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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당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과 청계천 그리고 광화문 일대에 '난장'이 섰다.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저마다 '깃발'을 들고 나와 연일 '좌판'을 벌이고 있다. 21년 만에 다시 보는 '난장'이다.

 

87년 6월 당시 1년차 기자로 '6월항쟁'을 취재했던 필자는 지난 주말 21년만에 다시 광장이 된 태평로에 섰다. 정부에 '고시 철회'를 요구해 대통령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미국과의 '재협상'을 요구해 국제질서마저 위협하는 '난장'의 '배후'를 찾기 위해서였다.

 

일단 현장 분위기는 한마디로 격세지감이다. 21년 전에는 경찰의 불신검문과 전투경찰의 벽을 뚫고 여기저기 난무한 최루탄과 '지랄탄'을 피해가며 어렵게 태평로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쉽게 태평로에 진입했다. 경찰이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청와대로 행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찌감치 전경버스로 방어벽을 만들어 광화문 4거리 일대를 차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1987년 '아비규환'에서 2008년 '축제의 장'으로

 

87년 6월 광화문 일대는 연일 '아비규환'이었다. 시청 앞에서 대오를 형성해 광화문 4거리에 이르는 태평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경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도 지랄탄을 쏘아대면 순식간에 근처의 골목으로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거리에 남은 것은 온통 벗겨진 구두와 신발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친절한' 경찰 덕분에 촛불문화제에 참석하려는 시민들이 '해방구'가 된 청계천 입구에서 시청 주변에 이르는 '차 없는 거리'에서 전경버스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느라 바쁘다. 시민들의 얼굴은 '언제 우리가 이렇게 태평한 대로에서 여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는 투다.

 

서울광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각종 정치사회 단체와 각 대학 학생회와 '한국대학생연합'이 들고 나온 '깃발 숲'이 울창하다. 21년 전이나 비슷한 양상이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장인 '아고라'와 수많은 동맹카페의 깃발이 서울광장에서 나부낀 점이다.

 

또 87년에는 20대 대학생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깃발을 들고 '넥타이 부대'가 가세했다. 지금은 10대들이 불을 붙인 '고시철회'의 깃발이 20~40대로 옮겨 붙으면서 '이명박은 물러나라'는 정치구호로 확산되고 있다.

 

거리 한 쪽에서는 10대 여학생들이 즉석에서 '이명박 반대' '다함께 모이세요' 같은 구호를 적은 종이팻말을 만들고 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쥐박이에게는 쥐약'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고, 그 옆에는 '쥐를 잡자 쥐를 잡자, 찍찍찍'이라는 구호를 적은 푯말을 목에 건 아이가 태극기를 흔들며 집회장을 돌아다닌다. 한 시민은 여기저기 돌면서 열심히 '쥐약'을 팔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들"

 

차단벽으로 이용된 전경버스에는 한달 동안의 촛불집회에도 국민의 목소리를 '쇠귀에 경읽기'로 대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법주차 스티커와 분노가 담긴 쪽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명박 OUT' '배후는 너야' '미친 소, 미친 교육' '미친 소, 미친 운하, 미친 정부' '쥐를 잡자' '수도, 전기, 철도, 의료 우리 거다, 민영화를 거부한다', '조중동 경제신문 보지 마요'

 

아빠의 손을 잡고 나온 한 초등학생은 "우리집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합니다"라고 적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있다. 한 청년은 "명박아, 주말 데이트도 포기했다. 넌 이제 죽었다"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일군의 자전거 동호인들은 2002년 서울 월드컵의 '붉은악마'들이 광장에 쓰고 나온 뿔 달린 모자를 쓰고 나왔다.

 

친구와 함께 온 한 20대 여성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니 사실 좀 무섭다. 군중심리라는 게 있으니까"라고 했다. 아들을 무등 태운 한 30대 아버지는 "이거 뭐, 축제네"라고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원당에서 아내와 세 딸을 데리고 집회에 참여했다는 김아무개씨는 "나는 촛불문화제에 자주 참석했지만 가족을 데리고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며 "정부가 고시를 철회하고 미국과 재협상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고 못박았다.

 

젊은 여성들은 유모차를 끌고 나와 이 정부를 맘껏 조롱했다. 유모차에 탄 아이의 손에 쥔 풍선에는 "내가 배후자에요"라고 써 있다. '아고라'의 한 회원은 "우리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들이다"고 외쳤다.

