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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까나. 오월 토요일, 모처럼 빈 시간이 흐믓하다.
 어디로 갈까나. 오월 토요일, 모처럼 빈 시간이 흐믓하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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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맞는 한가한 토요일. 날씨도 좋다. 무얼할까 생각하다가 자전거를 꺼냈다. 휴양림 출퇴근때 하루도 빠짐없이 타고 다녔던 녀석. 지금은 구석에서 먼지나 뒤집어 쓰는 신세다. 사연이 있다. 지난해 7월에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출퇴근을 아예 걷기모드로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바퀴살에 거미들이 진을 쳤고 안장에도 희뿌옇게 시간의 더께가 내려 앉았다. 몽당비로 대충 털어내고 마른 걸레로 닦아줬다. 바람을 빼 놓지도 않았는데 타이어가 홀쭉해 졌다. 펌프로 바람을 넣어보니 괜찮다. 몇군데 녹이 스는 바람에 번쩍번쩍 경쾌한 자태가 생명인 '아메리칸 이글'이 스타일을 구겼다. 대신 미니벨로 신분에 과분하게도 세월의 무게를 얻었으니 그게 어디인가.

자전거를 꺼내 놓으니 마음이 바빠진다. 방으로 들어와 나갈 채비를 챙겼다. 쫄바지를 입고 버프를 목에 걸고 헬멧을 꺼내 썼다. 오랜만에 챙겨입은 복장이 좀 어색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분좋은 라이딩을 위한 기본사항이니. 자전거위에 오르면 금방 나아질 것이다. 달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도록 MP3에 오디오 북도 내려 받았다. 오늘 듣게 될 책은 헬렌&스코트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이다.

전에 읽은 적이 있다. 3년 전쯤 인가.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 책을 소개 받았었다. 니어링 부부는 지혜로운 선각자다. 그들이 택한 버몬트에서의 스무해 세월은 자연속에서 인간답게 사는 나날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 돌집과 단풍시럽, 블루베리, 가치있는 삶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좋은 책이었다.

어디로 갈까나. 오월 토요일, 모처럼 빈 시간이 흐믓하다. 몇 군데 저울질을 하다가 결국 자전거 출근길이었던 휴양림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오랜만에 자전거 안장에 오르니 반팔차림에 스치는 바람이 봄날 이슬비처럼 상쾌하다. 저절로 발에 힘이 주어진다.

"많은 이들이 월급에 기대어 먹고 살며 도시의 아파트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일 뿐 아니라,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사람들을 살기 힘들게 한다. 그래서 자기를 옭아매고 있는 이 답답하기 짝이 없는데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식구들과 친구들의 걱정어린 충고와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발길을 가로 막는다."

오랜만에 자전거 위에서 느끼는 기분은 상쾌하다.
 오랜만에 자전거 위에서 느끼는 기분은 상쾌하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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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면서 듣는 책. 좋은 편집 덕에 집중이 잘된다. 영문판이 나온지 오십년이 넘었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변했지만 독자들의 공감은 변함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을 둘러 싼 현실은 어찌 그리 똑같은가. 아마 앞으로 오십년이 더 지난다 해도 ‘인간을 옭아메고 있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시골생활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밭떼기를 일구어서 밥상에 먹을 거리를 올려 놓을 수 있을까. 시골 일은 내 허리를 휘게 만드는 또 다른 중노동이 되지 않을까. 도시생활과 결별하기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몇 백가지가 넘는 이런 의문들이 머리를 채우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런 이들을 위해 우리 두사람이 쓴 것이다. 나이가 스무살에서 쉰살 사이이고 건강과 지혜와 돈을 아주 조금밖에 못가진 부부라 해도 누구든 충분히 시골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고 우리 두사람은 믿는다. 얼마든지 필요한 기술을 배워 나갈 수 있으며 자기앞에 닥쳐오는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넉넉한 삶을 꾸려 나갈수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친절하다. 복잡한 생활에 지쳐 단순한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삶과 유리된 허황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이가 스무살에서 쉰살 사이이고'라는 표현처럼 현실에 기반을 둔다. 잘 만든 매뉴얼을 보듯 글속의 표현들이 구체적이고 명료하다. 오십여년 전의 미국이야기지만 지금 이 땅에서 시골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지침서로 손색이 없다. 이런게 바로 실용이다.

