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난한 시인이다. 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설명하기조차 어렵다. 부자 시인, 이란 것도 있을까?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질주하는 현대 문명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버티면서 시를 써왔고 앞으로 그러할 것이다.
요즘 나는 거리에서 써지는 붉은 시(詩)들을 본다. 유모차에 있는 어린아이부터 백발의 어른들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힘 있게 써내는 불꽃들이 시보다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것을 본다.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얼굴들이 각자의 크기로 피워내고 있는, 뜨거운 붉은색, 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빛들에 대해서.
촛불을 켜고 두 손을 모으면 촛불은 가슴께에서 조금씩 타오른다. 심장 근처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그 사람의 손놀림에 따라 불의 크기는 달라진다. 서로 촛불을 나눌 때에도 사람들은 심장 근처에서 심장 근처로 이동한다. 나는 자신의 박동 소리도 옆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갖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촛불을 하늘 높이 올려 구호를 외치기 전, 첫 불씨를 왜 심장 근처에서 틔우는 걸까.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는 허리께나 어깨, 머리 위 등에서 불씨를 틔우지 않는다. 불을 붙일 때면 자연스럽게 두 손은 심장 근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시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나는 사람들 각각이 써내는 이 생생하고 아름다운 시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컨테이너 박스를 쌓고 그 위에 기름까지 바르는 전대미문의 ‘명박산성’의 상상력. 군화발로 짓밟고 물대포를 쏘고 소화기 분말을 난사하는 폭력성. 그러나 사람들은 비폭력을 외치며 걷고, 걷다가 멈추고,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른다.
오히려 평화로워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선배들도 있다. 곳곳에서 자유발언과 톡톡 튀는 구호들이 넘쳐난다. 십대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의 의견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아이들은 젊은 부모 옆에서 함께 전단지를 들고 생기발랄하게 거리를 누빈다. 굴곡 많은 한국 사회의 집회 문화는 비극적인 전투에서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축제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
고통을 축제로 승화하는 능력, 거리에서 모두가 시를 쓰는 능력, 예술적인 영역으로 확장해가는 능력을 우리는 어느새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불꽃은 이미 현 정부의 폭력성을 뛰어 넘었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마음속에서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현실의 문제는 아직도 산적해 있다. 시민들이 끊임없이 거리로 나오고 있지만 광우병 문제부터 대운하까지 실질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래서 이 소통의 거대한 광장이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모든 사람들이 대단한 이념을 가지고 가슴속에서 불꽃을 끄집어낸 것은 아니다.
다만 광장에서 서로 만나고 서로의 마음속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자 하는 소박한 소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권리이다. 이 작은 소망들이 만나서 하루하루 마음을 나누다가 뜨거운 시를 써내게 된 것은 오로지 ‘올바름과 진실’을 향한 갈구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통은 가장 예민하고 정치적 행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십대들로부터 촉발된, 너무나 투명한 것이다.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인터넷에서 서로의 의견과 정성을 나누는 네티즌들도 아름답다. 한 번이라도 촛불을 켜본다면 왜 심장 근처에서 불씨를 틔우게 되는지 알게 된다. 인터넷 생중계를 보고 왜 심장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뛰는지 알게 된다. 오로지 그것은 하나다. 제대로 살기 위한 사람들의 당연하고 진실한 소망.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가 써내는 붉고 뜨겁고 아름다운 시 한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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