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주변 풍경과 안 어울리는 '사립' 강원종합박물관

 

대금굴에서 차를 돌려 우리가 가기로 한 곳은 바로 동해 두타산이었다. 레일바이크와 대금굴은 우리 가족을 퇴짜 놓아도 산은 우리를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넉넉한 산의 품 아니겠는가. 비록 4개월 전에 다녀온 두타산이었지만, 5월의 옷으로 갈아입었을 두타산을 떠올리며 나는 차를 몰았다.

 

태백과 삼척의 갈림길을 지난 지 얼마나 됐을까. 창밖으로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와 화려함에 있어서 깊은 산 속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런 건물이었다. 한옥이라 함은 그 생김새도 생김새지만 주위 환경과 얼마나 조화롭냐가 매우 중요할 텐데 그 건물은 한옥의 기본을 망각한 채, 거만한 모습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 있었다. 뭐야, 이 건물은?

 

 

건물의 공식적 이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길목에 ‘강원종합박물관’이라는 표지판이 큼지막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강원종합박물관’ 위에 적힌 ‘사립’이라는 작은 글씨의 정체였다. 보통 도(道)의 이름이 붙은 박물관은 국립이나 공립으로서 그 지역의 역사를 나열하는 게 보통일 텐데, 누가 사립 박물관에 강원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 그리고 저 요란 벅적한 박물관에는 과연 무엇이 전시되어 있는 것일까?

 

어차피 두 번의 퇴짜 덕에 시간도 남는 터라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박물관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주차장 담장 옆에는 인도네시아 산이라고 표시된 나무 화석과 광주 무등산에서나 볼 수 있었던 주상절리가 전시되어 있었다. 자연사 박물관인가?

 

그러나 박물관에 대한 가벼운 호기심은 그 앞으로 다가갈수록 강한 의구심으로 바뀌어 갔다. 사립이다 보니 다른 박물관과 비교하여 너무 비싼 관람료도 관람료였지만, 무엇보다 나를 뜨악하게 만든 것은 박물관 앞 곳곳에 서 있는 검은 양복에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이었다.

 

 

VIP가 온 것 같지는 않고 박물관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더운 날 저리 정장을 입고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복장과 움직임에 나는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박물관 입구 옆에는 또 다른 입구가 있었는데 그 앞에는 관람객 출입금지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수련원 입구라는 설명과 함께. 설마 저 많은 요원(?)들이 이 수련원과 관련이 있는 건가? 도대체 이곳은 무엇을 위한 공간인데 ‘강원’이라는 공공적인 이름을 내걸고도 이렇게 엄격한 제한을 한단 말인가.

 

결국 나는 매표소 앞에 전시된 박물관 안내장 안에서 이 모든 바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이 박물관을 종단 대순진리회가 건립한 대진교육재단이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쩐지 그냥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싶더라니.

 

물론 모든 종교의 존재 의미는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세간의 평가처럼 대순진리회를 사이비라고 마냥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박물관이라는 공공의 목적을 표방했음에도 정체모를 사람들을 배치하거나 출입통제 구역을 운영함으로써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할 뿐이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대순진리회에 대한 편견은 이와 같은 폐쇄성 때문에 더욱 심화되는 것 아닌가.

 

우리 가족은 박물관을 관람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대순진리회에 대한 거부감보다 안내장에 기록된 박물관의 전시 내용 때문이었다. 공룡 뼈부터 시작해서 도자기, 금속공예, 세계 각국의 민속유물, 실내동굴과 종유석 전시장 등 안내장의 설명은 거창하고 유려했지만 도통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내용물 자체에 대한 무관심도 무관심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국가 아닌 종교단체가 수집해서 전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이었다.

 

이것도 퇴짜라면 자발적 퇴짜쯤 될까? 우리 가족은 박물관 앞에서 사진만 찍은 채, 아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결국 우리를 반겨줄 곳은 산밖에 없음이라.

 

5월 바닷가를 둘러싼 녹슨 철조망

 

두타산 가는 길에 들른 추암해수욕장. 이미 몇 번이고 갔었던 곳이지만, 한 번도 촛대바위를 보지 못했다는 동생과 부모님을 위한 발걸음이었다.

 

그곳은 비록 일출은 보지 못하더라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고, 그들 각자 모두 호쾌한 바닷가 풍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바닷가에 가면 발이라도 담그겠다던 동생 역시 아직 채 냉기를 버리지 못한 5월의 바다 앞에서 머뭇거리며 그 풍경들을 마음속에 담기 바빠 보였다. 아마도 이 풍경은 녀석의 붓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 날 것이다.

