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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축구를 보려거든
 
시간이 촉박하다. 빅토리아 스테이션에는 벌써 빨간 도깨비 뿔에 삼지창까지 든 사람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라이에서 너무 여유를 부렸던 걸까. 부리나케 튜브를 타고 피카드리 서커스로 향한다. 커다란 삼성 간판 아래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상기가 나를 맞아준다.
 

"의외로 빨리 왔네? 버스 안 막히던?"

"지하철 타고 왔는데?"

 

"넌 갑부냐 만날 지하철만 타게? 런던에선 버스가 훨씬 더 싸다니깐. 밥값 아낀다고 초밥만 먹지 말고 지하철 요금 아껴서 그 돈으로 레스토랑 좋은 데로 한 번 가겠다. 버스에서 경치구경도 하고 그래야지."

"아, 몰라 임마. 난 너처럼 유학생도 아니고 그냥 여행 중이잖아. 여기는 우리나라랑 정류장이 달라서 어떻게 타는지도 잘 모르겠어!! 며칠이나 있는다고 그런 거까지 어떻게 다 신경 써."

 

"나 참. 영국 버스가 우리보다 훨씬 더 편한 건데…. 두어 번만 타 보면 금방 적응되는데 병신…. 하여튼 빨리 가자. 시작하겠다."

 

시내 한복판의 잔뜩 붐비는 펍으로 들어가자마자, 어제 알게 된 상기의 유학생 친구 몇 명이 반갑게 인사해온다. 시간은 얼추 다 되었는데 분위기가 아직 어수선하다고, 우리 중에 누군가가 나서야 할 것 같으니 대표를 한 명 뽑자고, 모두가 둥그렇게 모여 들뜬 마음으로 가위바위보를 한다.

 

지면 안 되는데…, 지면 안 되는데… 이겼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상기는 한참 동안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더니, 이윽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술집이 떠나가라 외친다.

 

"때애애함밍국!!!!"

 

붉은악마 런던지부

 

 

펍을 점령하고 있는 절대다수가 이미 한국 유학생과 배낭족들이다. 시작이다. 모두가 벌떡 일어나서 다 같이 요란한 박수와 함께 대한민국을 외친다.

 

그날은 2006년 6월 23일. 대한민국과 스위스의 독일 월드컵 조별예선 최종전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2002년에 세계가 우리를 보고 놀란 것은, 4강도 4강이지만 그보다 길거리 응원문화였단다. 남의 차를 부수고, 창문을 깨트리는 되먹잖은 10대들의 훌리건 응원에 익숙하던 게 유럽 친구들이다. 이들은 우리의 4강이라는 성적 자체보다는, 모두가 거리로 나와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으면서도 단합된 열기를 마음껏 내뿜는 '테항밍고'를 아주 부러워했었단다.

 

그리고 오늘은 붉은악마가 임시로 런던지부를 차렸다. 멋모르고 들어온 외국인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목이 터져라 "테항밍고"를 연호한다. 그렇다. 분명히 이곳은 런던 시내 중심부이지만, 오늘만큼은 외국인이란 '한국인이 아닌 자'를 말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이 펍을 한국인 치외법권 구역으로 인정해 달라고 해도 먹힐 분위기다. 2002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오늘은 우리가 붉은악마 런던지부를 차렸다.

 

독일의 경기장에까지 대표팀을 따라갈 힘은 없었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해 온 커다란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이 적지라면 적지에서 열심히 우리 팀을 응원하고 있다.

 

2002년, 포르투갈을 꺾고 16강에 올라간 날 나는 1년치 미친 척을 한꺼번에 다 해버렸었다. 광란의 분위기를 등에 업고 마을버스 지붕 위로 기어올라간 것이다. 지붕 위에서 생판 처음 보는 아저씨랑 얼싸 안고 웃통도 벗고 아리랑도 불러줬었다.

 

그때 런던에서는 트라팔가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타고 올라간 참 자랑스러운 배낭족도 있었다는데, 차마 그렇게 까지는 못하겠다. 다만, 분위기만 맞춰준다면, 이번에는 서울의 몰개성한 마을버스 대신 런던의 아이콘 이층버스 위로 올라가주마. 10년치의 담력을 한 번에 쏟아주마. 경찰에게 붙잡혀도 일본인이나 중국인 행색을 하면 돼…지는 않겠구나. 한국 애들이 우르르 나서서 도망치라고 도와주겠지, 뭐.

 

테이블은 이미 가득 찼고, 너나 할 것 없이 바닥에 벌렁 주저앉았다. 내 옆에 앉은 영국인 친구는 '테항밍고'의 정확한 발음을 물어온다. 발음보다는 손뼉치는 박자와 음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일러준 다음, 함께 '‘짝짝 짝 짝짝'을 해주고서 서로 통성명을 하여 형제가 되기로 했다. 축구는 참 좋은 스포츠다. 월드컵은 민간외교에 참 좋은 건더기다.

