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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일놈의 시차

 

눈을 떠 보니 벽걸이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다. 창밖은 훤하다. 새벽 2시쯤에 잠들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오후 6시는 아닐 거고, 상기도 옆에서 쌕쌕거리면서 잠들어 있는걸 보면 아마 새벽 6시일 거다.

 

그리고 나는, 아직 간밤에 마신 맥주 탓에 온몸이 찌뿌듯 한데도 눈동자만은 말똥말똥 하다. 다시 눈을 감아봐야 잠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런던에 도착한 지도 벌써 4일째인데, 이 지긋지긋한 시차는 언제까지 날 따라다니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홈에서 월드컵 4강까지 간 건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시차도 크게 한 몫 했을 거다. 유럽 애들 잠도 덜 깬 마당에 축구는 무슨…. 그리고 독일이 우리를 이긴 것은, 이제 한국에 온 지도 어느 정도 시간도 흘렀겠다, 축구도 몇 게임 뛰었겠다, 시차에 완전히 적응해서 그제야 본 실력을 발휘 할 수 있었던 걸 거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주섬주섬 일어나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아침 식사 삼아 어제 먹다 남은 초밥들을 냉장고에서 몇 개 꺼내먹으니 그래도 오전 8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은 런던을 찾은 배낭족에게는 그리 와닿는 말이 아니다. 일찍 나가봐야 교통비만 비싸고 별로 갈 곳도 없다.

 

 

복잡한 출근시간에 관광객은 나오지 마라?

 

런던은 대영제국의 수도로 기능하던 대도시인 동시에,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다. 도시 당국은 통계 내기도 벅찬 숫자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제한된 도시 공간 내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쓰고 있다. 런던의 대중교통카드 1일권은 오전 9시 이전 부터 쓸 수 있는 것과, 9시 이후부터 쓸 수 있는 것 2가지가 있는데 후자쪽의 가격이 훨씬 더 싸다.

 

거기에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10시부터 개관 하도록 하여 복잡한 아침 출근시간에 관광객들이 나올 이유를 차단해 버렸다. 그러니 런던에서만큼은 도대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지만, 나는 내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망할 시차가 아직 술도 덜 깬 나를 두들겨 일으킨 것이다.

 

햇빛도 없고 바람만 부는 트래펄가 광장에서 혼자 오도카니 앉아 벌벌 떨면서 내셔널갤러리 문 열 시간만 기다릴 생각을 하니 우울해지려고 한다. 내가 무슨 미술학도도 아니고, 내셔널갤러리 까짓거 그림 전시장, 안 봐도 된다. 밀레의 이삭줍기 따위, 어릴 때 가던 동네 이발소에도 있었다. 아, 그건 오르셰에 있는 그림인가?

 

하여튼 사람 없고 한적한 곳에서 좀 있고 싶다. 시골 바람 좀 쐬고 오자. 근교로 나가자. 그러자.

 

어디를 갈까

 

런던 주변에는 가 볼만한 근교도시가 대단히 많다. 대학도시 옥스포드와 캐임브리지, 그리니치, 바스, 리즈캐슬, 스트렛포드에이번, 코츠월드, 윈저캐슬, 세븐시스터스…. 하지만 백배와 론리가 보여주는 익숙한 이름들은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통의 배낭족은 전혀 모르는곳, 어지간해서는 동양인을 볼 수 없는 곳 어디 없을까'라고 생각하며, 상기의 책장에 꽂혀 있는 저스트고 런던을 꺼낸다. 말년 병장시절 남는 게 시간이라 그저 유럽에 관련된 거라면 별별 책들을 다 보고 다녔던 나다. 여기에 나오는 근교 여행지 중에서, 내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라면 한국배낭족은 열에 한 명도 채 모르는 곳 일 게 분명하다. 그럼 거기로 가자. 가서, 대한민국 1%가 되자….

 

 

알지도 못했고 계획에도 전혀 없던 땅 라이(RYE)는 그런 연유로 방문하게 된 것이다.

 

런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붉은색, 검은색지붕의 오래 된 목조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자갈돌이 지금처럼 예쁘게 깔려 있는 거리를 따라 올라가자면 소박한 성당이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해안선이 멀리 밀려나기 전에는 꽤나 번창한 항구였다는데, 지금은 아스라이 먼 곳에서 바다를 볼 수 있지만 동네 어디서든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화롭고 한적하다. 좋다.

