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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 아이는 간신히 닿는 손잡이를 꼭 잡고 갑니다.
 지하철 계단을 오를 때, 아이는 간신히 닿는 손잡이를 꼭 잡고 갑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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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시민들이 연행되고, 폭력진압에 피를 흘리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요구하는 요즘. 쿠하와 태중의 아이를 핑계로 안전한 집에서 오마이TV나 아프리카TV로 현장 소식을 듣는 임산부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특히 만삭의 어느 임산부가 집회에 나섰다는 뉴스는 죄책감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고, 유모차 부대를 보면서 울컥 미안함과 감사함이 교차했습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당분간 몇 달은 집안에 갇혀 지내야 할 쿠하에게 날씨 좋은 봄날, 최대한 바깥바람을 많이 쐬게 해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아이가 읽지 못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자라서 이런 시국에 촛불 집회 대신 저를 데리고 여기 저기 산책이나 다녔던 엄마를 쿠하가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염려도 됩니다.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지는 못해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광우병 정국은 너무 괴로운 날들입니다. 

평일 낮에도 간송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평일 낮에도 간송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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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과 10월에는 성북동 '비밀의 화원', 간송미술관의 철문이 열립니다.

일년 가운데 봄에 2주, 가을에 2주. 딱 두 번만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국내 최초의 사립미술관에서 지난 5월 18일부터 시작해 6월 1일 막을 내린 2008 봄 전시는 '오원 장승업 화파'전 입니다. 배우 최민식의 연기가 돋보였던 영화 <취화선>의 장승업이 올 봄 간송미술관의 주인공입니다.

오원 장승업 화파전, 전시회를 알리는 글씨를 읽어달라고 합니다. 다행히 아는 글자만 있어 엄마 체면을 구기지 않았습니다.
 오원 장승업 화파전, 전시회를 알리는 글씨를 읽어달라고 합니다. 다행히 아는 글자만 있어 엄마 체면을 구기지 않았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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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언덕에 있는 간송미술관의 봄·가을 전시회가 특별한 것은 전시장에 공개되는 고가의 작품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일본강점기에 10만석지기 대부호였던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의 배짱 두둑한 수집 이야기와 무료로 공개하는 연구 중심의 미술관 측 배려가 고맙기 때문입니다.

간송 전형필은 일본제국주의에 나라가 침탈 당하기 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고, 1910년대에 집안 남자들이 대부분 죽으면서 많은 돈을 상속 받았습니다.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면서 고문서를 보는 안목을 키웠고, 당대 조선 최고의 안목으로 꼽혔던 스승 오세창의 지도로 조선 서화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약탈 당한 문화재 수집에 씁니다. '문화 독립군'이라는 별칭이 딱 어울립니다.

그가 모은 작품 중에는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려청자와 훈민정음 창제 해자 원본,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들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당시 서울에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었는데, 10채가 넘는 돈을 들여 고려청자를 낙찰받은 일화는 단순히 컬렉터의 탐욕으로 폄하할 수 없습니다. 미술품을 투자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비자금 조성 루트로 활용하는 대기업 사모님의 행태와 간송의 낙찰이 다른 까닭은 미술품을 수집한 다음의 행동이 설명해 줍니다.

간송미술관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을 다른 상업 미술관에서 보게 된다면, 아마도 1만 원은 족히 받으면서 몇 점 되지도 않는 작품으로 대대적인 광고를 할 것입니다. 별도의 광고비를 쓰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장승업의 그림 40여 점을 비롯해 총 100여 점을 간격 50㎝ 남짓한 근거리에 빡빡하게 배치하면서도 무료로 공개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지요.

부처님 얼굴이 이상하다고 자꾸 손짓을 하네요.
 부처님 얼굴이 이상하다고 자꾸 손짓을 하네요.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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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져 가던 조선 시대의 마지막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1843~1897)은 열 살 무렵, 추사 김정희에게 <세한도>를 받은 화가 이상적의 사위 이응현의 집 심부름꾼으로 일하다 발탁돼 그림을 그리게 됐다고 합니다. 이응현과 같은 역관 출신인 변원규의 소개로 궁중으로 들어간 오원은 1868년께 단청장이 되어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습니다.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정식 화원으로 승급했지만,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술을 마시곤 했다는군요. 영화 <취화선>에 나타난 장승업의 그런 모습은 고종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했는데, 민영환이 오원을 자기 집에 가두고 그림을 그리게 하겠다고 청을 올려 사건을 무마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안녕, 나는 쿠하야." 저보다 큰 석상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 나는 쿠하야." 저보다 큰 석상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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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하가 가장 관심을 보인 작품은 <불수앵무>와 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귀거래도>입니다. 2층에 전시된 <불수앵무>는 바닥에 펼쳐진 작은 그림이라서 쿠하를 안아서 보여줘야 했는데, 사실적이고 세밀한 그림으로 사랑받는 영국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그림이 떠오릅니다. 쿠하는 유리관에 손을 바짝 대고 살아있는 것처럼 눈에 힘이 들어간 새 두 마리를 오래 봅니다.

존 버닝햄의 그림책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때문에 쿠하는 배를 타고 가는 남자는 모두 '검피 아저씨'라 부릅니다. 경춘선을 타고 가다 볼 수 있는 배를 봐도 '검피 아저씨'라고 부르는데, 전시된 그림 가운데 배를 타고 가는 장면이 여럿 등장할 때마다 줄곧 '검피 아저씨'타령을 합니다. "나도 태워줘~"라고 소리내 말하는 바람에 얼른 입을 가리고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지만 속수무책입니다.

그림 옆에 한자로 여러 줄 써있는 작품들은 그림책을 찢어 놓은 줄 알았는지 엄마한테 읽어달라고 합니다. 대학 입시에 한자가 포함됐더라면 좀 열심히 외웠겠죠. 괜히 가렵지도 않은 눈을 비비며 애써 못 들은 척하고 얼른 자리를 뜹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자주 개방됐으면 좋겠습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자주 개방됐으면 좋겠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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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엔 간송미술관뿐 아니라 가고 싶은 곳이 여럿 있습니다. 심우장, 수연산방, 최순우 옛집, 길상사까지. 아이와 하루에 소화하기엔 너무 빡빡한 일정이지만, <문장강화>를 쓴 이태준 선생의 생가인 수연산방과 미술관 가는 길에 못 들른 최순우 옛집은 내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산동네 초록이 더 진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성북동 산책을 다녀오는 게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97-1
02-762-0442 (관람시간 10 시~18시)
지선버스 1111번, 2112번 이용 성북초등학교앞 하차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역 하차 10분 도보



태그:#쿠하, #걷기,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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