 

내친김에 뒤편에 앉은 또 다른 외국인 커플에게도 말을 건다.

 

"자. 너네도 따라 해봐. 대~한민국!!"

"음… 음… 우리는 하지 않을래."

 

"에이 괜찮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주변을 봐. 다들 미쳤잖아. 같이 응원하자."

"아니야. 그래도 우리는 안 할래. 미안해."

 

옆에 서 듣고 있던 내 영국인 '형제'는 그 두 명이 괘씸한지 뭐라고 빠르게 영어로 두다다 쏘아댄다. 대강 '이 펍에는 한국사람 이렇게 많은데 한국을 응원할 게 아니면 왜 여기로 왔느냐'라는 내용인 것 같은데, 두 남녀가 내 눈치를 살살 살피면서 한다는 대답이 압권이다.

 

"위 아 프롬 헬베티카."

 

'Helvetica'는 스위스연방의 옛 이름, 우리로 치자면 대충 '조선' 정도 되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단어를 아는 외국인이 드물 듯, 저 친구들도 내가 헬베티카를 모를 줄 알았나 보다. 저 친구들에게는 대단히 불행히도, 헬베티카라는 말은 <먼 나라 이웃나라> 스위스편에 아주 자세히 나와있고, 나는 그 책을 읽었다. 십수 년 전의 어릴 때도 아니고 딱 한 달 전에. 배낭족의 필독 도서라기에.

 

그러고 보니 런던 시내 대부분의 술집들은 같은 시간에 하는 프랑스와 토고의 경기를 틀어 주고 있다. 덕분에 한국의 유학생과 배낭족이 모두 우리가 있는 펍으로 몰려든 것까지는 좋았다. 머릿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스위스 친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인들을 따라와서는 지옥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불쌍하게도 응원은커녕 자기네 국적조차 함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친구들에게 "웁스… 쏘리"라고 대답하고서 나더러는 "형제, 이 친구들은 그냥 가만히 보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대답하는 나의 영국 '형제', 정말 센스 만점이다.

 

어차피 '야! 이것들이 스위스놈들이래!'라고 고함지르면서 몰아세울 일도 없다. 내가 내 나라를 열심히 응원하는 것처럼, 저들도 자기네 나라를 응원할 권리가 있다. 그냥 불편해하는 스위스 친구들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때애애한민국!!"

 

 

그라운드 바닥에 힘없이 고개를 처박고 있는 천수를 보니 내가 직접 일으켜 세워서 등 두들겨 주고 싶다. '형제'는 스위스 수비수의 팔에 공이 맞는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자 "심판이 쓰레기야!!"를 연발하며 나보다도 더 분해한다. 뒷자리의 스위스 친구들은 벌써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는 여행 중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축구를 경기를 꼭꼭 챙겨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단의 마지막 무대도 보기는 봐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여행이 더 소중하니까.

 

축구를 보던 사람들은 대부분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한국인이라고는 상기와 나, 아까 이야기 한 상기의 유학생 친구 몇 명뿐. 붉은악마 런던지부였던 펍은 다시 한 잔에 2파운드짜리 생맥주를 파는 싸구려 선술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런던 문화의 절반

 

상기 말로는, 런던 문화의 절반이 뮤지컬이고 나머지 절반은 펍이란다. 이걸 즐기지 못한 사람은 런던에 안 온 거나 다름없단다. 너무나도 단호한 말투여서 런던에는 축구도 있고, 라디오헤드도 있고, 박물관도 많은데, 좀 극단적인 발언 아니냐는 반박도 하지 못하겠다. 지가 펍 사장도 아니고 웨이터도 아니면서…. 하다못해 영국인도 아니고 고작 단기 어학연수생 주제에 왜 펍을 갖다가 런던의 상징이라며 자랑스러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만큼 런던을 알기 위해서는 펍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뜻일 거다.

 

싼값에 마실 수 있는 기네스 생맥주가 맛이 괜찮기는 하다만, 하지만 다른 나라에도 생맥주를 파는 곳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펍 내부를 아무리 살펴봐도 그냥 깔끔한 인테리어뿐, 영국을 대표한다고 할 만한 특별한 무언가는 없어 보인다. 음악을 안 틀어 놓으니 조용한 건 좋다.

 

내심 실망한 채 맥주를 기울이고 있는데, 한참 전부터 함께 대한민국 외쳤던 유학생 친구들이 어느 사이인가부터 자기네끼리 영어로만 이야기하고 있는게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다. 제아무리 영어를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온 사람들이라지만 지금은 다들 한국인들 아닌가.

 

그 옛날에 파리의 소르본 대학 친구들은 자기네들끼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프랑스어 대신 라틴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뿌듯해 했다는데, 그런 연유일까. 하지만 이 사람들이 매번 이러는 것도 아닌 것이, 어젯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젓이 한국말로 잘 떠들고 놀던 사람들인데.

