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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3월. 못자리 만들기며, 씨앗 뿌리기 등으로 한창 바쁠 수많은 농부들이 산으로 모였다. 그들과 함께 산에 간 것은 커다란 고무통 수십 개. 고무통 속에는 먹기 좋게 잘 지어진 밥이 그득그득 차 있다.

삼나무 상자와 양파망에 가득 담은 밥을 들고 농부들이 멈춘 곳은 대나무밭. 대나무 아래를 살살 판 후 정성스레 묻었다. 밥이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밥 위에 종이를 덮은 후 흙을 덮어 봉인한 후 숨구멍을 내준다. 한쪽에선 밥만 산에 까는 사람들도 있다.

"도대체 왜 이 귀한 밥을, 농부에게는 자신의 자식과 다름없는 쌀로 지은 밥을 대아무 밭 아래 묻고, 숨구멍도 내 주고, 낙엽도 덮어 주며, 귀한 보물 숨기듯 파묻을까?" - 책 속에서

<흙-함께 숨 쉬는 생명들의 희노애락>겉그림
 <흙-함께 숨 쉬는 생명들의 희노애락>겉그림
ⓒ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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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함께 숨 쉬는 생명들의 희로애락>(EBS 흙 제작팀,낮은산 펴냄)은 이와 같은 풍경으로 시작된다.

산길을 걷다 보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녀석이 있다. 길에 앉았다가 사람이 가까이 가면 풀쩍 몇 미터를 날아가 사람을 향해 앉았다가, 사람이 가까이에 이르면 다시 풀쩍 날아올라 앉기를 되풀이하는 녀석. 이런 행동이 산길을 가는 사람을 안내하는 것 같아 이름 붙여진 '길앞잡이'이다. 우리나라의 낮은 산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곤충이다.

등껍질이 총 천연색이라 화려한 '비단길앞잡이' 한 마리가 지렁이 사냥을 하고 있다. 지렁이라고 쉽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제 몸보다 몇 배나 긴 지렁이 사냥이라 힘겹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옆에서 그 힘겨운 싸움을 지켜보면서 수수방관하고 있는 또 다른 비단길앞잡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녀석은 암컷이고 수수방관하고 있는 녀석은 수컷이다.

'개미라면 모두 달라붙어 사냥감을 꼼짝 못하게 할 텐데, 사냥한 먹이를 낚아채려는 걸까?' 이런 생각으로 의아하게 바라보는 순간, 수컷은 사냥 때문에 녹초가 된 암컷에게 달려들어 짝짓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오호라, 수컷은 오직 짝짓기에만 관심이 가 있어서 암컷의 힘겨운 사냥 따위에는 무관심했던 거로군!'

짝짓기를 끝낸 수컷은 종적을 감추고, 암컷은 부드러운 흙을 골라 꽁무니 끝으로 흙을 파고 알을 낳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알에서 깨어난 길앞잡이 애벌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수직으로 굴을 파는 일이다. 다 커봤자 기껏 2센티미터도 안 되는 녀석이 60센티미터 이상 깊은 굴을 파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찮다.

"길앞잡이 애벌레는 작은 녀석이 꽤나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다. 몸에 비해 커다란 얼굴, 불룩 튀어나온 눈이 아주 인상적이다. 역시나 이 녀석은 얼굴을 무기 삼아 사냥을 한다. 일단 길앞잡이 애벌레는 머리를 뚜껑 삼아 사냥감이 굴을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드디어 사냥감이 나타나면 낫처럼 생긴 그 큰 턱으로 잽싸게 물고 늘어져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사냥의 첫 번째 포인트다. 또 배에 있는 1쌍의 갈고리는 굴 벽에 단단히 몸을 걸어, 먹잇감이 버둥거려도 자신은 굴 밖으로 끌려 나가지 않도록 한다." - 책 속에서

녀석의 이름은 거칠고 탐욕스런 사냥을 하기에 '타이거 비틀(tiger beetle)'. '호랑이처럼 무섭게 먹어치우는 딱정벌레'란 뜻이란다. 녀석의 사냥술을 보면 이름이 걸맞다 싶다.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이해하지 못할 만큼 그토록 깊게 굴을 판 것은, 한 번 낚아챈 사냥감이 어떤 경우에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깊숙하게 끌어내리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길앞잡이뿐일까? 흙(속)에서는 수많은 생물들이 살아간다. 이미 오래전에 흙집을 버리고 '좀 더 편리하고 근사한 곳, 좀 더 높은 곳으로'를 끝없이 지향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생명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흙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100만 종이 넘는 곤충들 가운데 95퍼센트 정도는 생의 얼마 동안 꼭 흙속에서 살다가 밖으로 나간단다. 그리하여 1천 평 정도의 흙에는 길앞잡이나 땅강아지 같은 곤충의 알, 애벌레, 성충 등 적어도 5억 마리의 생명을 품고 있다고. 뭇 생명들에게 진정 어머니 같은 흙이다. 이런 흙이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EBS자연다큐멘터리 <흙>은?
2005년 6월 22일에 방송된 다큐멘터리로 2005년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가 주최하는 그리메상 촬영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생애 처음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한 배우 최불암 특유의 구수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흙과 생명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잘 전달했다는 호평이 있다. (EBS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 가능)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다루다 보니 촬영은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습니다. 800배의 배율 상태에서 미생물이 분열하는 모습을 촬영할 때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장시간 노출로 시료의 표면이 말라 가면 현미경 렌즈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그때마다 미동나사를 돌려 초점을 맞춰 촬영해야 하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초점이 흐려져 며칠간의 수고가 헛일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뿌리내리는 장면은 0.1밀리미터씩 카메라를 이동하며 촬영해서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교한 자동장치가 없어서 수동으로 촬영했는데 보름 동안 많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 얻은 영상입니다. 야영 중에 텐트 지지대가 휘어 구부러질 정도의 폭풍우를 만나 밤새 떨기도 했고, 눈이 쌓여 허리춤까지 빠지는 점봉산에 장비를 메고 기다시피 해서 오르기도 했습니다. 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일념으로 지낸 시간이었습니다." -머리말 중에서(다큐멘터리 <흙> 프로듀서 이의호)

