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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마르코성당 종탑에서 바라본 베네치아
 산마르코성당 종탑에서 바라본 베네치아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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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성당은 여행 코스 중 제일 재미없는 곳일지 모른다. 종교적 배경 지식이 없으면, 그걸 알려줄 가이드마저 없다면 그 어마어마한 건물을 제대로 감상하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가는 도시마다 성당을 들렀던 것 같다. 여행책자는 각 도시마다 있는 성당을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별 두세 개씩 달아놓고 있으니까. 굳이 여행책자가 아니더라도 성당을 피하기는 힘들다. 내가 가는 모든 곳에 성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번 유럽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기독교'라고 하겠다. 정말이지 동양에서 온 한 무신론자의 눈에는 유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게 바로 기독교의 흔적이었다. 유럽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거리 모습은 도저히 기독교를 빼고는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그 흔적이 응축된 곳이 성당이다.

 마드리드 대성당 미사 중인 모습
 마드리드 대성당 미사 중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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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도 '급'이 있는데 가장 권위가 높은 성당은 '바실리카(basilica)'라고 한다. 성당 중의 성당, 로마가톨릭의 심장부라 할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이 대표적이다.

그 다음은 흔히 말하는 '카테드랄(cathedral)'. 주교가 있는 대성당을 말하는데 웬만한 도시엔 하나씩 다 있다. 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보통 성당이 먼저 생기고 그 주변에 집들이 모여 군락을 이룬다. 카테드랄은 마을의 중심부이자 광장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론 소성당(혹은 예배당), '카펠라(cappella)'다. 유명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는 그보다 더 유명한 시스티나 예배당(Cappella Sistina)이 있다.

성당은 내게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굳이 종교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아서인지 방문지 중에서 가장 편안했던 곳이다. 뜨거운 햇살이 눈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내부가 시원한 것도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샀다. 천장은 또 얼마나 높은가. 덕분에 소리의 공명이 일반 공연장에서 듣는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바깥에서 뚜벅뚜벅 걸으며 잔뜩 긴장했던 여행자의 시각, 청각, 촉각이 모두 편안해졌다.

가끔씩 미사 시간이 겹칠 때면 신자들이 앉는 자리 뒤쪽에 앉아 멍하니 바라봤다. 성가대의 노랫소리, 사제의 설교소리. 때로는 이탈리아어로 들었고, 때로는 스페인어로 들었고, 때로는 프랑스어로 들었다. 물론 내용까지 알아들은 건 아니다. 내용은 중요치 않았다. 내용을 알아들었다면…, 어쩌면 휴식에 방해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성당의 또 다른 매력이라면 종탑이다. 도시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시의 성당을 방문할 때마다 종탑이 있는 곳이면 다 올라갔던 것 같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성당에 따라 다르지만 5유로 정도는 내야 한다.

'그럼 그렇지, 조망권을 공짜로 내줄 리 없지'라고 생각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꽤 힘들고 지겹다. 통로가 좁아서 한 번 진입하면 중간에 쉬기도 힘들다. 뒤에서 계속 사람들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3층 이상은 전기에너지에 의존해 올라가는 습관이 붙은 몸뚱이가 아파트 20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건 고문이다.

 산마르코대성당에서 바라본 베네치아. 가운데 다리가 베네치아와 이탈리아 반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로
 산마르코대성당에서 바라본 베네치아. 가운데 다리가 베네치아와 이탈리아 반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로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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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습관을 이겨내고 꼭대기에 오르면 고통은 금세 잊어버린다. 원래 좋은 장면을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하는 법이다. 대체로 성당은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 때문에 종탑에서 시내를 둘러보면 도시가 한눈에 보인다. 내가 걸어왔던 곳, 내가 걸어갈 곳을 확인하면 그날의 이동 경로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도시를 자세히 보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사이로 작은 십자가들이 고개를 내밀고 서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을 다 수용하려면 대성당 하나로는 부족해 세워진 작은 성당들이다.