 

 

 

촛대바위의 작은 언덕을 내려오다 보니 바닷가 곳곳에는 말리기 위한 오징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어민들은 동해가 따뜻해지고, 철도 제 철이 아닌지라 오징어가 안 잡힌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의 눈으로는 그 오징어만으로도 마냥 배가 불러왔다. 저렇게 많이 잡아먹어도 오징어 씨가 마르지 않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리고 있는 오징어보다 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역시 바닷가 주위를 삥 둘러 에워싸고 있는 녹슨 철조망이었다. 3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 역시도 그 자리를 지키는 철조망. 문제는 그 풍경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21세를 살아가고 있지만 관성에 사로잡혀 철조망 섞인 풍경에 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

 

물론 내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있는, 다 녹슬고 허물어진 철조망을 보고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빈틈이 보이면 그 구시대적 유물들을 가지고 다시 시대를 되돌리려 하는 세력이 아직 존재함을 우리는 현재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이미 있으나마나한 우리들의 여러 철조망을 그럼에도 철거해야하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두타산으로

 

반건조 오징어 한 축을 사서 질겅질겅 씹으며 우리 식구들은 다시 두타산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두타산이 처음이라시며 기대하셨고, 예전에 산악회를 따라 마냥 오르내리기 바쁘셨다는 아버지는 이제야 두타산을 다시 찬찬히 볼 수 있겠다며 눈앞에 펼쳐질 비경을 기대하셨다.

이윽고 두타산. 산이 워낙에 깊은지라 5월임에도 두타산은 아직 봄을 넘기지 못한 채 여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짙고 옅음이 어우러진 녹색의 향연. 비록 멋들어진 바위는 없어도 그 색감만으로도 두타산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더운 날씨 덕에 삼화사 밑의 무릉반석에는 벌써 많은 이들이 주저앉아 이른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올챙이를 잡겠다며 바위틈을 휘적거리고 있었으며,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나름의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자리가 되면 그 무릉반석에 앉아 심신을 달래려 했던 우리 가족은 그 번잡함에 다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일주문을 지나 도착한 삼화사는 다음 날 석가탄신일을 맞아 매우 분주했다. 여느 사찰들이 그렇듯이 대웅전 앞마당은 연등으로 꽉 채워졌으며, 많은 이들이 그 옆에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 바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은 조용한 산사와도 인연이 되지 않는바 또 다시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다들 등산을 생각하지 못했기에 준비는 부족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쌍폭포까지 오르자고 한 것이다.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무릉이라 했던가. 무성한 수풀로 가려져 있던 두타산의 비경이 1시간 쯤 걷자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두타산의 초입은 10년 전과 비교하면 꽤 많이 바뀌어 있었건만 그래도 두타산의 속살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쌍폭포는 근 10년 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한 겨울에 보았던 스산했던 쌍폭포와 달리,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의 쌍폭포는 시원했고 장쾌했다. 비록 그 안으로 들어가 직접 물세례를 맞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비경이었다.

 

그만 발걸음을 돌린다. 욕심 같아서는 조금 더 올라 밑의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갔던 바, 그건 분명한 욕심이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항상 산 앞에서는 겸손하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아버지의 '산론(山論)'은 어쩌면 나의 인격에 꽤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겸손과 끈기를 산을 통해 배웠다.

 

우리가 향한 곳은 다시 바닷가였다. 회가 있고 잘 곳이 있으면 어디가 되었든 오케이였다. 처음 우리는 주문진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이내 동해 묵호항으로 그 목적지를 변경했다. 요즘 휘발유 값이 얼마인데, 같은 바다에 어차피 같은 항구라면 모두 비슷하겠거니. 그러나 우리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묵호항도 꽤 큰 항구일 텐데 횟집이나 숙소 찾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경기 탓이려나? 어쨌든 우리는 그곳에서 회를 사먹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은 석가탄신일이었지만, 동해에서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또 얼마나 많은 차들이 꾸역꾸역 서울로 올라 갈 것인가. 새벽같이 식사를 하고 일찌감치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그냥 가기 아쉬워 고속도로가 아닌 삼척-태백-영월로 코스를 잡아 산천의 연녹색을 가슴 속에 담아보지만, 이미 귀로에 올라선 이상 그 아름다운 풍경을 고스란히 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도 5월을 고비로 모든 산천은 짙은 여름의 색으로 갈아입을 것이다. 연녹색을 다시 볼 수 있는 2009년의 봄을 잠시나마 꿈꾸어본다.


태그:#두타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