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김민기 '아침이슬'(1971, 김민기 작사·작곡)
두 달 가까이 열리고 있는 촛불집회에서 자주 불린 노래 중 하나가 바로 '아침이슬'이다. 이 노래는 당시 서울대 미대생이던 김민기가 지었다. 당시 서울대 미대는 서울 동북쪽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다.
지금껏 이 노래를 숱하게 들었지만, 노래에서 나온 묘지가 어디였을까를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대중음악평론가 이영미는 달랐다. 그는 근처에 있는 묘지를 탐문해 본 뒤 거리를 고려해 망우리공동묘지(산업대에서 5km)와 4·19국립묘지(6.5km)를 후보에 올렸다.
그러나 망우리 공동묘지는 가파른 산언덕 구석구석에 있어 광야의 느낌이 없다. 평지에 있는 4·19국립묘지는 광야의 느낌이 물씬 난다. 게다가 '나 이제 가노라'라고 결심을 한다는 점에서 '4·19'라는 상징성이 어울린다고 결론짓는다. 이렇게 놓고 보니 노래가 훨씬 재미있다.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는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가요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노래 속 배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광화문 연가>(이영미 지음, 예담 펴냄)는 바로 그런 책이다.
1961년 서울 동대문 밖에서 태어나 죽 서울에서만 자란 서울내기인 이영미는 한국대중가요 전문가다. <한국대중가요사>(1998),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2003)를 통해 대중가요를 맛깔나게 해부했다. 이번 책은 대중가요를 통해 보는 서울 역사다. 해방 뒤부터 최근까지 서울 변천사가 그의 글을 통해 고스란히 살아난다.
1968년 무렵 최초의 고속터미널이 동대문에서 종로 5가 방향으로 가는 쪽에 있었고, 강남을 뜻하던 영동이 영등포 동쪽을 뜻했으며, 서울역 플랫폼에 식민지 문화가 스며있다는 사실, <광화문 연가>를 통해 알게 되는 지식이다.
럭키 서울과 에레나... 서울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해방 뒤 나라가 후진국에서 벗어나 하루 빨리 미국과 같은 선진국이 되었으면 했던 당시 사람들은 서울에 그 바람을 집어넣었다. 서울은 희망이 넘치는 이상사회로 그려졌다.
"서울의 거리는 태양의 거리 태양의 거리에는 희망이 솟네 / 타이프 소리로 해가 저무는 빌딩가에서는 웃음이 솟네"
- 현인 '럭키 서울'(1949,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서울의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 서울의 아가씨는 맘 좋고 슬기로워 / 서울의 아가씨는 명랑한 아가씨 남산에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
- 이시시터즈 '서울의 아가씨'(김남석 작사, 박선길 작곡)
노래엔 희망이 넘쳤고, 영어 단어도 넘쳤다. 영어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결국 서양 선진국의 이미지였다.
1960년대 활약하던 봉봉사중창단은 '꽃집아가씨'라는 노래에서 "새빨간 장미보다 새하얀 백합보다 천 배나 만 배나 예뻐요"라고 노래했지만, 글쓴이는 그 당시 꽃집에서 장미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 당시 꽃집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국화였다고.
굳이 가사에서 '장미'와 '백합'을 쓴 것은 현실을 반영하기보다 서양 이미지가 필요해서 그러했으리라고 글쓴이는 해석했다. 쌀집이나 떡집 대신 꽃집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고. 또 다른 노래에서 미루나무를 굳이 '포플러'라고 바꾼 것도 그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압권은 최희준의 '내 사랑 쥬리안'(손석우 작사·작곡). "내 사랑 쥬리안은 마음씨 고운 여자"라고 노래했지만, 쥬리안은 남자에게 주로 쓰이는 이름이다. 서양 이름을 애인 이름으로 쓰고 싶었던 당시 정서가 만들어낸 해프닝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은 지역 사람들을 엄청난 속도로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지만, 초창기만 해도 대중가요는 서울에 대한 거부반응을 강하게 담고 있었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짓는 에레나 /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목소리에 이쁜이는 울었네"
- 김정애 '앵두나무 처녀'(천봉 작사, 한복남 작곡)
하지만 이농은 계속 됐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애기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로 시작하는 김상희의 '울산 큰애기',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을 부른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등 이농을 다룬 노래는 계속 나왔다.