운이 좋으면 종이 울리는 소리를 바로 현장에서 들을 수 있다. 난 두 번의 기회를 얻었는데 하나가 스페인 세비야의 히랄다 탑이었다. 오후 4시쯤이었나. 쌕쌕거리며 꼭대기에 올라와 시내를 바라보면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쾅'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다. 긴장을 풀고 있던 관광객들 모두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만큼 기습적이고 육중했다.

위를 쳐다보니 천장에 달린 커다란 종을 줄로 연결된 망치가 때리고 있었다. 귀를 막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종 바로 아래에 서서 파괴적인 종소리를 들었다. 종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를 삼킬 것 같았다. 종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나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세비야 히랄다탑의 종
 세비야 히랄다탑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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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잊을 수 없었던 광경 하나가 또 성당과 관련 있다. 이번엔 바르셀로나에 있는 대성당인데, '고해성사'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고해성사. 어떤 곳에서 어떻게 이뤄질까 항상 궁금했다. 캄캄한 지하실 같은 데서 할까. 사제와 신자 사이에는 벽이 있을까. 고해성사를 하고나면 정말 홀가분해질까.

고해성사를 하는 곳인 '고해소'는 나의 예상을 벗어나 환하게 개방된 곳에 있었다. 성당의 한쪽 자리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해소의 생김새도 예상 밖이었다. 나무로 된 조그만 박스 공간이었는데 얼핏 보면 버스정류소의 매표소 같기도 했다. 고해소 앞에 한 할머니가 서서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창문 안에는 사제가 앉아 할머니 말을 듣고 있었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봤다. 둘은 집안 문제로 다투는 부부처럼 꽤 치열하게 얘기했다. 중간에 서로 말을 끊기도 했다. 할머니는 몸짓을 섞어가며 열심히 사제와 대화했다. 고해성사가 저런 것이구나. 물론 저 모습만이 다는 아닐 테지만 난 고해성사를 죄를 지은 사람이 신부에게 찾아가 머리 숙여 속죄하는 아주 엄숙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순진하고 무지한 모양이다. 저렇게 일상적인 것이구나.

 바르셀로나 대성당. 고해성사하고 있는 모습
 바르셀로나 대성당. 고해성사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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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사회에서 신자에게 사제는 일종의 멘토, 카운슬러 같은 존재라고 한다. 어려운 일을 상담하고 신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관계. 할머니와 사제를 보면서 나도 저런 멘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항상 고민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혼자 울거나 가슴에 담아두거나 일기를 쓰는데, 평생 의지할 수 있는 멘토가 있으면 삶이 든든할 것 같다.

예전에 봤던 <섹스앤더시티>(시즌 3~4쯤?)에서 주인공 캐리가 친구 미란다의 아기 브래디의 대모(代母, godmother)가 되는 장면이 떠올랐다. 방금 내가 본 장면과 매치가 되면서 가톨릭 사회에서 사람 간 관계를 맺는 방식이 어떤 모습일지 설핏 머릿속에 그려졌다. 모르긴 몰라도 인간관계의 기본은 서로 서로 연대를 맺는 방식임은 확실한 것 같다.

 프랑스 마르세이유,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
 프랑스 마르세이유,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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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가톨릭은 한국 사회에서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우리는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개념으로 여기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자연스러운 생활양식의 하나였다. 우리가 태어나면 한국인인 게 당연하듯, 유럽인은 태어나면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하고 성당을 다닌다(물론 오늘날 유럽엔 무슬림도 있고 불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건 일반적인 유럽인들의 모습이다).

한 달 간의 유럽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성당이라는 사실은 나도 놀랍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거대한 성당의 건물에 감탄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 공감대가 형성돼 감동을 느낀 것도 아니다. 뭐랄까.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성당에서 나는 유럽 역사와 문화의 큰 줄기가 오늘날까지 일반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퍼져 있는 모습을 본 것 같다. 한 달 간의 짧은 기간 여러 나라를 돌며 유적지,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는 여행에선 우리가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얻는 정보 이상의 유럽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느 뜻밖에도 성당에서 그것을 찾았다. 유럽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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