 

 

골목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느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던 중년부부 한쌍이 나를 부른다. 자기네가 묵고 있는 숙소 머메이드 인이 라이의 명물 여관인데, 여관 로비가 사진 찍기 아주 좋을 거라며 머쓱해 하는 나를 이끌고 손수 안내를 해 준다.

 

시골마을이 내세울 것은 자연환경뿐만이 아니다. 런던 처럼 관광객 많은 도시 시내에서 백날을 돌아다녀 봐야, 자기네 정원도 아니고 숙소를 보여 주면서 사진 찍으라고 부추기는 사람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저 부부도 런던에서라면 낯선 동양인에게 자신들의 공간을 보여 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인심 후한 전원이다. 도시가 가진 크고 화려한 것들은 없지만, 그 대신 도시에 없는 이런 잔잔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누구든, 누구에게든 넉넉한 마음씨가 오갈 수 있는 그런 시골이다.

 

성당의 종탑지기 할아버지는, 학생이면 종탑 위로 올라가는데 1파운드만 내면 된다고, 대신 아직까지 배울 것이 많은 나이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마을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만 한다며 이것 저것 이야기를 꺼내신다.

 

 

라이가 예전에는 번창한 항만이었다는둥, 여기 사는 사람들 중에 미국에서 온 사람도 있고 벨기에에서 온 사람도 있고 독일에서 온 사람도 있는데 일본에서 온 사람은 아직 없다는 둥, (아임 프롬 코리아라니까요! 월드컵 쎄마이 빠이널! 만체스터 박지성!) 아래로 내려가면 마을 박물관이 있는데 입장료가 무료니 꼭 가보라는 둥.

 

그닥 뼈 있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친절한 마을 가이드라 생각하며 열심히 듣는다. 1파운드로 맨투맨 가이드에 덤으로 종탑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니 역시 런던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물관의 할머니는 '한국사람이 여기에 온 건 처음이야~'하며 화들짝 놀란다. 가이드북에 거의 나와있지 않은 데다 런던에서도 기차를 한번 갈아 타면서 와야 하는 곳이니 짧은 일정 동안 밀도 있는 여행을 꾸려나가야 하는 한국 배낭족들이 이 곳을 찾는 일은 참 드물 것도 같다.

 

"한국에도 한번 가 보고 싶다"라는 말이 의례적인 인사치레인 줄은 알지만, 외국친구들에게 선물로 뿌리기 위해 잔뜩 준비해온 10원짜리 동전을 가방에서 하나 꺼내드린다.

 

"한국 동전이에요. 값어치가 있는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맘에 드셨으면 해요. 여기 뒤에 탑 보이시죠? 이게 뭐냐면…."

"오! 이건 불교사원의 탑이구나! 나는 이 탑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 하지만 불교사원의 탑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너희는 여기에다 기도를 하지?"

 

"잘 아시네요!"

"내게 주는 거라니 정말 고맙구나. 너는 정말 친절하구나."

 

"핫… 핫…, 아니에요. 라이가 마음에 꼭 드는데요. 풍경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해요. 다른 한국사람들에게도 많이 소개할 게요."

 

"어쩜…, 그래준다면 정말 고맙지. 좋은 여행 하렴."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긴 한데 사실은 저 할머니, 내가 찾아가기 훨씬 전에, 다른 한국 배낭족에게도 '한국 사람 처음이야~'하며 반가워 했댄다. 흠. 나이가 있으셔서 기억력이 가물가물 하신 거라고 믿고 싶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만큼은 한껏 느낄 수 있긴 한데, 사실 라이는 볼거리가 많은 곳은 절대로 아니다. 억지로 꼽아봐야 오가는 기찻길 밖으로 보이는 양떼들, 밋밋한 성당, 낡은 여관, 경치도 별로 좋지 않은 포대, 다 쓰러져가는 옛 성문 정도?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도 아니고 이름난 위인이 태어나거나 한 곳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라이에서 낯선 이방인을 마치 자식처럼, 손주처럼 대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이런 곳에서는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상기는 분명히 뭐 그런데를 다녀 왔냐고, 다른 사람들 다 가는 곳으로 가야 나중에 같이 맞장구 치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 않냐고 핀잔을 줄게 뻔하지만, 나는 라이에서 참 행복했다.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을만한 더 없이 좋은 기억을 남기고 런던행 열차를 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가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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