이의호 프로듀서는 <물총새 부부의 여름나기> <하늘다람쥐의 숲>의 자연다큐멘터리를 촬영, <풀섶의 세레나데> <잠자리> <사냥꾼의 세계>등의 자연다큐멘터리를 촬영,연출했다.

2005년 6월 22일, EBS 다큐멘터리 <흙-함께 숨 쉬는 생명들의 희로애락>(내레이션 최불암)의 카메라는 흙과 흙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것으로 흙의 소중함을 가슴으로 느끼게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산길에서 자주 만났던 길앞잡이 애벌레의 먹이사냥을, 흙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그 사냥의 비밀을 숨죽여 보면서 가슴이 얼마나 콩닥거렸던가!

'다시보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싶을 만큼 기억에 오래 남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나는 행운이라니! 화면으로 스치고 말아 좀 더 오래 관찰하지 못하는 그 아쉬움을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는 것으로 충족하며 읽은 책이다.

즐겨보는 <환경스페셜>(KBS1-수요일 밤 10시)의 수많은 다큐멘터리들이 이처럼 책으로 나오길 바라면서 말이다.

카메라는 길앞잡이 애벌레나 땅강아지, 지렁이 등의 생태만이 아닌, 너무 작아 우리 눈으로 좀처럼 볼 수 없는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을 담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다. 한숟갈 분량의 흙에 담긴 생명의 소중함이라니!

한 시간 채 안 되는 이 다큐멘터리에 쏟은 정성은 꼬박 1년 2개월. 흙과 박테리아, 곰팡이, 식물의 뿌리와 꽃의 변화 등을 영상으로 잘 담았거니와, 책으로 그 사진들을 풍성하게 만날 수 있다. 다큐멘터리 못지않게 책도, 흙속에서 사는 다양한 생물들과 흙의 순환, 그 연결고리를 생생하고 의미 있게 담고 있다.

<흙-함께 숨 쉬는 생명들의 희로애락>은 무심코 걷던 걸음을 멈추고 흙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흙의 소중함을 가슴으로 느끼게 하여 흙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하는 그런 책이다.

지구상에 사는 생물 중 흙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으면서도 흙을 가장 많이 착취하는 오만한 인간들에게 반성을 묻는 듯, 이제라도 흙으로 더욱 가까이 돌아가라는 듯, 인간과 흙의 소중한 관계로 책은 끝을 맺는다.

"밥길을 냈던 농부들이 일주일 뒤 다시 대나무 숲을 찾았다. 묻어두었던 밥은 어떻게 되었을까? 뽀얗게 먹음직스러웠던 밥은 형형색색의 곰팡이가 피고 삭을 대로 삭아 뭉개져 있어 밥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중략) 이 밥은 대나무 뿌리에 사는 수억 마리의 미생물들이 고스란히 옮겨와 만들어진 완벽한 생태계다.

…(중략) 흙에 살던 미생물을 모두 담고 있는 삭은 밥, 여기에 설탕을 넣고 버무리면 삼투압 때문에 물이 다 빠져 미생물들은 잠시 활동을 멈추고 휴면상태로 들어간다. 그다음 농지로 가져와서 물에 개어 희석시키면 다시 물을 머금고 미생물들이 잠에서 깨어난다. 이 용액, 그 안에 살고 있는 엄청난 양의 미생물들을 땅에 뿌린다. 또 흙과 섞어 발효시킨 뒤 비료대신 뿌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잡초가 무성한 과수원이만 생산량은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 책 속에서

덧붙이는 글 | <흙-함께 숨 쉬는 생명들의 희노애락>(EBS 흙 제작팀/낮은산 펴냄/2008.4/1만1000)



흙 - 함께 숨쉬는 생명들의 희노애락喜怒哀樂

EBS 흙 제작팀 지음, 이태원 감수, 낮은산(2008)


태그:#자연 생태계, #EBS 다큐멘터리, #흙, #최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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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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