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쟁점 중앙에 있는 현대차 지부
최근 수년간 우리나라 노동운동이나 정치 쟁점에는 종종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현대차 지부가 자리 잡고 있다. 현대차 지부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관심사며 특히 파업과 관련해서는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항상 1면 톱 기사로 보도되고 있다.
현대차 지부는 보수언론이나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보수단체로부터 '불법파업 집단' 또는 '귀족노조'로 불리며 이런 이미지가 수많은 국민에게 각인되어왔다.
이 점은 지난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촉발된 '한미FTA 반대'때 극에 달했다. 민주노총 총파업 때 동참한 현대차 지부는 이른바 불법정치파업을 한다며 뭇매를 맞았다. 이때 꼭 들어가는 단어는 "경제가 어려운데"와 "귀족노조가…"이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과의 섣부른 협상을 통해 자초한 '촛불민심'이 지난 5월 2일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을 기점으로 촛불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고, 울산에서도 촛불집회와 거리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6월 10일 전국 100만 촛불집회에서는 성난 민심이 극에 달했고 미국과의 재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정권퇴진으로 번졌다. 하지만 정부가 재협상을 끝내 거부하면서 울산에서도 이를 규탄하는 촛불집회가 잇따르고 있다.
촛불에서도 현대차 지부가 또 세간의 관심이 됐다. 시민단체로부터 그동안 "촛불집회에 소극적이다"는 지적까지 받던 현대차 지부 조합원은 지난 6월 10일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정상근무를 한 후 2시간 잔업을 거부한 채 촛불집회가 열리는 울산대공원 동문광장에 모였다.
시민단체는 되레 섭섭함 표시
현대차 지부 전체 조합원은 4만4000여명. 6·10 촛불집회에 참석한 현대차지부 조합원은 이날 주간조 근무를 한 2만2000여명 중 10% 정도에 불과했다. 시민단체 등에서 "너무 적게 왔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런 불만에 하부영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힘든 일을 한 조합원들은 너무 배가 고프고 고달프다. 이해해 달라"고 했다.
6·10을 전후해 보수언론 등에서는 현대차 지부의 이날 촛불집회 참가가 불법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검찰은 "사측의 고발이 없어도 주동자를 사법처리하겠다"고 했다. 현대차 지부와 민주노총은 "8시간 정상근무 후 참가했는데, 왜 불법이냐"고 맞섰다.
현대차 사측은 18일 미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지난 10일 2시간 동안 잔업을 거부한 혐의로 윤해모 현대차 지부장 등 노조 지도부 5명을 울산 동부경찰서에 고소했다.
특히 민주노총이 미 쇠고기 재협상 등을 위해 7월 2일 하루 벌이는 총파업 찬반투표 중 현대차 지부의 투표 결과를 두고도 논란이 일고 있다. 아니, 논란을 만드는 곳은 보수언론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지난 한미FTA 파업 참가 때 보수언론이 제기한 "울산시민의 반발"이 이번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파업 참가에는 "현대차 지부 내부의 조합원 반발"로 확대 부각되고 있다. 신문들은 "현대차 지부 홈페이지 게시판에 '우리가 왜 이런 파업에 참가하나'는 조합원의 불만이 빗발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발단은 현대차 지부의 '광우병 협상 전면 무효화 및 재협상' 등 민주노총 파업 찬반 투표 결과다. 지난 12~13일 실시한 투표 결과 참여 조합원 3만8637명 가운데 2만1618명이 찬성(55.95%)한 것. 역대 파업 찬성률 중 가장 낮은 수치다. 현대차 지부는 지난 16일 저녁 투표결과를 발표하면서 "총파업을 가결했다"고 밝혔지만 다음날 대다수 언론들은 1면 톱으로 "현대차 지부 파업 참가가 사실상 부결됐다"고 보도했다.
전체 조합원수 4만4000여명에 대비할 경우 찬성률이 48.5%로 과반수에 못 미쳐 부결이라는 것. 역풍이 거셌다. 언론들은 "조합원들이 '이제 파업이 지겹다'며 홈페이지에 항의글을 속속 올리고 있다"고 또다시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재협상 요구가 정치파업?
전국금속노조 정갑득 위원장은 17일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에서 현대차 지부의 단체행동을 집중 부각하고 있는데, 이는 산별 노사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빚어진 잘못된 보도"라고 했다.
