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63년 봄 구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산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합격선이 전북에서 두 번째로 높았고 경쟁률도 치열했기 때문에 합격통지서는 승전보와 같았고, 입학식에 가는 발걸음도 개선장군처럼 당당했습니다.
반편성에서 1학년 6반으로 배정을 받았는데, 담임은 연로하신 수학선생님이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니까, 시골 출신들은 말이 없는데, 2년 전 학구제 개편으로 헤어졌던 시내 친구들은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습니다.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던 당시 교실 분위기가 눈앞에 그려지네요.
반장은 전체 6등으로 합격한 ‘일성’이가 맡았고, 회계는 학생들의 추천을 받아 동의를 얻는 형식으로 뽑았는데요. 영광스럽게도 제가 회계 벼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두 군데 다녔고, 주위에 친한 친구들이 많았던 게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졸업한 구암초등학교는 시내에 있기는 했지만, 변두리라서 6학년 남자반이 두 학급밖에 없었고, 함께 합격한 친구도 10명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천을 받아야 하는 학급 간부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제가 회계가 된 것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학맥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5학년) 6월까지 다니던 중앙초등학교(당시 전교생이 5천 명이었음) 동창 중에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정인’이가 저를 추천했고 다른 친구들이 박수로 동의를 해주었거든요.
친구들의 추천과 박수는 훗날 ‘학급비로 자장면 사먹고 선생님에게 귀뺨 맞은 사건’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자장면 사건'의 단초가 된 '환경정리'
마냥 즐겁기만 했던 입학 분위기가 점점 식어가는 5월쯤으로 기억됩니다. 하루는 학급회의가 시작되기 전 선생님이 “이번에 학교 전체적으로 환경정리를 실시한다. 그러니 어떻게 허믄 우리 반이 우수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회의를 혀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말씀에는 더러워진 벽과 복도를 깨끗이 닦고 교실 뒤 게시판에 걸어놓을 글과 그림들을 아름답게 꾸며보라는 뜻이 담겨 있었는데요. 이런저런 의견이 나왔지만, 청소시간에 열심히 하자는 의견 외에는 별다른 안이 없었습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제가 의견을 내놨습니다. 구암초등학교 6학년 때 경험을 살려 교실과 복도에 치자나무 물을 들이고 벽에 하얀 회를 바르면 깨끗하고 치자향이 나는 아늑한 교실로 거듭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맡아 실행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는데, 지금 생각해도 획기적인 제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의가 끝나고도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습니다. 교실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끼고 있어 다른 반에 비해 청소 공간이 넓어 저도 불만이었으니까요. 책임자가 되어 그들을 이해시키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학급비로 자장면을 사먹다
우여곡절 끝에 저까지 일꾼 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이름은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한 친구도 있었는데, 저를 회계로 추천했던 ‘정인’이와 친하게 지내던 ‘철기’ 그리고 짝꿍이었던 ‘승길’이가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평일에는 수업해야 하니까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밖에 없었습니다. 해서 토요일 오후에는 모든 준비물을 교실로 날라놓고, 일요일에 회도 바르고 복도와 교실 바닥에 치자나무 물을 들이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즐겁게 놀아야 할 일요일에 먼지를 둘러쓰면서 일을 하자는 의견에 따라준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처음에는 불평하던 친구들도 학급비를 내면서 고생한다며 격려를 해주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친구들 호응에 우리는 흥이 났고 토요일 오후부터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일요일에도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면서도 짜증을 내는 친구가 없었으니까요.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한 덕에 해가 지기 전에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노랗게 물든 복도와 하얗게 변한 벽, 그리고 치자나무 향이 그윽한 교실에서 성취감을 만끽하며 서로 칭찬하고 기쁨도 나누었습니다.
‘애들이 내일 학교에 오면 놀라겠다’라며 웃고 즐거워할 때, 제가 “다를 배고프지 않으냐? 점심도 굶어가면서 일을 했으니 학급비로 자장면 한 그릇씩 사먹자!”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해에 라면이 처음 나왔는데, 한 개 7원이었고, 자장면 한 그릇에 2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의견에 모두 좋아하면서도 꺼림칙한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책임지고 내일 애들에게 허락받아내겠다”라며 “우리가 점심도 굶어가면서 고생하고 배가 고파서 자장면을 사먹었다고 하면 이해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하자!’며 모두 중국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군산여고 가는 길에 있던 ‘경화춘’에서 120원을 주고 자장면 여섯 그릇을 사먹었습니다. 지금도 배고플 때 먹는 자장면은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맛이 그만입니다. 그런데 찐 고구마를 도시락으로 싸오고 굶는 아이들도 상당수였던 시절에 점심을 거르며 일을 한 뒤 먹은 자장면 맛을 어떻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담임에게 귀뺨 맞고 자장면 값도 물어내고
월요일 아침 등굣길은 무척 상쾌했습니다. 반겨줄 친구들 얼굴을 생각하니 발걸음도 가볍더라고요. 교실에 들어서자 예상대로 친구들이 손뼉을 치면서 환호성을 지르더군요. 용기를 얻은 저는 교단에 올라가 전날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설명했습니다.
친구들에게 환호성으로 허락을 받은 저는 담임 선생님에게 보고하려고 그동안의 입출금 명세와 사용처가 적힌 회계보고서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선생님 허락도 없이 자장면을 사먹어 혼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편 찜찜하기도 했습니다.
유리창에 한지를 붙인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철렁하더라고요. 하긴 평소에도 교무실에 가면 괜히 가슴이 뛰었으니까요. 그래도 선생님 옆으로 다가가 회계보고서를 내놓고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선생님은 자장면 여섯 그릇을 사먹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손으로 제 뺨을 훔쳤는데 눈에서 별이 번쩍하더라고요. 선생님들이 보고 있는데도 창피는커녕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슬픈 생각만 들었습니다.
“이놈들아! 누가 느들더러 학급비 가지고 자장면 사먹으라고 혔냐! 토요일까지 걷어서 당장 가져와!”
쓸데없는 호기를 부렸다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혼내시면서 당장 돈을 가져오라고 해도 할 말이 없고요. 그러나 선생님들 앞에서 귀뺨을 맞을 정도로 잘못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으로 남습니다.
눈에 불이 나도록 귀뺨을 맞고 교실로 돌아온 저는 친구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20원씩을 걷어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제가 뺨을 맞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친구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돈을 돌려주더라고요.
점심을 거르며 일하고 맛있게 먹은 자장면 값을 걷어 선생님에게 드린 것까지는 그래도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추억입니다. 그러나 다음 대목은 가슴 아픈 추억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돈을 받으신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저에게 계속 회계를 맡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회수한 학급비 8백여 원을 졸업 후 지금까지도 내놓지 않고 계시거든요. 동창회 모임 때 ‘자장면 사건’을 얘기하며 웃은 적이 있는데요, 학급비는 학생들 돈이니까, 지금이라도 반창회를 열어 받으러 갈 것을 결의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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