1970년대는 상당히 산업화가 진행된 상태. 도시 문제가 불거지고 빈부격차도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시 대신 시골에서 소박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바람이 생겼다.
1970년대 '사월과 오월'은 '욕심없는 마음'에서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작은 초가집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구운 옥수수 욕심 없는 나의 마음 탓하지 마라"라고 했고, 양희은은 '가난한 마음'에서 "나는 돌아가리라 쓸쓸한 바닷가로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돌담 쌓으면 영원한 행복이 찾아오리라"라고 노래했다.
그렇지만 시대 흐름은 여전히 '이촌향도'였다. 서울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이제 서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윤수일의 '아파트'나 '제2의 고향'은 그 시절 나온 노래였다. 이렇게 시간 순으로 늘어놓으니 대중가요가 나름 시대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한계는 있었다. 대중가요는 명동과 종로는 다루되 구로와 성수동은 다루지 않았고, 아파트는 다루되 공장은 다루지 않았다. 이영미는 "대중가요의 세계는 매우 솔직하게 대중들의 경험과 욕망을 담아내는 듯했지만, 정작 서울의 그늘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219쪽)라고 꼬집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민중가요라 불리는 노래들이었다.
"시영아파트 하수구에서 왕모기나 잡으며 하루 종일을 보내는 애들 / 서울 변두리 검은 하천엔 썩은 물만 흐르고 역한 냄새 속에서 웃지도 않고 노는 애들"
- 정태춘 '그의 노래는'(1988, 정태춘 작사·작곡)
"너네는 큰 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는 작은 집에 일곱이 산다 /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네는 집 많아서 좋겠다"
- 한돌 '못생긴 얼굴'(한돌 작사·작곡)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 이제는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 '공장의 불빛'(1978, 김민기 작사·작곡)
대중가요 속 '매춘'을 다룬 노래가 이렇게 많았어?
책을 읽으면서 놀란 점은 대중가요에 '매춘'을 뜻하는 가사가 무척 많았다는 점이다. 여러 번 듣거나 즐겨 부르던 노래도 있었는데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다. 글쓴이가 여성이라는 점이 장점을 발휘했다고 본다.
일찍이 1950년대 대중가요는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짓는 에레나"(김정애 '앵두나무 처녀')를 노래했는데, 풍요의 시대였던 1980년대 향락의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 사계절 모두 봄봄봄 웃음꽃이 피니까 / 외롭거나 쓸쓸할 때는 누구라도 한번쯤은 찾아오세요 / 아아아, 여기는 사랑을 꽃피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 문희옥 '사랑의 거리'(1989 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
"희미한 불빛 사이로 마주치는 그 눈길 피할 수 없어 나도 몰래 사랑을 느끼며 만났던 그 사람 / 행여 오늘도 다시 만날까 그날 밤 그 자리에 기다리는데 그 사람 오지 않고 나를 울리네 / 시간은 자정 넘어 새벽으로 가는데 아아, 그날 밤 만났던 사람 나를 잊으셨나봐"
- 주현미 '신사동 그 사람'(1988, 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
이영미는 "단지 성매매라고 적시하지 않았을 뿐 의미하는 바가 분명한 이런 노래들이 이렇게 버젓이 공중파 텔레비전에까지 나오는 현상을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더 나아가 "문희옥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데뷔한 나이 어린 가수라, 소녀 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하는 호객 멘트는 여러 가지 다른 연상을 가능하게 해서 듣고 있기가 더더욱 민망하다"라고 털어놓았다.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속 무대가 어디인지, 혜은이의 '제3한강교' 원래 가사는 무엇이었는지, '마포종점'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글쓴이의 서울 생활도 흥미롭다.
중학교 때 지하철 1호선이 처음 개통되고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고, 300만 원짜리 전세, 방 하나에 겨우 몸을 움직일 만한 부엌이 딸려 있는 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는 글쓴이의 경험을 통해 대중가요 속 서울은 구체화해서 살아난다.
이 책은 대중가요 속에 나타난 서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1961년생 서울 토박이가 털어놓는 서울 체험기이기도 하다. 단성사 옛 모습, 서울거리를 달리는 전차, 복개되기 전 판잣집들이 늘어서있던 청계천, 1960년대 명동거리 지금은 찾을 길 없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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