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경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작게는 몇 백에서 많게는 몇 십억 원을 오르내리는 가격으로 거래가 되었다. 사물을 그린 것도 있고, 자연 풍광을 그린 것도 있다. 사람을 그린 것도 있고 동물을 그린 것도 있다. 상상화도 있고 실물화도 있다.
그림 액자들마다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경매에 나섰다. 도무지 문외한인 나는 그 가격이 어찌하여 매겨지는지 알 수가 없다. 여러 그림들 속에서 유독 내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다. 나무와 돌, 그리고 아름다운 깃을 단 새 한 마리가 그려진 그림인데, 자연이라서 좋았다. 근데 그 그림은 십억 가까운 돈에 팔렸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나는 그때 ‘그림의 떡’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톡톡히 깨달았다. 요즘은 그림을 재테크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처럼 내리는 법이 없다고 한다. 돈 많은 이들이 그림에 투자(?)를 한다고 한다.
오늘도 뻐꾸기 노랫소리에 잠을 깼다. 나의 아침은 진짜 뻐꾸기시계가 시작을 알린다. ‘뻐꾹뻐꾹! 뻑 뻐꾹 뻐꾹!’ 그의 부르짖음에 일어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조립식 건물인지라 그 소리가 방안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와 고막을 뚫는다.
조금 더 자고 싶어도 그는 용케 이른 아침에 나를 잡아 깨우고 만다. 싫기도 하고 한편으론 좋기도 한 일어남의 의식, 내 아침은 이렇게 역사를 시작한다. 그림 경매를 보며 몹시 부러웠었다. ‘누구는 복도 많아.’
먹고사는 것과는 무관한 그림에 큰돈을 쓰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은 말 안 해도 짐작이 간다.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둘기 한 쌍이 차가 다가가는데도 열심히 먹이를 쫓는다. 옆에 탄 아내가 ‘저 비둘기!’ 한다. 모르는 척 차 속도를 줄이지 않으니까 아내가 운전대 잡은 내 팔을 잡는다. 순간 푸드득 하며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왜, 비둘기가 깔려죽을까 봐?’
내 심술이 비둘기를 죽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 알아서 튀어오를 것을 이미 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의 풍경은 늘 이렇다. 문을 여니 또 그 뻐꾸기가 노래한다. ‘뻐꾹뻐꾹!’ 그때 섬광처럼 난 참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일었다.
수십억 원, 아니 수백만 원이라도 주고 그림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화가가 그린 그림이 창문 열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림 속의 새가 노래할 수 있을까? 내 창문 밖에서 전개되는 그림은 색깔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바람을 불어주기도 한다. 그림은 한 번 그려놓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린 그림은 계절을 따라 자동으로 변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시간의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위작 논란은 더더욱 없다. 그분이 짓지 않았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를 인간들은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화가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긴 있다. 화가가 없는 그림이 있다고?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 화가의 이름을 모를 수는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 아침도 문을 여니 여지없이 그 화가가 그려놓은 녹색 그림이 전개된다. 아! 행복하다. 돈 한 푼 안 치렀지만 이 그림의 주인은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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