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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멀리서 닭 우는 소리, 사람들 발자욱 소리 그리고 쏟아지는 아침 햇살. 마치 어린 시절 시골 아침의 기억을 일깨우듯 그렇게 나리분지에서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본래는 5시에 일어나 새벽의 나리분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나가니 산마을식당 주인아주머니께서 인정스러운 어조로 잘 잤느냐고 물으신다. 주방을 들여다보니 벌써 분주하다. 산채정식을 주문하고 도시락도 두 개 싸달라고 부탁을 했다.

든든히 뱃속을 채우고, 도시락과 물을 챙겨 이제 성인봉을 향해 출발하려고 나서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간식으로 방금 찐 따끈따끈한 옥수수를 봉지에 담아주셨다. 순박하고도 푸근한 그 인정까지도 마음 속에 챙기며 성인봉을 향해 출발하였다.

산마을식당(왼쪽이 주인아주머니)
 산마을식당(왼쪽이 주인아주머니)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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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분지는 화산 폭발로 생긴 일종의 분화구로 울릉도에서는 유일한 평지이다. 분지 안에는 대략 40여 호가 살고 있는데 20여 호는 근처 공군부대의 관사에 사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원래 그곳 주민들이다.

산마을식당 주인아저씨는 할아버지 때 울릉도에 들어와서 지금 4대째 살고 계신다고 한다. 주민들은 주로 산에서 나물을 채취하거나, 꽤 넓은 밭에 부지깽이나물, 고비, 삼나물 등을 재배하여 생계를 유지하는데, 최근에는 산나물 수요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성인봉으로 가는 길가의 민가들에서는 마당에 한창 나물을 펴놓고 말리느라 분주해보였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으로 가는 길 초입의 2㎞ 정도는 평탄한 숲길이다. 너도밤나무, 고로쇠나무 등과 양치식물들이 쭉 펼쳐지고, 나무나 풀의 이름을 적은 팻말을 만들어놓았다.

한참 걷다보니 투막집이 나왔다. 통나무를 엇대 벽을 쌓고 그 사이에는 황토흙을 발라 마감하고, 지붕은 억새로 올리고 처마를 길게 만들어 바깥벽을 다시 만들었다. 이것이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배웠던 우데기인가보다. 양지바른 집터에 예쁘고 정감있게 지어진 투막집을 보니, 흙조차 보기 힘든 돌섬을 외롭게 개척하면서도 아름다운 심성을 잃지 않고 살아온 울릉도 사람을 보는 듯 했다.

투막집
 투막집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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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봉분지를 지나고 신령수에서 잠깐 쉬고 나니 계단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옆으로 명이나물, 취나물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육지 같으면 등산객들이 벌써 다 채취해 갔을 텐데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울릉도에서는 조금만 부지런하면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 같다.

계곡에는 아직도 덜 녹은 눈이 조금씩 남아 있다.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눈이 가장 많이 오는 다설지인데, 성인봉 계곡 같은 곳은 한겨울에는 거의 3m 가량 눈이 쌓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5월인데도 계곡은 아직도 덜 녹은 눈이 남아 있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더니, 성인수에 도착하니 성인봉 300m 푯말이 보인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을 내 올라가는데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드디어 성인봉이다. 야호!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 까마득하게 보이던 그 계단을 드디어 다 올라 온 것이다.  막상 성인봉 앞에 서니 시원한 바람이 귓가의 땀을 식혀주고 막힘없이 사방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이 올라오느라 힘들어 했던 것들을 일거에 날려버린다.

돌에 새긴 성인봉(聖人峰) 표지 앞에서 찰칵 한 컷 찍고, 바로 옆의 전망대로 갔다. 우리가 지나왔던 투막집, 알봉분지와 나리분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미륵산, 형제봉 등 여러 봉우리가 연이어 시원스럽게 쭉 펼쳐지면서 송곳봉 너머 멀리 바다까지 보였다. 지금도 멋있지만, 단풍들었을 때의 성인봉과 눈이 쌓였을 때의 성인봉의 모습은 황홀경일 것 같다.

성인봉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나리분지
 성인봉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나리분지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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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등대 쉼터에서 점심도시락을 먹고, 안평전 쪽으로 하산을 했다. 거리가 짧아 선택을 했는데 너덜길이 만만찮아 아내의 발가락이 꽤 고생을 했다. 안평전에 내려오니 산나물을 재배하는 밭들이 나타나고 이어서 평화롭고도 깨끗한 마을이 나타났다.

택시를 불러 타고 저동으로 와서 황제모텔에 짐을 풀었다. 택시비가 2만원이나 나왔다. 울릉도에서 택시비가 비싼 이유는 울릉도에는 L.P.G연료 택시가 없어서 그렇다고 택시 기사가 일러준다. 저동에 도착하니 4시가 넘었다.

저동항 촛대바위
 저동항 촛대바위
ⓒ 민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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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상으로는 해상일주를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늦어져 배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이럴 경우 해상일주 못지않은 최고의 대안이 있는데 바로 도동항을 중심으로한 좌우 해안산책로이다.

저동에서 행남등대를 거쳐 도동까지 가는 좌안산책로는 정말 아름답다. 푸르고 투명한 바다 옆으로 난 산책로와 아치 모양의 다리, 굽이굽이 펼쳐지는 해안의 곡선, 모험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기묘묘한 바위와 그것을 뚫어 만든 동굴 길, 바다와 높은 절벽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하얀 갈매기 떼 그리고 행남등대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전망. 이 산책로 하나만으로도 울릉도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해안 산책로
 해안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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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남등대에서 바라본 해안 산책로
 행남등대에서 바라본 해안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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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남등대에서는 저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산8경 중 하나라는 저동어화 즉 오징어배의 환한 불빛이 환상적이라는 저동 야경을 찍어보려고 날이 저물도독 저동의 불빛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처럼 동네의 불빛은 성큼 켜지지 않고, 배는 고프고 해서 할 수없이 사진찍기를 포기하고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내려왔다.

오늘 저녁 메뉴는 약소고기. 바쁜 걸음으로 허겁지겁 향우촌으로 향했다. 그런데 향우촌에 들어서니 영업시간이 끝났다는 것이 아닌가? 배가 고파서 도저히 그냥 갈 수 없다고 사정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우리의 사정을 들어주셨다.

향우촌은 직접 약소를 길러서 팔고 있는데, 특히 소금구이가 가장 맛있다고 한다. 약소는 울릉도 약초를 먹고 자란 소인데, 고기가 약간 질긴 듯 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하고 맛있다. 또 씹을수록 약초냄새 같은 것이 나는 듯 했다. 덤으로 곱창전골을 한 그릇 주셨는데, 그것도 곱창 특유의 씹히는 맛과 고소해서 맛있었다.

육지에서는 미국산 광우병소고기 때문에 난리인데, 이 곳은 딴 세상 같았다. 약소 소금구이와 곱창전골에 소주 한 병을 맛있게 비우고 나니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다. 택시를 타고 저동으로 넘어왔다. 모텔 시설이 좋아서 그동안 밀렸던 빨래를 다 해치웠다!

덧붙이는 글 | 5월 5일부터 11일까지 울릉도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태그:#도보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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