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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는 민주화 이후 오히려 담론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이슈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아예 쟁점으로 떠오르지 않거나 간혹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갈등만 증폭되는 현상도 보입니다.

담론의 복원을 위해 어느 때보다 건전하고 창의적인 언론활동이 요청되는 시기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은 매체창업 또는 칼럼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우리사회의 건전한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하는 '저널리즘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쓴 기사를 이번 학기에는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기자 주>

강의 중인 박흥영 교수. MBC에서 34년간 TV 다큐멘터리 피디의 길을 걸었다.
 강의 중인 박흥영 교수. MBC에서 34년간 TV 다큐멘터리 피디의 길을 걸었다.
ⓒ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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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피디가 들려주는 자연 다큐 촬영 뒷이야기

한국의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 편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자연 다큐는 제작 기법의 발전과 상관관계가 깊다. 이전에는 각 방송사가 비정기적으로 매년 1~2편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994년 MBC의 <갯벌은 살아있다>, 1995년 <한국의 버섯> 등이 해외 다큐 축제에서 수상하면서 비로소 자연 다큐는 TV다큐의 중요 부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KBS가 <환경 스페셜>을 주간물로 정규 편성했다.

21년 전에 만들어진 자연 다큐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고속카메라도, 수중카메라도, 리모트 컨트롤 카메라도 없이 만들어진 자연 다큐.

지난 16일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 저널리즘 특강에서 만난 박흥영 전 MBC 피디의 <한강의 사계>는 한국 자연 다큐의 시초나 다름없었다. 34년간 TV다큐 피디로 <대 사하라>, <인간시대>, <명작의 고향>등을 만든 박 전 피디는 현재 세명대학교 방송연예학과 초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한민국 최초 영상이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87년 1월 3일 첫 전파를 탄 <한강의 사계>는 첫방송 시청률이 38%였다. 3일 뒤 재방송, 재방송 일주일 뒤 삼방송이 됐다. 당시 시청자들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들에 놀라워하며 방송국에 재방, 삼방을 요청했다.

아마도 그가 찍은 '한국 다큐 최초'의 장면들 때문에 사람들은 TV 앞에 모였을 것이다. 잠자리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변태해서 온전한 날갯짓을 할 수 있는 잠자리로 우화(羽化)하는 장면, 땅거미가 곤충을 잡아먹는 장면, 살모사가 새끼를 낳는 장면, 구렁이가 꽃뱀을 잡아먹는 장면 등을 사람들은 이전에 보지 못했다. 박 교수는 가장 익숙한 한강에서 가장 낯선 장면들을 길어 올렸다.

야생을 관찰하고 보이는 대로 기록하는 '만물도감'식 다큐로 한국 자연다큐가 시작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작 장비가 부족했던 것은 물론이고 쌓아온 노하우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맨몸으로 현장에 나가서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찍었죠. 방송이 90분짜리였는데 5000분을 찍었어요."

촬영 전 철저한 사전준비와 기획 단계를 거쳐 다큐를 제작하는 요즘과는 사뭇 다르다. 박 교수가 강의 처음부터 왜 '현장'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1년의 제작 기간 동안 고작 150여 일만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출장으로 집을 비운 시간이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도 많았다.

"기자든 피디든 저널리스트는 현장을 발로 누벼야 합니다. 특종이란 것도 현장에서 나옵니다. 현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발로 많이 뛰세요. 그러면 일상을 뛰어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살모사와 동거 아닌 동거'... 다큐에서 연출은 어디까지 허용되나

그의 손을 거친 다큐멘터리들은 한국 다큐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의 손을 거친 다큐멘터리들은 한국 다큐 역사의 첫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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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장면이 현장에서 건진 인내의 결과물은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 도저히 촬영이 불가능해서 또는 촬영 가능성이 극히 낮아서 '연출'한 장면들도 있다.