"… 우리는 계속해서 도시에서 바쁘게 오가며 살 수 있었다. 우리가 마음속 깊이 불만스럽게 여기는 이 삶의 환경을 죽을 때까지 참고 견딜수도 있었다. … 우리는 사람의 탐욕으로 움직여가며 남을 착취하여 얻은 모든 걸 자기것으로 만들고 부를 쌓으려고만 드는 사회구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식민주의자들의 민족주의 정서가 날로 심해갔으며 집산주의자들의 땅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서구 문명속에 남아있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문명을 대신할 확실한 대안을 찾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

이 문명을 대신할 확실한 대안을 찾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
 이 문명을 대신할 확실한 대안을 찾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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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오르는 중이다. 고개를 오르는 자전거는 늘 힘들다. 기어를 낮추어 도 허약한 다리가 감당해야 할 힘의 부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옅은 구름이 끼어 눈부심은 없다해도 지나가는 차량의 매연이 심한 것도 변함없고 이마에서 돋는 땀도 여전하다. 초여름 날씨에 바람마저 없으니. 그래도 오랜만에 자전거 위에서 느끼는 기분은 여전히 상쾌하다.

두 사람은 헌신적이었다. 부조리한 사회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몸을 던져 노력했다. 스콧니어링은 펜실베니아 대학의 교수로 아동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가 해직되고, 그후 톨레도 대학의 정치학교수와 예술대학장을 맡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에 반대하다가 다시 해직된다. 힘든 싸움을 하던 마흔다섯에 스무살 연하의 헬렌과 만나 둘은 의기투합한다. 두 사람은 결국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 먹는다. 자연속에서 자기를 잃지 않고 살며, 사회를 생각하며 조화롭게 살겠다고 생각하고 1932년, 이책의 배경인 버몬트에 들어간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걸 해결하는 것은 풍요롭고 보람있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문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삶을 제대로 꾸려갈 수 있을 만큼만 생활 필수품을 얻는 일에 매달렸다. 그 수준에 이르고 나면 먹고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눈을 돌려 취미생활과 사회활동에 관심과 정열을 쏟았다."

길가에 핀 찔레꽃 진한 향기가 발걸음을 잡는다
 길가에 핀 찔레꽃 진한 향기가 발걸음을 잡는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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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길가에 세워두고 개울가로 내려선다. 개울의 풀더미 속에서 실하게 자란 미나리들이 제법 눈에 띈다. 몇 개 꺾지 않았는데도 손안에 가득하다. 살짝 데쳐서 찬밥과 함께 고추장에 비벼먹으면 훌륭한 점심메뉴가 될 것이다. 미나리 뿐 만이 아니다. 조금만 살펴보면 초여름의 산천은 자연이 베푸는 먹거리들로 가득하다. 질경이, 민들레, 씀바귀, 왕고들빼기… 눈이 닿는 곳마다 나물들이 지천이다.

건너편 언덕배기에 감나무들이 보인다. 오래 전에 집이 한 채 있었을 법한 편안한 지형이다. 가지를 늘어뜨린 야트막한 감나무 몇그루가 그곳이 집자리였음을 뒷받침 한다. 텃밭에 상추를 뜯어 점심상을 차려놓고 돌담사이를 서성이며 들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아낙네는 어디로 갔을까.

"마크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문명이란 ‘불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다. 시장경제는 떠들썩한 선전으로 소비자를 꼬드겨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도록 만든다. 그리고 돈을 내고 그런 것을 사기위해 자기의 노동력을 팔도록 강요한다. 노동력을 팔 때 생기는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현명한 쥐가 덪을 조심하는 것처럼 시장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연말정산을 하면서 한해동안 삶도 정산하는 버릇이 생겼다. 정산의 결과는 늘 실망스러웠다. 대부분의 수입은 당해년도 지출로 상계되었고 수중에 남은 것이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옷장을 가득 채운 옷가지들과 구석방에 뒹굴거리는 허접스런 잡동사니들. 한해동안의 삶이 즐거웠느냐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것들을 사들이는 동안 잠시 마음이 넉넉했을 것이다.

