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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상류 쪽이다. 청둥오리떼가 날개를 푸덕이며 낮게 날아가고 있다. 시골이 맞긴 맞나 봐요, 야생오리를 다 보다니. 강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이모는 재봉틀을 돌리다 말고 매일 보는 게 일인데 뭘, 하고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덧신 한 짝이 모양새를 갖춰간다. 발 좀 이리 다오. 이모의 채근에 나는 마지못한 듯 발을 내민다…

하월리 영감님은 이모의 일곱 번째 남자였다. 삼 년 전 노인이 죽은 후 그 영감님의 자식들이 생활비를 대주며 봉양한다는 소식은 올케언니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들이 돌아가며 용돈과 양식을 대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는 칠순에 이른 이모의 수완이 아직도 비늘처럼 빛나고 있음을 알았다." -101~103쪽 '달의 강' 몇 토막

1959년 돼지띠. 글쓴이와 동갑내기인 작가 유시연의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에 실려 있는 소설의 빛깔은 그믐밤처럼 캄캄하다. 하지만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저만치 길라잡이처럼 흐릿하게 빛나는 불빛이 있다. 그 불빛은 캄캄한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이 뿌리는 빛인지, 반딧불이 내는 빛인지는 잘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흐릿한 빛이 언젠가는 그믐밤의 캄캄한 어둠을 이겨내고 기어이 신새벽을 맞이하고 말겠다는 듯이 옹골차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대 깊게 패인 상처,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처투성이가 짙게 드리운 캄캄한 세상.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름길을 끝까지 찾아내고 말겠다는 듯이.

상처와 좌절, 분노, 한숨, 체념 따위가 칡넝쿨처럼 치렁치렁 뒤엉겨 있는 유시연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치 미국산 미친 소 수입을 반대하는 침묵의 촛불시위를 보는 듯하다. 길거리에 모여 '우린 살고 싶어요'라는 피켓과 촛불을 든 여중생의 무언의 항의. 유시연의 소설은 그 침묵의 항의처럼 읽힌다.

그래. 작가가 찾는 그 흐릿한 빛은 어쩌면 미국산 미친 소 수입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나이 어린 학생들을 무더기로 연행하는 이명박 정부처럼, 시대가 휘두르는  폭력 앞에 그대로 연행당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연행, 석방, 연행, 석방이 거듭되다 보면 자칫 스스로 지쳐 주저앉을 수도 있다.

작가 유시연 소설의 급소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시대의 폭력 앞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그 상처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상처를 어떻게 딛고 일어서야 하는 지에 대한 부분은 자세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이는 작가가 일부러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성이 결핍된 무능한 정권과 정치인이 그동안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시대의 폭력 앞에서 주저앉거나 한숨만 쉬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 폭력 앞에 맞서 촛불을 들고서라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유시연의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처럼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깊은 상처가 끊임없이 반복되지 않겠는가.

시대의 폭력 앞에 상처 입은 사람들의 삶

유시연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 유시연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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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햇빛 찬란한 날보다는 우중충한 날들만 기억에 선명하다. 분명히 나에게도 기쁨의 날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은 어두운 그늘만을 응시하고 있다. 오래 전 아이였을 때 저 먼 세상을 동경하며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일들은 이제 현실에서 갈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기에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 '작가의 말' 몇 토막

지난 2003년 문단에 나온 작가 유시연(49)이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화남)를 펴냈다. 사실, 소설의 표제처럼 알래스카에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래스카에는 그 어느 지역보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근데,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작가의 속내는 무엇일까.

작가는 시대의 폭력 앞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의 고된 삶을 '눈 내리지 않는 알래스카'를 통해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좌절과 눈물, 분노와 한숨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힘겨운 삶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에 희생된 그 사람들은 상처를 희망처럼 어루만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그 말이다.

이 소설집에는 열아홉 살 때 성적 유린을 당한 여자의 삶을 그린 '당신의 장미'에 이어 표제가 된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여름비', '메마른 고원', '달의 강', '여름의 흐름', '숲의 축제', '황금동굴', '봄이 지나가다', '도시 위를 날다', '물결이 친다' 등 11편의 단편이 지난 세월의 피멍처럼 아프게 박혀 있다.

알래스카 원주민 여성 '아네'의 외로운 삶(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이 나오는가 하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불임여성의 속내를 담아놓은 이야기(메마른 고원)도 그려진다. 이와 함께 사북 막장생활의 후유증으로 암 선고를 받은 한 남자 이야기(봄이 지나가다)와 경운기 운전 부주의로 어머니를 치어 죽인 어느 아버지(여름의 흐름)도 나온다.

작가 유시연은 "강원도 골짜기, 낭떠러지에 아스라이 걸린 진달래를 보며 김소월의 시를 읊고 다니던 시절, 나는 문학소녀였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어 "세계문학전집을 빌려주고 자살한 친척 청년, 평생 술만 마시다가 죽은 이웃집 사내, 먼저 간 남편을 그리며 방황하다 논두렁에서 동사한 아낙에 이르기까지,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내 삶에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했다.

지독한 외로움을 극복하는 나만의 방식은?