산별노조 시대를 맞아 현대차 지부는 금속노조의 1개 지부에 불과하고, 파업 결정 여부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금속노조는 현대차 지부를 볼모로 한 투쟁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현대차 지부는 금속노조에 있어 중요한 힘의 원천인 만큼 현대차 지부를 앞장세우는 투쟁이 아니라 15만명 조합원의 권익을 위해 싸우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차 지부도 17일 성명을 내고 "찬반투표 결과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규약상 해석이나 법적인 해석을 하더라도 분명히 가결되었음 다시 한번 천명한다"며 "과거 현대차 노조의 규약이면 당연히 부결이라는 판단이 맞지만 현재는 금속노조에 소속되어 있는 지부이기에 금속노조 총 투표 결과 재적 대비 57%는 가결된 것"이라고 재차 밝혔다.
하지만 문제는 보수언론의 지적을 떠나 현대차 지부 일부 조합원들의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부결 논란을 일으킬 만큼 찬성표가 적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
이런 분위기를 시민단체가 일갈하고 나섰다. 울산시민연대 김태근 공동대표는 언론사 인터뷰에서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노동조합으로 가기 위해서는 국민적 관심사인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문제와 관련해 노동자들 역시 정당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찬반투표 부결논란 자체는 유감스럽다"고 했다.
그러자 일부에서 "시민단체가 파업을 조장하는가"라고 항의했고, 김태근 대표는 "쇠고기 수입문제에 대한 노동조합의 자기발언, 가장 강력한 형태의 발언인 파업을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런 생각에서 이번 파업찬반투표가 부결논란에 휩싸인 것은 유감이다"고 재차 밝혔다.
이런 전체 분위기를 종합해 볼 때 노동의 메카로 불리던 울산이 급격히 보수화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 국내 최대 강성노조로 불리던 현대중공업 노조가 보수화된 후 현대자동차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지난 20여 년간 노동운동사를 통해 이런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노동운동 바통 비정규직 노동자로 가나
지난 1987년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 때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이른바 '6·29 선언'을 한다. 20년 전 시민들이 들고일어난 6·10항쟁에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6·29선언이 있기 전 우리나라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 환경은 그야말로 열악 그 자체였다. 빵 공장이나 조선소, 자동차 공장 할 것 없이 그만그만한 근로환경과 임금수준이었다.
6·29 선언 후 노동자들의 불만이 봇물처럼 터졌다. 사회적 분위기가 노동자들의 분노 표출을 막지 못했다. 영업이 잘되는 회사에서는 한 해 30% 임금 인상이 있기도 했다. 이후 10여년간 고부가가치 산업인 조선·자동차 노동자의 임금이 다른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올랐다. 여력이 안 되는 빵 공장 등은 문을 닫았다.
울산 동구에 있는 현대중공업 노조는 89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급격한 임금 인상을 이뤄냈다. 조선소 노동자의 근로 특성상 인상 폭이 컸다. 자동차와는 또 달리 기술집약적이고 겨울 찬바람과 여름 땡볕을 극복해야 하는 일하는 환경도 한 몫 했다.
2000년대 들어와 현대중공업 노조의 보수화가 여러 경로로 감지됐다. 십수년 채 무분규 임단협 타결과 노사화합이 언론에 대서특필 됐다. 하지만 기업존재의 목적인 이윤추구 특성상 상대적으로 또다른 노동자가 양산되고 있었다. 비정규직이다.
2004년 2월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씨는 이런 점을 규탄하는 유서를 쓰고 분신했다. 급기야 분신사건 후 사태해결에 임하는 상반된 태도 때문에 민주노총과 현대중공업 노조 간의 갈등이 고조됐다.
현대중공업은 매월 상급단체에 납부하는 연맹비 1억여원의 납입을 2~3월 두달 째 중단했고, 급기야 민주노총은 2004년 3월 현대중공업 노조를 제명하기에 이른다. 민주노총은 조직의 가장 큰 세력과 자금원을 포기하면서 읍참마속을 한 것이다.
이와 달리 현대자동차 지부는 꿋꿋이 민주노총의 주력으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주도해 왔다. 하지만 최근 이상기류가 감지되면서 급기야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파업 투표에서도 부결논란까지 이르게 했다.
이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분석은 이렇다. 현대자동차도 2~3년 내 현대중공업 노조화 될 가능성이 커다는 것. 현대자동차의 사세가 급속히 커지던 지난 86~89년 기간에 입사한 조합원이 상당수인데, 이들이 이제 중년이 돼 소위 현대중공업 노조화 되고 있다는 것.
익명을 요구한 현대차 지부 조합원은 "이 연령 때 조합원은 2~3년 후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며 "파업 투쟁에서 얻는 것보다 회사와 협조해 학자금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많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우리나라 노동운동 역사를 새로 쓰면서 노동 환경 개선에 일익을 담당해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이들 조합원의 생각을 바꾸는 사이 우후죽순 양산된 비정규직들이 그 바통을 다시 이어받는 역사 순환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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