내가 한해동안 해온 일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나. 그것도 자신이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고집하지도 못한다. 단지 먹고 사는 일일 뿐이다.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속물이 되어 기계적으로 복무하는 삶. 신념도 이상도 없는 개체의 일상이 무료하게 이어질 뿐이다. 정산의 뒤끝은 늘 개운치 않았다.

그들 부부가 은근하게 소매를 잡아 끌고 유혹할 때마다 나는 변명했다. 그건 현실 적용이 불가능한 공상이고 배부른 인간들이나 빠져드는 정신적 사치야. 사람에게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건 없어. 밥벌이는 숭고한 거야. 먹이를 물어오는 역할을 맡은 이상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이상과 현실은 늘 일치되지 않는 거고. 인간은 그 둘 사이를 방황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거야.

돌담사이를 서성이며 들에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아낙네는 어딜 갔을까
 돌담사이를 서성이며 들에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아낙네는 어딜 갔을까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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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해동안 살면서 우리는 흰밀가루, 흰빵, 흰설탕, 파이 과자의 문제점에 대해 이웃들과 밤을 새면서 수없이 많은 토론을 했다. 그리고 채소를 날것으로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며 썩어가는 동물의 시체를 먹는 것은 역겨운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입이 닳도록 얘기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그 스무해 동안 우리의 충고에 따라 먹는 습관을 바꾼 집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랐지만 그이들의 생활방식을 따를 생각이 없었고 그이들도 우리의 방식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르게 사는데 동의했으며 서로의 독특한 취향을 인정했다. 그이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지켰고 우리들은 우리 나름의 계획에 따라 버몬트 사람 답지않게 살았다. "

사람들은 완고하다. 이미 방향을 정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불안한 시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조류독감, 광우병, 석유자원고갈로 인한 유가 폭등… 얼마 안있어 겪어야 할 몰락의 전조 증상들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도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한다. 모두들 사느라고 바빠서 알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스스로 포기하고 사는 걸까.

88만원 저임금으로 대표되는 양극화 세상. 이윤이 한계에 도달한 자본권력은 위험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한반도 대운하 건설까지 불안한 야바위를 시작했다. 힘없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그렇게라도 GNP를 높이고 허기진 속을 채워야 하는 것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속성이니까. 피폐해진 사회에서 자본의 충직한 병정개미로 대대손손 복무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어쩌랴.

"우리가 내놓은 문제의 해결책, 다시말해 자기가 먹을 음식을 손수 가꾸어 먹는 방법을 따르더라도 나머지 몇백만 미국인들이 여전히 식품산업의 힘없는 희생자로 남기 때문에 이건 혼자만의 해결방법이라는 것을 우리도 인정한다. 이것에 대한 답으로 두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한 사람이나 한 집안이 이런 사정을 깨닫고 고쳐 나가려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 집안은 물론 그 사람들을 보고 영향받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된다."

오월 햇빛을  받은 연두색 신록이 눈부시다
 오월 햇빛을 받은 연두색 신록이 눈부시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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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니어링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독후감으로 느끼는 '니어링바이러스'의 개운치 않은 뒤끝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지금 그의 방식으로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깨닫고 고쳐 나가려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 그 불편함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을 보고 영향받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달라지게'되는 것만으로 세상이 변할 수 있을까.

그들 부부는 자본주의 세상이 이렇게 흐르리라는 걸 예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깨닫고 고쳐 나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말라고,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그러면 반드시 세상은 달라질거라고, 가늘고 질긴 조언을 했을 것이다.

버몬트에서 스무해 동안 자신들의 조언에 따라 준 이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들은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길이라 믿으며 삶의 원칙을 만들었고 일생동안 묵묵히 그것을 실천하며 살았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으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당신이 있어서 세상이 나아졌다'는 칭송을 들었던 사람. 100회 생일이 지나자 스스로 음식을 거절하고 부인 헬렌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던 위대한 사회 운동가.

한시간 남짓 머물다 돌아오는 길. 하늘은 이미 활짝 개어 중천에 높이 뜬 태양이 쨍쨍하다. 산비탈에 머무는 연두색 신록이 눈부시고 오랜만에 흘린 땀으로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 절망의 끝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끈을 놓지 말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라. 그들이 온 몸을 던져 보여준 조화로운 삶의 결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그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가 남겨준 가늘고 질긴 끈하나 붙들고 살아가련다. 아직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음을 믿으며.


태그:#조화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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