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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 호스피스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마지막 <인생수업>.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 호스피스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마지막 <인생수업>. ⓒ 이레
2006년 6월에 초판이 발행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수업>(류시와 옮김, 이레 펴냄)은 1년이 지난 2007년 6월 72쇄나 발행됐다. 나는 놀란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이토록 찾아 헤매는 걸까.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길을 잃었을까.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이 책을 읽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서 이 글을 쓴다. 이 텅 빈 공간을 나 혼자 채우고 있다는 충만감, 그리고 편안함. 조금은 여유로운 나를 깨우는 건 쇠고기 고시를 철회하라며 연일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함성이다.

 

서울 시청 인근에 자리한 나의 사무실에서는 서울 광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시위대의 함성은 멀리 산을 타고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사무실 창문을 두드린다. 저들은 살아 있다. 저들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는 밤, 광장에 모여 우매한 관리들과 세상을 향해 소리치며 지금-여기(here & now)에 '존재'한다.

 

<인생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는 '호스피스'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한 평생을 바쳐왔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돕는 일임을 이제 조금 알겠다. 

 

이 책의 2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랑 없이 여행하지 말라(삶이라는 이 여행을 사랑 없이는 하지 마)'는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고, 여행에 꼭 챙겨야 할 여비는 사랑이라고 일깨워준다.

 

찢어지고 요란한 색상의 옷만 골라 입는 아이가 맘에 들지 않는 엄마는, 아이가 내일 죽어서 장례식을 치르는 상상을 해본다. 아이를 관 속에 뉘일 때 과연 자신이 좋아하는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힐까.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엔 결국 아이가 좋아하던 것을 입힐 거라는 각성이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오빠, 나는 그가 미웠다

 

이 구절은 나의 경험도 떠올려준다. 언니처럼 의지했던 작은 오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스스로' 자신의 생을 놓아 버린 오빠를 원망하며 10여 년을 고통과 분노 속에 보냈다. 나는 이미 죽어 버린 오빠를 용서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빠를 벌 주고 있었다. 오빠를 만나러 산에 오르는 발걸음마다 마다에 '네가 밉다'를 새겼다.

 

오빠는 살아 있을 때 담배를 즐겼는데, 나는 담배가 얼마나 해로운가에 대해 엄마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그런 내가 오빠를 만나러 산에 갈 때마다 담배를 챙겨가고, 무덤 앞에 앉아 이런 저런 하소연을 하는 중에는 수도 없이 담배에 불을 붙여 무덤 위에 향처럼 지폈다.

 

그런 것이로구나. 우리는 살아생전 그가, 그녀가 좋아하던 것을 기억한다. 제상 위에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고기에 젓가락을 올리고, 엄마가 즐겨 드셨던 수박을 올린다. 그가, 그녀가 '살아'있을 때 몇 번이나 수박을 사들고 집에 갔을까. 너무 아까운 '현재'.

 

성경의 실존(?) 인물 무드셀라는 969년을 살았다 한다. 우린 고작해야 백년? 그런데도 영원 불사할 것처럼 오만하게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 내게 맡겨진 선물일 뿐, 나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누군가의 소유도 될 수 없다. 어떨 땐 자신조차도 버거워 쩔쩔 맨다. "배울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스승이 나타난다"는 것처럼, 이 짧고, 황홀한, 우연 같은 생을 온전히 누리라는 생의 명령(생명)을 준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서 나를 대우해 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아닌 척' 사람들을 기만해 왔다. 관계 앞에서 그토록 여리고 무력한 나를 숨기려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아플 때 "아파"라고 말하고, 슬플 때 "슬프다"고 표현할 수 있는 정직함 앞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이 물처럼 녹아내린다(그가 '아프게' 자신의 허울을 벗어던졌을 때, 나는 물이 되었다).

 

이젠 환부를 들여다 보는 용기도 생겼다

 

이 세상이 하나의 학교라면, 상실과 이별은 그 학교의 주요 과목이란다. 내가 수강한 과목은, 두려움, 수치심, 나약함, 곤궁, 옹졸, 허위, 과장, 우울, 무력, 패배, 관계. 이 많은 과목에서 대부분 낙제점을 받아왔고, 재수강은 엄두도 못 냈다.

 

관계학에선 늘 '연민으로 시작해 죄책감'으로 끝나는 패턴 때문에 신경증 환자처럼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비싼 수업료에는 대가가 있는 것인지,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나는 성장도 했다.

 

환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용기도 생겼고, <인생수업> 같은 책을 읽을 때마다 더디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어느 부분에 '가장 고통스런 상실을 겪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 된다'는 말은 내면 어딘가를 건드린다.

 

삶은 깨어지기 쉬운 지반 위에 존재하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위태롭다. 죄의식은 우리를 가장 어두운 내면에 묶어둔다. 그것은 우리를 나약함, 수치심, 냉정함과 연결하고 우리의 부정적인 부분은 그 죄의식을 먹고 자란다. 수치심과 죄의식은 깊이 연결돼 있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는 죄의식을 알지 못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놓는 마지막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말했다.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간이 원죄를 벗고, 벗어 던진 죄의식을 돌아보지 말고, 자신의 아버지가 인간을 이 땅에 보낸 의미를 되새겨보길 권한다.

 

인간의 단 하나의 과제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이 지상과제를 인간이 서로 행할 때,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 안에 구원이 있다. 저자인 그녀들이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72쇄 돌파 = 단순 베스트셀러'라는 내 안에 그릇된 도식은 가장 단순하고, 진실한 '사랑의 현시'라는 행위 앞에 초라해졌다. 진실은 힘이 세다.


인생 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외 지음, 류시화 옮김, 이레(2006)


#인생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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