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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읍내에는 국보와 보물급 유적이 많다. 그중 알려진 국보급 유적과 주변에 둘러볼 만한 유적을 찾았다.

 

작은 전각안에 보물 불상이 있다

 

보물 제75호 송현동 석불좌상은 도로변에 이정표가 있으나 처음 찾는 이들은 다소 어렵다.

큰 사찰인 천태종 창화사를 찾으면 바로 옆에 송현동 고분군과 인접해 있다.

송현동 고분군 송현동 석불좌상과 인접한 거리이다.
송현동 고분군송현동 석불좌상과 인접한 거리이다. ⓒ 김환대

작은 전각 안에 큰 바위 앞면을 조각한 마애불로 바위 자체를 광배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고 풍만하지만 크기에 비해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송현동 석불좌상 마치 바위에서 나온 불상같다.
송현동 석불좌상마치 바위에서 나온 불상같다. ⓒ 김환대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손모양은 항마촉지인이다. 통일신라 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포교당내에 지정 문화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4호 통도사 창녕 포교당 목조 석가여래좌상이 송현동 석불좌상과 인접한 지역 내에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창녕 관룡사에서 삼존상으로 조성 봉안했던 것을, 6·25전쟁 후 지금의 창녕 포교당으로 이 불상 1구만을 옮겨왔다고 한다.

 

포교당 불상 창녕읍내 포교당에 모셔진 불상.
포교당 불상창녕읍내 포교당에 모셔진 불상. ⓒ 김환대

반가부좌한 좌상으로서, 곧은 상체에 머리를 약간 숙여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있다.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 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영조 6년(1730)에 수화사 하천, 부화사 득찰·성찬·종혜 등이 참여하여 만들어졌으며 창녕 관룡사에 봉안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법당내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사진 촬영은 일체 안 된다.

 

관람이 어려운 석불사 불상

 

주변에는 문화재자료 제20호 석불사 석불입상이 있다고 하여 찾았다. 이 불상은 원래 요바꼴 언덕 위에 서 있는 불상을 법당에 옮겨 놓았는데, 석불사의 명칭도 이로 인한 것이라 한다. 광배에 아무런 무늬도 새기지 않아 소박함이 엿보이는 이 불상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이라 한다.

 

석불사 불상 석불사 불상을 알리는 입간판
석불사 불상석불사 불상을 알리는 입간판 ⓒ 김환대

하지만 현재 법당 내부에는 없었다. 건물을 새로이 짓고 있어 따로 현재 보관하고 참배도 일체 안 된다고 한다. 석불사 답사시에 참고 하면 좋을 듯하다. 내년까지 관람이 불가하다고 한다.

 

만옥정 공원 내의 유적

 

창녕 경찰서 읍사무소 등 중심가 만옥정 공원에는 볼 유적들이 많다. 공원으로 오르기 바로전 도로변에 읍사무소에는 용머리 2개가 유독 눈길을 끈다. 용두형인데 그 조각이 일품이다.

용머리 만옥정 공원 입구 읍사무소내에 있다.
용머리만옥정 공원 입구 읍사무소내에 있다. ⓒ 김환대

객사와 삼층석탑

 

만옥정 공원에 이르면 마주보면 관룡사 돌장승과 같은 모형이 있다. 바로 옆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창녕객사가 있다.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군수 이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다고 한다.

 

창녕객사 만옥정 공원에 있다.
창녕객사만옥정 공원에 있다. ⓒ 김환대

바로 앞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퇴천 삼층석탑이 있는데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퇴천삼층석탑 통일신라 후기 삼층석탑으로 만옥정 공원에 있다.
퇴천삼층석탑통일신라 후기 삼층석탑으로 만옥정 공원에 있다. ⓒ 김환대

이중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척화비와 척경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창녕척화비가 있다.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그러한 의지를 더욱 굳혀 국민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이 비는 땅위로 드러난 얇은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그 앞면에 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담긴 강한 어투의 비문을 적어 놓았다.

 

척화비 전국에 남아 있는 척화비 중 하나이다.
척화비전국에 남아 있는 척화비 중 하나이다. ⓒ 김환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 일제히 세운 것으로, 한일합방이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다.

 

진흥왕 척경비

 

국보 제3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 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진흥왕 척경비 진흥왕 척경비로 만옥정 공원에 있다.
진흥왕 척경비진흥왕 척경비로 만옥정 공원에 있다. ⓒ 김환대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이 이외에도 만옥정 공원에는 각종 조선시대 비석군과 창녕지구 UN전승비가 있다. 볼 유적이 너무나 많아 하루는 안 되고 몇 일 둘러 볼 고정이 창녕이다. 우포늪은 따로 연재할 예정이다.


#창녕 송현동석불좌상#척화비#척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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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구석진 곳에 우리문화를 찾아서 알리고 문화관련 행사를 좀 더 대중에게 보급하고자 하며 앞으로 우리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 나아가려고 합니다. 괌심분야는 역사유적, 석조조형물과 민속,고건축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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