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32개월, 16개월된 두 아이의 엄마이자 주부입니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정과 관련하여 뉴스와 각종 시사프로그램 그리고 인터넷을 접하며 참으로 많이 화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면 그래도 바로 잡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오히려 더 큰 분노와 좌절을 안겨 주었습니다. 더 이상 집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남편에게 다함께 가자고 하였더니 남편은 뜻은 같이 하지만 아이들이 다칠까봐 걱정 된다며 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말 다쳐야 한다면 전 지금 잠깐 다치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이 상태로 쇠고기와 들어와서 몇십 년 후 우리 아이가 아니, 우리 이웃 중 다른 누군가가 광우병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게 아니냐며 말입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 아이들이 그때 부모님은 뭐 하셨냐고 묻는다면, 그때 부끄럽지 않고 떳떳할 수 있도록 우리가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애썼다며 자신있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 건으로 남편과 말다툼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하게 되었고 저는 드디어 큰 애만 데리고 지난 달 10일 집회에 처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뭐랄까, 커다란 희망의 불씨를 다시 한 번 피울 수 있었습니다.
80세는 넘어 보이는 어르신부터 가족들이 다함께 참석한 거며, 중고등 학생, 일반 직장인들 등 정말이지 연령과 직종과 관계없이 뜻을 같이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보고 그나마 심적으로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집이 일산이라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중간역인 구파발에서 마지막 열차라고 하여, 잠들어 있던 아이를 업고 내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니 밤 12시가 훨씬 넘어 새벽 1시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잠들어 있는 아이에게 참으로 많이 미안하였습니다.
전 그래도 장관 고시만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29일 장관 고시를 하는 것을 지켜 보며 다시 한 번 울컥했습니다. 아예 눈물이 주룩 주룩 나왔습니다. 남편에서 전화를 해서 정말이지 못 살겠다고 했더니, 남편도 이내 결심을 했는지 이번주에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 31일 참석하기로 했고 큰 아이는 콧물이 나고 열도 있었지만 이것 저것 상황을 고려할 수 없는 처지라 다함께 참석했습니다.
자동차를 세종문화회관 뒤쪽에다가 주차를 하고 서울시청 쪽을 향해 가는데 이미 전경차들이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전경들 얼굴을 보니 다들 앳되어 보였습니다.
저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자식인데… 하는 생각을 하니 또 와락 눈물이 나오려 하데요. 작은 애는 유모차에 태우고 큰 애는 아빠가 업고 그렇게 가는데 이미 시청 앞쪽 도로를 전경차가 빼곡히 막고 있어서, 전경들 사이와 버스 사이를 유모차를 끌고 간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였습니다. 일부 전경들이 유모차가 버스에 부딪힐까봐 '버스 조심하십시요!' 하고 내뱉는 말이 들려, "네, 고맙습니다!" 하고 답해 주었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 오니 그때 시간은 벌써 오후 7시가 훌쩍 넘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자리가 없었습니다. 시청 앞쪽 화단 위의 잔디가 있는 곳에 무궁화 나무 사이로 공간이 있다며 남편과 전 아이들을 데리고 그 위에서 온 사람들을 그나마 좀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눈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빼곡했고, 공간이 부족해서 일부 사람들은 청계광장 쪽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전경차들만 빼곡히 막아 놓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더 많은 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점점 어두워지자 맞은편 플라자호텔의 밝은 불빛 아래 여유롭게 앉아 담소를 나누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뭐랄까! 그 사람들은 왠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같이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직업상 업무차 일을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족 단위로 앉아 있는 모습도 눈에 많이 들어 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큰아이는 추운지 점점 콧물이 많이 나오고 재채기도 심하게 하더군요. 윗옷을 더 입혀 주고 밤 9시가 넘어서 이제 거리로 나서는데 우리도 함께 했습니다. 명동을 지나 종로를 지나 경복궁 방향 채 못 가서 선발대 쪽에서 막혔습니다. 시간은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서 남편은 이제 집에 가야 겠다고 했고, 저는 아직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그러자고 동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더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옆 샛길로 빠져 가는 것을 보고 무작정 이리 저리 따라 갔는데 가는곳 마다 이미 전경차들이 사람 한 사람도 못 빠져나갈 정도로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종로구청이 보였고 그 옆에 조그만 경찰서가 보여서 큰애가 "오줌 마려워요!" 하는 소리에 경찰서 화장실이라도 이용하려고 경찰서 문을 열었는데, 환하게 밝혀진 경찰서 안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문은 '꼬~옥' 잠겨 있었습니다.
그 옆에도 전경차 두 대가 또 막아놓고 있었고 그 옆으로 20~30여 명의 전경이 서 있었습니다. 일부 시민들이 집으로 가야 하는데 이렇게 못 가게 막아 놓으면 도대체 어떻게 집으로 가라는 말이냐며 항의 하기도 했습니다.
종로구청 앞 정문도 잠가 놓았는데 경비 아저씨한테 "화장실 좀 이용할 수 없을까요?" 부탁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이내, "화장실만 이용하셔야 합니다!" 하는 답변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가 급한 용무는 일단 마칠 수 있었지만 도무지 집으로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얼마쯤 돌았을까 다시 도착한 곳은 청계광장이었고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지쳐서 잠든 큰애를 계속 업고 와서인지 다리가 너무나 아파서 계속해서 걸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거리의 바닥에 주저 앉아 큰아이의 이마를 만져 보니 열이 많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날카롭게 무엇인가 찌른 것처럼 아파 오며 아이에게 미안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물을 참았습니다.
입었던 옷을 벗어서 작은 아이와 큰 아이에게 더 덮어 주고 자동차로 다시 가려했지만 가는 길마다 전경차로 막혀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전경차 사이에 여유 있는 공간을 발견해서 그 사이로 헤집고 나오니 뻥 뚫린 대로였고, 저 멀리 시위대 앞 깃발이 나부끼는 게 보였습니다. 이순신 동상이 보이는데, 마치 '나를 따르라!' 하며 커다란 외침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겨우 겨우 자동차에 도착했고 자동차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내다 보며 다리를 주무르며 향한 시간은 새벽 0시 30분. 라디오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 중인 사람들을 향해서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으며 강경진압이 시작 되었다는 방송을 들었습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절한 외침을 몰라주는 정부가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그 자리에 끝까지 함께 해주지 못해 미안했고,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방패와 물대포를 행사하는 것을 보며
울분을 금치 못한 새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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