 

'축제'를 즐기는 '펀'(fun)한 '디지털 게릴라'들

 

21년 전에도 그랬다. 그때 우리 국민은 '6월항쟁'으로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후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사회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인권 선진국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 그때는 독재정권에 맞선 시위 참여자들이 '비장감'으로 충만했지만, 지금은 가족의 건강과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연인의 손을 잡고 나온 시민들이 '축제'를 즐기는 중이다.

 

그때 청년·학생이었던 386 세대가 지금은 아빠·엄마가 되어 10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것이다. 이들은 지금 세대를 뛰어넘어 한 목소리로 "배후세력은 부지런한 쥐"라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명박은 물러나라"고 외치고 있다.

 

시위 양상도 확실히 다르다. 그때는 최고 100만 인파가 운집했지만, 지금은 10만 인파다. 숫자가 10만이건, 100만이건 구별은 무의미하다. 그때는 상당수는 동원되고 조직화된 대중이었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신명이 나서 참여한 대중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 마디로 '펀'(fun)한 '디지털 게릴라'들이다.

 

동원되고 조직화된 대중은 배후나 리더를 검거하면 무력화되지만 '펀'한 디지털 게릴라들은 배후나 리더가 없으니 경찰도 속수무책이다. 그 많은 시위 참여자들을 '아고라' 회원이고 '안티MB 카페'의 회원이라고 검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배후'는 서울광장과 청계천 '멍석' 깔아준 2MB 대통령

 

민주화 이전과 민주화 이후의 차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민주화와 탈권위의 세례를 받은 국민은 20년 전의 국민이 아니다. 그런데 정부와 공권력은 '잃어버린 10년'을 되뇌며 20년 전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2MB 대통령이 이끄는 '아날로그 정부'가 '디지털 국민의식'을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화지체'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노래로 부르는 '펀'한 디지털 게릴라들에게 권력은 더 이상 권위의 대상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누구도 조직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스스로 '배후'라며 연일 서울광장에 모이고 있다. 이들 디지털 게릴라들은 화염병 대신 촛불을 들었지만, 경찰은 비폭력 시위대를 여전히 곤봉으로 후려치고 물대포로 쏘고 방패로 찍어 누른다.

 

그럴수록 광우병 쇠고기로 촉발된 고시 철회 요구를 무시하면서 벌어진 '난장'은 판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폭력으로 얼룩진 곳곳에서 형성된 물줄기는 거대한 '민심의 대운하'를 만들어 한미FTA와 한반도대운하 그리고 '조중동'까지 한꺼번에 휩쓸어갈 태세다. 그런 점에서 쇠고기 정국의 '배후'는 바로 2MB 대통령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에 서울광장과 청계천을 만들어 시민들이 '난장'을 벌일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는 2MB의 단순 공안논리에 따르면, 20년만에 이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축제 속에서 '난장'을 벌일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 이 대통령이 배후인 것이다.

 

 

 

국민에게 항복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기업인 출신의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CEO 대통령'으로 통한다. 이 대통령이 좋아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고, 종업원이자 주주이다. 소비자이자 주주인 국민은 지금 뽑은 지 100일밖에 안된 대한민국 CEO를 '리콜'(반품요청)하고 있다.

 

<인조실록>과 <남한산성>에서처럼 인조가 용골대를 따라 삼전도에 가서 가시나무를 깔고 앉아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절을 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는 것은 수치이지만 국민에게 항복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임기가 1년도 안남은 미국 대통령에게 검역주권을 내주는 것이 수치이지, 미 대통령에게 "건강과 자존심을 챙기는 우리나라 국민들 때문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며 "어쩔 수 없으니 재협상을 하자"고 하는 것은 수치가 아니다.

 

국민에게 항복한다고 해서 반드시 대통령 권위가 손상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국민은 이 대통령이 '잃어버린 10년'을 뛰어넘어 '격세유전'을 해서라도 닮고 싶어하는 노태우씨도 6·29항복 선언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줬다.

 

6월 2일자 <한겨레>의 이 대통령 취임 100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통령 남은 임기 동안 앞으로의 국정운영 평가에 대한 생각'을 묻는 설문에 45.2%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국민은 현재 상황을 '개탄'하면서도, 아직 100일밖에 안된 정부이기에 앞으로 잘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이명박 퇴임시계'가 등장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대통령에게는 만회할 시간이 1725일이나 남아 있다는 의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고시를 철회하고 재협상에 나서는 길뿐이다. 국민을 이기는 정부는 지구상에 없다.


#2MB#디지털 게릴라#촛불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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