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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공부하려고 등대지기 지원

 

전남 진도군 조도면 하조도 항로 표지 관리소 등대에 비치던 희미한 빛줄기가 사라지자, 바다는 꽃단장을 시작한다. 등대 너머 동쪽 하늘이 새색시 볼처럼 발그레진다. 수줍은 듯 태양이 올라오더니 이내 등대 뒤로 숨어 버린다.

 

등대는 마치 새색시의 신방 같다. 등대지킴이는 아직 기척이 없다. 어쩌면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아침 해를 위해 일부러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철모르는 나그네만 섬그늘에 숨어 조심스레 떠오르는 해를 지켜보고 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관광객들의 기척에 소장이 밖으로 나왔다. 등대 뒤에 숨은 해님도 그제야 얼굴을 내민다. 발그레한 미소에 정신이 다 혼미해진다. 소장은 금년 6월 이곳 하조도에서 등대 인생을 마무리 한다.

 

"날씨가 좋으면 추자도는 물론 제주 한라산까지 보이는 명소에서 마지막 근무를 하게 된 것이 한없이 기쁘다"라는 김영철 소장. 그가 등대지킴이(항로표지관리원)로 나선 것은 1969년 6월이다. 햇수로 40년이다. 김씨는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입학만 하고 군에 입대를 했다. 제대 후 조용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등대에 취직해 책을 싸들고 들어왔다. 그렇게 받은 첫 발령지가 홍도다.

 

 

풍선배와 TV 그리고 등대

 
지금은 연 15만 여 명이 찾는 관광명소지만 당시 홍도는 토요일에 배가 들어왔다 일요일에

나가는 낙도(落島)였다. 하긴 당시 어느 섬이 낙도가 아니었겠는가. 등대는 낙도에서 다시 한참을 가야 하는 '섬 속의 섬'이었다. 그 중 손에 꼽을 만한 곳이 '맹골죽도'였다.

 

홍도는 기계배라도 있었지만 죽도에는 모두 돛을 단 풍선배였다. 새벽밥을 먹고 목포에서 출발해 어두워져서야 '서거 차도'에 도착했다. 다시 며칠을 기다려 일을 보기 위해 나온 주민의 어장배를 얻어 타고 저녁 8시에 출발해 새벽 4시에 도착했다.

 

등대는 불만 밝히는 것이 아니다. 섬 사람들의 유일한 문화생활인 TV를 시청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섬에 웬 TV냐 하겠지만, 등대 붉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가전 제품 혜택을 보는 곳이었다.

 

맹골죽도 등대에도 1970년대 초반 TV가 들어왔다. 당시 인기 드라마 '여로', '파도'는 섬사람들에게도 유일한 희망이었다. 저녁을 마친 주민들은 초등학교에서 의자를 가지고 등대 마당으로 모였다.

 

김씨는 등대지기 40년 인생에 두 명의 목숨을 건졌다. 조류가 빨라 섬광 주기가 빠른 목포구 등대에 근무할 때다. 눈이 내리는 정월, 거친 하늬바람을 타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옷이 모두 찢겨지고 상처투성인 사람이 굴이 다닥다닥 붙은 바위를 간신히 붙잡고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정월 초사흘 출어고사를 지내며 과음한 후 고물에서 일을 보다 배가 출발하자 바다에 빠졌던 것이다.

 

또 완도에서 출항해 조업하다 기계고장을 일으켜 예닐곱 시간을 표류한 어부를 구하기도 했다.

 

 

배고픔보다 외로움보다 더 힘든 일은?

 

김씨의 40년 등대생활에 가장 힘들었던 곳은 칠발도 등대 생활이었다. 이 등대는 1905년 불을 밝힌 서남해 연안항로와 동남아항로가 나뉘는 바위섬 위에 설치되어 있다. 바다 철새  서식지로 섬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칠발도는 집도 있고 맷돌을 비롯한 도구들도 있지만 생필품을 공급하는 표지선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한 섬이다. 식량이 떨어지면 밥 대신 죽을 쒀 식량을 늘려 먹었다. 이마저 떨어지면 가을걷이 중 빠뜨린 호박을 찾아 죽을 쒀 끼니를 때웠다.

 

당시 고구마는 고급 식사였다. 태풍으로 표지선 도착이 늦어져 식량을 구하러 기름통을 뗏목처럼 묶고 나가다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땔감이 없는 섬에서는 소똥을 말려 불을 지피기도 했다.

 

김씨를 힘들게 한 것은 배고픔이 아니었다. 월급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낮에 기계를 고치고 밤에 불빛을 지키는 힘든 일도 아니었다. 외로움과 고독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다. '등대놈들'이라고 놀리는 소리도 별 것 아니었다.

 

정말 참을 수 없던 것은 등대에서 아이들이 아플 때였다. 둘째아이가 감기로 시작해 폐렴을 거쳐 경기를 일으켰을 때 가장 힘들었다. 오직 일제가 남기고 간 다다미방에서 체온을 나눠주며 견뎌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매력적인 문화관광자원 등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등대를 비롯한 항로 표지 관리소 시설들은 오래돼 교체되고 있다. 종합개발사업으로 모두 헐리고 새로 지어지기도 했다. 김씨는 개발과정에 일제강점기 유산들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아픈 역사도 오롯이 후세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등대는 동경과 낭만의 대상이지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갖가지 공문을 제시해야 하는 '접근금지' 구역이었다. 등대는 불을 밝히는 일을 넘어 매력적인 관광자원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김씨가 근무하는 하조도등대도 일 년이면 2만여 명이 찾고 있다. 김씨는 등대해설사도 겸하고 있다. 좁은 오솔길을 지나 동백숲 나와 숨어있던 등대를 발견하는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곳에 공원도 만들어지고 버스가 문 앞까지 들어간다. 전봇대를 따라 걷던 '등대로 가는 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못내 아쉬워 할 것이다.

 

김씨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감사하는 것이 있다면 좋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건강하고 반듯하게 자라준 자식들'이다. 아마도 매일 불을 밝히며 기도하는 김씨의 간절함 때문이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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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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