 

나는 고등학교 시절, 꼭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갈 거라며 표준어라고 주장하는 제3세계 언어를 구사하면서 18년 동안 써 온 구미사투리를 버린 두 친구를 집단 따돌림 시킨 경험도 있다. 도저히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때는 상기도 우리말 사수를 위한 그 성전에 열성적으로 동참했었는데. 저 새끼들 돌았다는 말을 분명히 하던데. 우리나라가 16강에 못 올라가서 이 사람들이 단체로 돌아버린 걸까. 16강도 못 올라간 나라의 국민으로서 축구 종주국에 와 있는 게 부끄럽나? 하지만 빨간 티셔츠는 여전히 입고 있는데?

 

어쨌거나 지금의 이 집단 속에서는 눈치 없이 한국말 꺼냈다간 안 될 것 같다. 나랑도 좀 놀아달란답시고 열심히 영어를 써가며 말을 섞는다. 다행스럽게도 다들 유학경험이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친구들이라 내 영어가 크게 딸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우리끼리 한국말로만 이야기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말을 못 걸어 오잖아."

 

화장실로 향하는 상기를 쫓아가서야, 비로소 내막을 알게 된다. 펍은 단순히 술 마시는 공간이 아니고, 같은 집단군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떠들고 노는 사교의 장이란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냥 트인 자리에 앉아 가만히 맥주를 홀짝이고 있으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단다. 특히 우리가 모인 COCK PUB은 상기가 다니는 어학원의 사람들이 단골로 정해두고 찾는 곳이라서, 마침 금요일인 오늘은 여러 사람을 만나 볼 수 있을 거란다.

 

대충 계산이 그려진다. 우리나라의 여느 술집들처럼 함께 온 사람끼리만 이야기하면서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펍도 물론 있으니까 그때그때 기분에 맞는 곳으로 골라서 들어가면 된단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벌써 일본 친구 한 명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가리키며 상기의 고향 친구라고, 인사 하라고 소개해주자, 녀석은 비위 좋게도 한국말로 인사를 꺼낸다.

 

"안년하세요. 제 이르믄 켄타이므니다."

 

'오~ 오~'하는 반응들이 들려온다. 까불지 마라. 형이 이래 봬도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단다. 질 수 없잖아?

 

"하지메 마시떼, 와따시노 나마에와 중현 데스. 요로시꾸 오네가이시마스."

 

약간 더 큰 탄성들과 함께 박수 소리. 이름 소개 뒤에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니 이긴 거라고 뿌듯해하며 반갑게 악수를 나눈다.

 

어떻게 원빈이 의병 제대한 것까지 알면서 니네 나라는 히로스에 료코만 알고 이와이 슌지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모를 수가 있느냐고 핀잔을 주자, '원빈은 잘 생겼잖아! 일본에서도 모두가 원빈을 잘 알아!'라고 반박한다. 뭔가 앞뒤가 맞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설득력은 있다.

 

 

이번에는 리버풀 출신의 영어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다가오더니, 오늘의 축구 이야기로 운을 뗀다. 한국 입장에서는 정말 안타깝게 됐다며. 자기도 한국을 응원했다고. 참 축구 좋다. 이 동네에서는 별다른 할 말이 없어도 축구 이야기만 하면 반드시 친해지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3년 정도 살면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국은 참 살기 좋은 곳이었단다. 이쯤 되면 동포로 대우해 줌 직하다. 서울이나 부산 정도를 생각하면서 한국의 어디에 있었느냐니까, 남쪽의 구미라는 공업 도시에 있었단다.

 

상기와 나는 벌떡 일어나서 이산가족 상봉한 마냥 고함지르면서 반갑다고 껴안고 한바탕 굿을 한다. 이쯤 되면 동포에서 동문으로 승격시켜 줘야 한다.

 

바텐더가 종을 뎅뎅 울리면서 마지막 주문을 받을 시간까지, 난생 초면에 구미와 한국과 영국과 런던에 대해서 끝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간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할 말이 떨어졌다 싶으면 축구이야기를 하면 된다. 한국 이야기하다가 할 말이 없어지면 한국 대표팀 이야기로, 영국 이야기하다가 할 말이 없어지면 잉글랜드 대표팀 이야기로, 마찬가지로 런던이야기에서 아스날, 첼시, 토트넘 같은 런던 축구팀 이야기로 넘어가면 된다.

 

비록 우리나라가 16강에는 못 올라 갔지만, 축구는 정말 좋은 스포츠다. 펍은 정말 좋은 곳이다. 런던은 정말 좋은 도시다. 그리고, 구미도 참 좋은 도시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lrclub,. 쁘리띠님의 떠나볼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은 지난 2006년 6월~8월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가짜시인, #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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