"아네와의 밤이 바람 속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바람이 심하게 요동쳤었다. 오두막에서 삼백여 미터 떨어진 거리였다. 아네가 얼음 벌판에 석고처럼 서 있었고 그가 다가갔을 때 이미 몸은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네를 들쳐업고 급하게 오두막으로 달렸다. 침대에 눕힌 후 마사지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심각한 상태였다. 거의 동사 직전에 이른 아네의 몸은 쇳덩이 같은 냉기가 돌았다. 꽤 긴 시간이 흐른 후 아네의 호흡이 돌아왔다. 땀에 젖은 그녀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 '어떻게 된 거요?' /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에 수줍음이 묻어났다." - 50쪽,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몇 토막

외로운 알래스카 원주민 여성 '아네'.  아네는 지독한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외로움의 끝자락에 스스로를 세운다. 외롭다고 해서 외로움을 피하거나 외로움 때문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다. 외로움에 정면으로 마빡을 맞닥뜨리는 것이다. 그것이 아네가 가진 외로움을 극복하는 외길이다.

아네는 알래스카 원주민이다. 따라서 알래스카에서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생존에 대한 본능과 알래스카에서 살아가면서 스스로 체득한 생존의 방식에 몸에 배어 있다. 따라서 아네가 가진 지독한 외로움에 대한 극복 방식도 알래스카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아네만의 독특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 그가 아네에게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죠?"라고 묻자 아네는 미소를 지으며 "원래는 온난 습윤해서 일 년 내내 열매가 달려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게 언제적 이야기일까 곰곰이 생각한다. 그리고 히말라야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되기까지 사람들은 예전에 그 산이 바다였다는 걸 믿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그때 아네가 그에게 다시 말한다. "우리는 아직 신생대에 살고 있는 거겠죠"라고. 그가 다시 아네에게 말한다. "다신 그러지 말아요", 즉 다시는 얼음벌판에 석고처럼 서 있지(죽지) 말라고. 하지만 아네는 그에게 주저 없이 한 마디 툭 던진다.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나만의 방식이에요"라고.  

상처 입은 삶에 또다른 상처를 덧댄다

"겨울 해가 유리창에 넘실대다가 사위어 간다. 하혈한 여인의 핏기 잃은 얼굴처럼 여윈 모습이다. 나는 한꺼번에 건너뛴 시간의 중첩 속으로 자꾸 주저앉고 있다. 자궁을 들어내고 병원 문을 나서며 쳐다보던 하늘은 투명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의 텅 빈 적막처럼 무심히 흘러가던 구름이며 새떼들의 행렬, 담장을 점령한 진홍빛 장미덩굴, 온통 대지가 초록 물결로 숨가쁘게 치닫던 날이었다…

따귀 한 대에 가차 없이 이혼을 하고, 잘못했다고 비는 남자를 매몰차게 외면한 이모의 속내는 어머니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 남자를 일곱 번이나 갈아치운 이모가 어머니와는 다른, 동류의 여성들이 모르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나의 시선에 이모는 무심하다." - 111쪽, '달의 강' 몇 토막

<달의 강>의 주인공은 '나'와 '이모', '어머니'다. 나는 자궁근종 수술로 자궁을 들어낸 여자다. 즉, 나는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여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모는 어머니와 혼담이 오고 가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다 끝내 그 남자와 함께 야반도주하고 만다. 따라서 어머니는 사랑의 패배자다.

졸지에 여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긴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불행은 시작된다. 어머니의 남편은 국회의원 공천을 받는 데 눈이 뒤집힌 나머지 재력 있는 여인의 지원을 받기 위해 가장과 남편, 아버지의 역할을 내팽개친다. 그 불행한 나날들 사이에 나가 있다.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펴낸 작가 유시연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펴낸 작가 유시연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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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빼앗아 간 이모 또한 마찬가지다. 이모는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한 채 남자를 여섯 번이나 더 갈아치운다. 그리고 말년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때부터 이모는 바느질을 하고 불경을 외며 지독히도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문학평론가 고명철은 "유시연은 이미 난 상처에 또 다른 상처를 덧낸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삶이란, 상처투성이 자체이며, 상처를 적당히 아물게 하는 것은 언제 또 더 큰 상처를 덧나게 할지 모를 일이기에, 상처의 뿌리에 닿을 정도로 아파하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낳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서사화한다"고 평했다.

유시연의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우리 사회에서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수많은 이들이 양극화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 보내는 한풀이 한마당이다. 작가 유시연은 이 소설에서 상처 입은 자들이 평생을 짐짝처럼 짊어지고 다니는 고통과 좌절, 한숨을 이 시대에 끄집어내 촛불시위를 한다.

미국산 미친 소 수입 개방(시대의 폭력)을 반대하는 숱한 사람들이 정부와 경찰의 강경대응에도 불구하고 저녁 때마다 촛불과 피켓을 들고 묵언의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작가 유시연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소설 곳곳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이 너무 자학에 가까워 자칫하면 사실적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다는 점이다.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의 작가 유시연은 1959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2003년 <동서문학> 신인상에 단편 '당신의 장미'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작가회의와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인천작가회의 사무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 인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받음.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유시연 지음, 화남출판사(2008)


#작가 유시연#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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