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짐승을 구분짓는 잣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 능력의 유무일 것이다. 기억과 기록, 전수, 그리고 반추와 해석으로 이어지는 이 능력은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문명을 쌓아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문명화된 삶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 ‘기록’을 둘러싼 싸움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국가 간, 민족 간, 집단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기록의 싸움’도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지켜보며 거대 단위의 기록 혹은 기억의 싸움을 지켜보던 우리는 최근, 우리 민족 내부의 기억과 기록을 둘러싼 싸움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3월 발간된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보면서 우리는 다시, 2008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가 연속기획 특강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를 마련한 이유다.
친일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반공과 경제성장을 국시로
첫 강의가 있던 5월 14일. 굴욕적인 한-미 쇠고기협상을 둘러싼 국민적 요구로서의 촛불들이 그날도 밝혀지고 있었고, 한홍구(성공회대) 교수는 “아니, 촛불집회 안 가시고 여기로들 다 오셨습니까?”라는 활기찬 질문과 함께 강의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자유주의의 빈곤’과 보수의 실종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극우 세력들은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처음부터 폭력으로 집권해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고, 친일에 대해선 가급적 입을 다문 채 반공·경제성장만을 두 축으로 나라를 운영해 왔다는 것이다.
그 극우세력이 집단적으로 충원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 집단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2004년 이후 본격화된 과거청산에 대한 극우세력의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결국 2005년 1월, 교과서포럼이 결성되었다. 사회과학자와 서양사 전공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반면 한국사학자는 한 명도 없는 ‘대안교과서’의 필진은 기존 역사학계의 서술과는 너무 다른 교과서를 내놓았다. 한 교수는 이 교과서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사료 오독, 역사 왜곡, 직업윤리 부재와 역사 인식 부재를 꼽았다.
한 교수는 그동안 역사학계가 학계의 검증을 통과하지 않은 뉴라이트 세력의 주장에 대해 거의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2010년에 있을 교과서 재편 작업에 정권과 언론이 개입해 우편향적으로 수정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우리가 바라보는 현대사’를 기술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과거사 진실 규명의 내용과 민주화의 성과를 현대사 교과서에 기술하자는 것이다.
뉴라이트 전략은? 논점 좁히고 단순화 시킨 후 말살시키는 것
정용욱(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강의가 있는 21일 아침, <한겨레신문> 1면에는 대한상공회의소의 역사교과서 수정요구를 둘러싼 논란이 보도되어 있었다.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토지약탈과 식량수탈(고교근현대사<천재교육>)’이란 교과서 원문을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확립’이라고 수정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 당시 자주독립국가 수립 능력을 가졌는지 의문이라고 했다는 보도를 접하는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래서였을까, 두 번째 강의의 열기는 한층 고조되어 있었다.
정 교수는 민족주의에 대한 긍·부정성 비판과 민족의 실체성 여부는 다른 문제라는 것을 지적했다. 교과서포럼은 ‘세계사적 시각’을 견지할 것을 요구하나 기실 이는 ‘민족적 자세’를 버리길 요구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적 역사인식과 역사적 상식을 부정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공세성을 지닌 교과서포럼이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과 동일한 정치적·철학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징집의 강제성 여부’로 논점을 좁혀 소모적 논쟁만을 이끄는 새역모처럼 해방 직후의 역사를 ‘단독 정부 수립’으로 논점을 좁혀 ‘국부 이승만론’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냉전의 시대에 냉전적 시각을 강요하고 민주화 시대에 독재를 찬양하며 통일 시대에 통일 무용론을 설파하는 교과서포럼의 본질이 정 교수의 강연을 통해 좀 더 명확히 드러났다.
일제강점기가 근대화를 이룩한 시기라고? 누구를 위해?
5월 28일 세 번째 강의를 듣기 위해 자하문길에 들어섰을 때,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하고 예스럽던 골목마다 전경들이 폴리카보네이트 방패를 앞에 세우고 서 있었다. 3강을 맡은 허수열(충남대 경제학) 교수도 “전경이, 서 있더라고요”로 말문을 열었다. 물리적인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정신적인 각성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허점을 꼼꼼이 반박해온 허 교수의 강의는 그래서 더욱 중요했다.
역사학이나 통계학의 전문가가 아닌 보통 시민의 입장에서는 교수라는 사람들이 도표나 그래프를 내세우며 ‘실증적으로’ 주장했을 때,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허 교수는 ‘실증’이란 포장이 애초부터 통계적 허상이 크게 포함되어 있는 통계에 기초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근대적 경제성장(S.Kuznets)’이라는 개념을 들어 식민지근대화 논리를 반박했다. 인구 증가, 일인당 생산 증가, 무엇을 봐도 근대화가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는 근거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아래 그래프 참조) 게다가 민족별 소유구조의 불평등 정도, 민족별 소득 분배 정도, 근대 교육에서의 민족적 차별 등을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강의 후 이어지는 질문들도 여느 때와는 달랐다. 허 교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공감대로만 피식민의 역사를 말하는 것은 이제 한계가 있다고 답했다. 제3자의 눈으로 그 당시의 역사를 봤을 때, 객관적이라 일컬어지는 자료들을 먼저 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피식민지였던 나라의 후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공감대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보다 입체적으로 그 당시의 역사를 공유하는 일일 것이라는 마지막 전언은 울림이 컸다.
이제 참여사회연구소의 기획강좌 ‘대한민국 60년,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는 반환점을 돌았다. 강좌가 진행되는 3주 동안에도 ‘기록’을 둘러싼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마찰이 이어졌다. 그 때마다 한 사람의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울분을 표현하고 답답해하고 단순히 흥분하는 것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그 주장의 역사적 배경과 그 주장을 내세우는 집단의 본질을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 그러나 그것이 또한 전부는 아니다. 더 많은 답이 더 많은 시민들의 머리와 가슴에 남기를 희망한다. 촛불집회가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스트리트 저널리즘’의 시대다. 네트워크로 지성이 확장되는 시대다. ‘기록’을 둘러싼 역사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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