그런 정보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멋모르고 그런 정보를 참가자 분들께도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 치명적인 잘못이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섣부르게 불안감을 심어줄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그런 정보를 접하면 참가자 분들께는 밝히지 않고 혼자서 헐레벌떡 주변을 뛰어다니며 '사실 확인'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경찰도 지친 것인지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고 곤봉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지금의 집회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발언 위주의 집회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이 적당히 지루해질 즈음에 '양념' 노릇을 하자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그런 노릇을 하면서 가장 가슴이 벅찼을 때는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청계광장에서 여전히 집회가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누리꾼들이 모금을 통해 김밥이나 빵 같은 먹을 거리를 제공한 것에 저는 정말이지 눈물까지 찔끔 흘릴 뻔 했습니다.

 

다들 먹는 것이니 뭐니 이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밤새 집회에 참석하고도 여전히 집회가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분들이 손수 그렇게 정성을 모아 먹을 것을 전해준 것이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받은 '선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선물은 역시나 '광우병 쇠고기 반대 플래카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민망하기도 한데, 그걸 직접 들고 맨 앞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지치신 분들의 흥을 돋구려고 '쇼맨십'까지 발휘를 했으니, 저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렇게 호응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참가자 여러분 전체를 바라봐야만 하는 입장에서 제일 난처했던 순간은, 주변에 <동아일보> 취재차량이 나타났을 때였습니다. 분노가 폭발한 일부 참가자 분들이 번개처럼 뛰어들어가서 항의를 하셨고, 심지어 어떤 분은 차량을 주먹으로 치기까지 하셨습니다.

 

저도 당장에 뛰어가서 그분들을 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집회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오후가 돼서는 취재진들이 다시 나타나 참가자 여러분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지금 여기에 모인 분들은 대략 1500분 정도, 하지만 그 뒤에는 수백·수천만의 사람들이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왜곡 보도를 시도한다면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고 마무리를 했습니다.

 

나름대로 언론에 경고를 남길 필요성도 있었고, 그런 선언을 함으로써 참가자 분들의 막힌 속을 뚫어주고도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오후 5시, 마로니에 공원을 출발했다는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 운동본부'가 도착하면서 저는 무거운 짐을 덜어놨습니다. 엠프 하나, 확성기 하나에 의존해 언제 배터리가 떨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유발언을 진행하던 입장에서는 그들의 도착이 얼마나 눈물겹게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진행을 그들에게 넘기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했죠. "얼떨결에 사회를 맡아 부족한 점이 많았을텐데 그래도 잘 호응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그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심스럽게'라는 관점에서 진행을 한 탓이었는지,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더욱 늘어난 참가자로 인해 '행동'으로 나서게 돼서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삼보일배'가 청계광장을 지나던 순간, 일부 참가자분들이 그 뒤를 따르려다가 제지를 당한 것도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그렇게 거리로 뛰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부터야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청와대를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열심히 뛰었습니다. 24일부터 동고동락해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안면까지 트게 된 분들이 그렇게 뛰시는데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미가 엄청난 행동이었습니다. 시민의 분노를 직접 전하기 위한 움직임인 것입니다.

 

일부 언론이 이에 대해 '교통체증' 운운하고 있지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차 안에 계시던 분들이 더욱 응원해주시면서 환호성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드디어 전경이 나타나면서 많은 분들이 다치셨다는 점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자분들이 다치는 일은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에 이어진 촛불집회에서 전주에 거주하시는 시민이 분신을 시도해 중태라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면서 참았던 눈물은 다시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틀 동안 그렇게 참 많은 눈물을 흘린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 이후엔 저는 을지로 일대로 향하는 시위대에 합류해 다시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울시청에서 열렸다는 마무리 집회에도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집으로 향하는 막차 시간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아쉽게도 그곳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5일에는 기어이 '전경'이 나타났다는 점이 대단히 당혹스러웠습니다. 무지막지하더군요. 도대체, 촛불 하나에 의지한 여성·노약자를 방패로 찍어대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전경을 비롯한 일선 경찰의 탓을 하진 않겠습니다. 집회 참가자들도 그 어쩔 수 없는 입장은 다 이해합니다. 오히려, 동정까지 합니다.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다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것일 뿐일텐데.

 

'프레스 프렌들리'를 한다더니 그 '프렌들리'는 이명박 정부를 옹호하는 언론에만 해당되는 것인가 봅니다. 집회 참가자들은 '조중동'과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프렌들리'의 대상이 못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감히 '탄핵'이니 '하야'니 외치면서 반항을 해서?

 

'폭력집회'가 됐다고 개탄하는 언론들이 있던데, 촛불 들고 청와대를 향해 걸어가고 뛰어가는 것이 '폭력'입니까? 무조건 막는답시고 방패찍기니 살수차니 동원하는 경찰의 '폭력'이야말로 '폭력진압'입니다. 촛불과 방패, 촛불과 살수차, 누가 더 큰 폭력을 휘두른 것입니까?

 

틀어막는다고 숨죽일 민심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폭발합니다. 25일 집회에는, 24일 밤에서 25일 새벽까지 이어진 '살수차 진압'과 '과잉진압'을 보고 분노한 분들이 지방에서 상경해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경찰의 '진압'이야말로 '자극'이 될 것입니다. 우린 역사적으로도 그런 것을 보고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제가 낮 집회의 사회를 맡을 때, 자유발언을 기다리시는 백발의 할아버지와 잠깐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습니다. "날도 더운데 찾아오시느라 고생하셨고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니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나이 든 사람들의 잘못으로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면서 당신께서 4·19에 나선 것이 생각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말이죠.

 

이명박 정부와 경찰의 대처는, 그렇듯 오히려 지방과 세대의 차이를 허물고 연대의식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방패찍기와 살수차가 나선다면 그 촛불과 분노의 마음은 더욱 커져 이명박 정부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24일 저녁 7시부터 26일 자정까지 함께 움직이며 함께 분노했던 제가 느낀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촛불집회, #광우병 쇠고기, #이명박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