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이 격전 벌였던 황화산성황화산성은 충청남도 논산 외곽에 있는 이름 없는 산성이다. 근사하게 석축을 쌓아 올린 성도 아니요, 멋진 경치를 자랑하는 산속에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백제 30대 의자왕이 이곳에다 이궁을 짓고 황화대라는 평평한 바위에 앉아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본래 '갈라성'이라 부르던 성 이름도 황화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엔 이 산에 봉수대를 두었다. 그 때문에 산 이름도 황화산 외에 봉화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황화산성은 우금치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관군이 싸움을 벌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황화산성은 논산 시내에서 강경 방향으로 약 5리 가량 떨어진 그리 높지 않은 야산에 있다. 강경 나들이 길에 매번 스쳐지나긴 했지만, 한 번도 직접 올라간 적이 없다. 오늘(6월 2일)은 황화산성을 찾아 나섰다. 국도 왼쪽, 간이골프장 쪽에서 산을 올라간다. 산길 옆엔 개망초와 고마리가 무리지어 살고 있다. 마치 무명용사의 넋처럼 하얀 개망초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다.
십여 분이나 걸었을까. 마침내 산성 토축 위에 올라선다. 아마도 이곳이 예전 서문(西門)이 있던 자리였던 모양이다.
외세와 싸운 자리엔 외래식물만 무성하고
황화산성은 산봉우리와 계곡을 따라 쌓은 백제 산성이다. 아래는 돌로 쌓았고 위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근래에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이는 흙벽 위로 폭 1m가 넘는 길이 나있다. 성의 둘레가 약 840m 가량이라고 하니 그리 큰 성은 아니다.
서벽에서 남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어간다. 성 안에는 동쪽을 제외하고 폭이 10m 이상 되는 도랑처럼 파서 돌린 해자가 전체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나 육안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서벽 아래엔 꽤나 너른 평지가 있다.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던 군창터와 건물터가 있던 곳으로 추측되는 곳이다. 물론 원형과 사각형의 초석은 자욱한 풀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선 백제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토기류와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산성이 오랜 세월 동안 사용 가치를 잃지 않았다는 얘기다.
토축 위로 난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숲의 생태가 나그네의 눈길을 계속 붙든다. 외래식물인 미국자리공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 아마 머지않아 완전히 초지식물을 몰아내고 말 것이다. 게다가 인공 식재한 벚나무들까지 줄지어 섰다. 이곳은 비록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명색이 갑오농민전쟁 사적지가 아닌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좀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좋으련만….
동벽 근처에 이르자, 거의 평탄하게 전개되던 길이 별안간 경사가 뚝 떨어지더니 꽤 가파른 비탈길이 된다. 서남쪽과 서북쪽 지형이 훨씬 높은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넋처럼 아름답고 푸른 대숲
성의 동쪽엔 꽤나 너른 평지가 있다. 평지로 내려서자 보명사라는 아주 소박한 절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러고 보면 황화산성은 공주 공산성과 너무나 흡사하게 생겼다. 물론 크기야 훨씬 작긴 하지만. 서북·서남쪽이 높은 지형도 그렇거니와 동쪽 평지에 절이 있는 점, 궁터가 있다는 점도 같다. 석축이 아닌 토축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절 주변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절 속 같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다. 논산문화원 홈페이지 자료는 "보명사는 1934년에 창건하였다"라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신앙 관음기도법>(김현준 저·도서출판 효림 간)이라는 책 속에는 일제 말 지명이라는 스님이 등화동에 사는 강태희라는 분을 찾아와 강씨 문중 산에 보명사를 짓도록 해준 것에 감사를 드린 사실이 서술돼 있다.
그는 선대에는 한 해에 수천 석을 추수하던 집안이었으나 차츰 몰락하여 산비탈의 오두막을 빌려 살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깊은 병을 앓기까지 했다. 스님은 강태희라는 분에게 병을 낫기 위한 방편으로 관음 기도를 드릴 것을 권한다. 이로 미루어 이 절을 지은 사람이 지명 스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무예에 출중했던 을리나라는 은진 담노의 딸이 목판을 맨 채 쓰러져 있던 스님을 구해 주었는데 그 스님의 말에 따라 이곳에다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리다가 죽었다는 이 지방에 전해오는 전설로 미루어 절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는데 잠시 폐사를 겪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곳은 단순히 그런 전설의 땅으로만 남을 수 없는 땅이다. 1894년 11월 15일, 이곳에선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쫓기던 동학농민군이 숨돌릴 새 없이 추격해 온 일본군·관군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다.
우금치에서 쫓겨온 농민군과 공주 전투를 지원하려고 달려오다 패배 소식을 듣게 된 여산 접주 최난선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천여 명은 힘을 합쳐 밀려드는 적에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막강한 일군의 화력을 당해 낼 수 없었던 농민군은 마침내 이곳에서조차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외세 배척을 외치며 기세 좋게 출발했던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보명사 뒤편에는 아름답고 푸른 대숲이 넓게 펼쳐져 있다. 삐죽삐죽 솟은 대나무들이 마치 그 당시 농민군들이 들고 있던 죽창 같다. 푸른 대숲에서 솔솔 비극의 냄새가 풍겨오는 듯하다. 광주의 시인 문병란의 시 '죽순밭에서'가 떠오른다.
