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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오로지 조국을 위한 마음하나 만으로 귀한 생명을 바쳤던 학도병.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둔 동기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린다"는 고남화(78) 전역 대령 또한 제주 학도병 출신이다. 그는 학도군사훈련 1기생이며 학도호국대장을 지내기도 했었다.

제주 4.3 사건이 난 후 부터 제주는 이른바 '산폭도'들에 의해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그들은 한라산에 숨어서 일본군이 쓰던 소총을 구해와 경찰서를 공격하고 민가를 습격했다. 죽창으로 부녀자를 찌르고 돼지며 곡식들을 있는 대로 탈취해 갔다. 이런 사건을 목격하던 그는 그때 당시 19살. 이런 일을 겪으며 '보편적 선(善)'에 의한 인식론적 우선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교복 대신 군복을, 연필 대신 총을 잡은 시절
▲ 학도병으로 출병했을 당시 사진 교복 대신 군복을, 연필 대신 총을 잡은 시절
ⓒ 김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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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어요? 그러나 자진해서 나갔지요."

당시 어지러웠던 나라의 분위기에 교사들도 암암리에 군사훈련을 인정했었다고 한다. 군사훈련을 받고 나자 6.25사변이 일어났다. 방송과 신문 등이 난리가 났었고 나라 전체가 뒤숭숭했다. 피난민은 제주까지 마구 밀려 내려왔다.

"나라가 안전하지 못하니까 우리도 이럴 때 학생들이 나서서 뭔가 하자! 우리도 군대 가자!", 이런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당시 제주는 해병계엄사령관이 지휘하고 있던 터라 많은 학생이 해병대 지원을 많이 했다. "우리는 군사 작전 시 필요한 수학공식을 배운 똑똑한 학생들이 필요하다"며 도리어 해병대가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는 "17~18살 되는 아이들이 나라를 위해서 한뜻이 되었던 그때가 있었다"고 강조한다.

40여년 뒤 아무도 생각지 않은 일을 벌이다

고남화 전 대령은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전우들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고남화 전 대령은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전우들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김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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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6.25 당시 학도병을 자원하고 나선 그가 숨진 동료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1993년에 모교인 제주농업중학교(현 제주고등학교)를 처음 방문했었다. 6.25사변이 난후 학생들이 교복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은 지 40여년이 흘렀는데도 학교에는 상징적인 탑이나 상징물이 전혀 없었다.

그는 "전사한 학생들에 대한 그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이 매우 가슴 아팠어요. 나라를 위해 37명이나 죽었는데 뭔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세워야겠다고 결심했었죠."

이런 뜻이 알려지면서 그는 추진위원장으로 세워졌다. 당시 서울에서 살았던 터라 서울과 제주를 오가느라 돈도 많이 들고 힘들었다며 웃는다. 위원장이 된 후 동창이 법성사라는 제주도의 아주 큰 절을 지었다고 해서 법회를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맨 끝에 앉아서 그야말로 법회를 구경이나 하던 참이었다.

법회가 끝나서 가려고 하니까 "무슨 영가를 그렇게 모시고 다니냐? 다리 없는 군인, 철모 쓴 군인들이 보인다. 자네를 쫓아다니고 있네"라는 스님의 말이 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37명의 축의문을 포켓에 넣고 다니고 있었다는 그는 그 후부터 영혼의 존재를 믿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도 안한 꽃다운 나이에 죽은 영혼들을 위해 천도제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고동 쳤죠"라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천도제를 지내던 날 어떤 스님은 "참 감격스런 일을 봤다. 통상 자식이나 부모를 위한 천도제는 봤어도 죽은 친구를 위한 천도제는 처음 봤다"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고. 이 일이 그 당시 <한라일보>에 대서특필 된 이후에 동창들은 십시일반 적은 돈을 모아서 학교 양지원이라는 공원터에 학도병 추념비를 드디어 세우게 된 것이다. 40년도 더 흐른 후에 말이다.

겸손함과 순수함. 별명은 우리 동네 '회장님'

그는 일명 '고 회장님'으로도 통한다. 7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등산을 좋아해 산악회장을 하기도 하지만 '재경제주도민회장'도 했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그 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령부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그렇지만 그의 아내도 그게 뭐 대단한 거라며 손사래를 친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령 부부
 우리나라 최초의 대령 부부
ⓒ 김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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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던 고남화 전 대령. 더 좋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학도병으로 지원하고 모두가 잊어갈 무렵에는 온 맘과 시간과 돈을 투자해 전우들의 공을 높인 고남화 전 대령. 자신보다 남을 그리고 나라의 미래를 늘 걱정하며 기도한다.

인터뷰하러 간 그의 집은 따로 기도방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잘나고 똑똑하고 우수 했었노라고 전혀 말하지 않는다.  주위에서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산 사람임이 드러난다. 원래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보다 '드러나는' 사람이 진짜배기인 법.

6.25와 전사자를 기억하다! 그리고 조국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다

매년 6월 6일 제주고등학교의 추념비 앞은 북적인다. 제주도에서 학도병을 위한 추념비는 이곳뿐이다. 그 날은 정관계 인사들까지 모두 모여 나라를 위해 꽃다운 시절을 희생한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념행사를 갖는다.

한 번은 참 희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사찰에 있던 영혼들을 추념비로 옮기는 이른바 '영혼을 옮기는 의식'을 거행하던 중 학도병들의 이름이 적힌 지방을 태워야 하는데 타지 않았던 것. 그래서 마음으로 속으로 '이제 평안히 쉬고 천국으로 가소서'라며 간절히 넋을 위로하자마자 불이 다시 붙고 사르르 눈 녹듯이 하늘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기자와 종교가 다른 탓에 이 부분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할 정도로 상대를 존중해 주는 분이였다. 그의 따뜻한 배려와 사람에 대한 애정만큼은 종교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 충분히 존경할만한 분이였다.

1994년도 세워진 이 탑은 37명의 학도병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매년 6월 6일 추모식이 이곳에서 열린다.
▲ 학도병을 위한 추모기념탑 1994년도 세워진 이 탑은 37명의 학도병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매년 6월 6일 추모식이 이곳에서 열린다.
ⓒ 고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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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학도병, #6.25전쟁,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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