실제로 <한강의 사계>에 나오는 살모사가 새끼를 낳는 장면은 그의 아파트 잔디밭에서 촬영했다. 가까이서 꾸준히 지켜보지 않는 한 새끼를 낳는 시기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출산의 순간을 카메라가 적절하게 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살모사를 늘 곁에 두고 출산일을 지켜보기로 했다. 우선 현장 전문가인 땅꾼 장아무개씨를 통해 새끼 밴 살모사 네 마리를 구했다.

살모사는 다른 뱀들과는 달리 알이 아닌 새끼를 낳는다. 그 새끼가 어미를 물어 죽인다고 해서 이름도 살모사(殺母蛇)다. 박 교수는 새끼 살모사가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죽이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집에까지 살모사를 데리고 간 것. 결국 박 교수의 가족도 살모사와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대여섯 살이던 박 교수의 아들과 딸은 강아지를 데리고 와 자랑하는 이웃 친구들에게 "우리는 살모사를 키운다"라며 겁을 주기도 했단다.

졸지에 '살모사 키우는 아이들'이 되고 만 자식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그것이 다 피디라는 직업의식 때문이다. 뱀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박 교수 자신도 장난감 만지듯 뱀을 주물럭거리는 수준이 됐다니 말 다했다.

살모사의 출산 장면은 아파트 잔디밭에 있는 소나무 위에서 무사히 진행됐다. 출산으로 힘을 소진한 어미 곁을 새끼들은 유유히 떠나갔다. 살모사 새끼가 어미를 물어 죽인다는 속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로 밝혀졌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기록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을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그렇기에 다큐멘터리에서 '연출'을 어디까지 허용할지는 중요하다. 한강의 생태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데 아파트 잔디밭에서 살모사의 출산 장면을 연출했기에 사실을 왜곡했다는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자연 다큐 피디들이 '연출 없는 자연 다큐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연출이 없는 가장 자연스러운 다큐가 훌륭한 자연 다큐라는 것 또한 안다. 다큐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확보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아마 모든 자연 다큐 피디들이 안고 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TV 다큐, 1인 제작 시스템으로 변할 것"

작년에 MBC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현장에서 한발 물러나게 된 박 교수에게 TV다큐의 미래에 대한 의견도 들을 수 있었다.

"하드웨어의 발전은 소프트웨어를 향상시키고 소프트웨어에 대한 치열한 고뇌는 하드웨어를 개발합니다. 둘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죠. 궁극적으로는 다큐가 치열한 탐구정신을 가진 피디 1인 제작 시스템, 즉 기획, 촬영, 편집, 대본, 연출을 피디 혼자서 맡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업과 협업이 아닌 1인 제작 시스템으로 환경이 변할 것이라는 박 교수의 생각은 제작비 문제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는 "제작 환경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지만 제작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시청자와 광고주들의 생각이 많이 변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이는 다큐멘터리 시청권 문제와도 연결된다.

"다큐를 수용할 공간이 부족합니다. 공영방송인 KBS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공간을 다큐를 위해 열어두어야 합니다."

박 교수는 강의 내내 저널리스트는 현장에서 발로 뛰어야 한다며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강의 내내 저널리스트는 현장에서 발로 뛰어야 한다며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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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로서는 다큐를 보고 싶어도 방송해주는 곳이 없고, 다큐 피디로서는 프로그램을 내보낼 곳이 없다는 말이다.

다큐를 찍는 피디의 어려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수업 시간 내내 천생 피디의 모습이었던 박 교수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길을 걸으려 할까?

"기대하던 것을 촬영했을 때, 기대하지 못한 것을 촬영했을 때, 한 평 남짓한 편집실에서 밖에는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모르고 오로지 편집에 열중할 때, 시청률과는 상관없이 그 순간순간이 매우 기쁩니다. 그래서 열 번을 다시 태어난다면 여덟 번은 다큐 피디가 될 것입니다. 한번은 사진가나 훌륭한 음악 편곡자가 되고 싶고…시인도 부럽고…."


태그:#다큐멘터리, #피디, #박흥영, #한강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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