죽순밭에는 흥건히 고이는 울음이 흐른다 죽순밭에는 낭자히 고인 달빛이 흐른다. 무엇인가 뿜고 싶은 가슴들이 무엇인가 뽑아올리고 싶은 욕망들이 쑥쑥 솟아오른다 도란도란 속삭인다. 왕대 참대 곧은 줄기 다투어 뽑아올리는 대나무밭 나도 한 그루 대나무 되어 서면 내 가슴 속에서 빠드득빠드득 뽑아오르는 소리 뾰쪽뾰쪽 솟아오르는 울음 소리 - 문병란 시 '죽순밭에서' 일부 감상을 접고 절을 나와서 다시 성곽 길로 접어들려던 찰나. 노승 한 분이 요사의 문을 열고 빠끔이 내다본다. 합장으로 인사드리고 나서 잠시 절의 역사라든가 동학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스님은 동학군 이야기나 의자왕의 궁이었다는 성의 역사에 대해 매우 해박하다.
"어찌 그리 잘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에 오래 있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노라"고 자신을 낮춘다. 스님은 이 절집의 역사가 백 년쯤 되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어디서 득도하셨느냐?"고 여쭈었더니 '해인사 중암에서 지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노라"고 대답하신다.
지월 스님(1911∼1973)은 해인총림에서 '주리반특가'라 불리시던 분이다. 부처의 여러 제자 중 가장 둔하고 어리석었던 주리반특가. 그러나 그는 묵묵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십륙아라한 중 한 명이 되었다. 서슬 퍼런 선기나 출중한 면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갈고 닦은 생애가 닮았다 해서 '주리반특가'라 했던 것이다. "법명이라도 알려주시라"고 했더니 그냥 "보명사 스님이라 불러달라"고 하신다.
스님과 헤어져 다시 성길을 따라 걷는다. 동벽에서 북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북쪽에 있는 논산 시내가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다. 어디선가 진한 밤꽃 향기가 풍긴다. 아아, 벌써 6월인가. 바라보니, 성곽 옆에 꽤나 너른 밤나무 밭이 있다.
이윽고 산의 정상, 북쪽 표지석 근처에 닿는다. 논산시내뿐 아니라 강경읍·부여를 포함한 호남 평야가 한눈에 바라다보인다. 그러므로 이곳이 아주 옛적부터 군사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터.
표지석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 조금 걸어가자, 봉수대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이곳에 봉수대를 둔 것은 조선시대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쪽에 있는 강경 채운산 봉수를 받아 북쪽 계룡산 근처 노성산 봉수대에 넘겨줬을 것이다. 봉수대 안에는 작년 연말에 치렀던 봉화제의 흔적인가. 타다만 장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봉화대 동쪽으로 난 좁은 산길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간다. 사람의 발자국이 전혀 없는 여름 풀숲을 지난다. 길이 뱀을 무서워하는 날 잔뜩 긴장 시킨다.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
산 아래 평지로 내려서자, 논산시에서 1994년 12월에 건립한 충령탑이 나그네를 반긴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엔 순국선열과 전몰군경 921위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원래 관촉사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나 낡은 까닭에 이곳에 충령탑을 건립하고 모신 것이다.
충령탑 전면엔 부조가 새겨져 있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 구 황토현기념관의 전봉준상 부조와 거의 흡사한 형태다. 어찌 보면 들라크루아의 명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사당에 봉안하고 있는 전몰군경 위패와는 좀처럼 연관짓기 어려운 내용이 아닌가 싶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이런 류의 별로 감동 없는 구조물이 널려 있다. 최소한의 미적 요소도 갖추지 못한…. 가히 돌의 수난시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충령탑 옆에는 충령사라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다가올 현충일 행사를 준비하시는 걸까. 사당 안에선 할머니들이 몹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탑 가까이 서 있던 한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다. 할아버지께서 6·25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혼인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징병돼 가신 후 유명을 달리 하셨던 것이다. 지상엔 아들 하나만 딸랑 떨궈둔 채. 지금 세상 같으면 재혼이라도 했을 테지만, 그때는 그런 엄두란 감히 내지도 못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못 쓸쓸하다.
어찌됐건 이곳 봉화산 자락은 논산 사람들에겐 호국의 성지가 되어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대의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던 동학농민군과 동족상잔의 비극에 목숨을 바친 전몰 군경의 영혼이 함께 부르는 레퀴엠이 들릴 것만 같다.
이래저래 6월은 뜨거운 달이다.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살랐던 달이다. 백기완 선생의 시였던가. "뜨거운 것이 빛나던 때가 좋았다"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조금 걸어나와서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봉화산 산색(山色)이 매우 푸르다. 세상 어딘가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는 푸른 불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