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슬이 시퍼렇던 야간 통행금지 시대

야간 통행금지 서슬이 시퍼렇던 1960~70년대에 수원이나 인천으로 가는 버스터미널 부근에는 총알택시라는 게 있었다. 막차가 끊어진 밤 11시 30분 무렵에 대목인 이 택시는 통금에 쫓기는 승객을 태우고 시속 150킬로가 넘게 달려 목적지까지 눈 깜짝할 사이 데려다 주었다. 총알처럼 달린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승객 처지에서는 통금에 묶여 파출소나 여관에 가는 것보다는 보통 때의 두세 배 택시비를 주고라도 총알택시를 타고 가는 게 가정의 평화나 경제적으로 이익이었기에 많이들 이용하였다.

그 무렵 나도 총알택시를 한번 타본 적이 있었다. 수원에 사는 친지를 찾아가려고 수원행 버스정류장(지금의 중구 저동 쌍룡빌딩 옆)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 수원행 버스가 막 출발한 뒤였다. 다음 버스는 한 시간 뒤로 아무래도 약속시간을 어길 것 같았다. 그때 한 사나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택시 타기를 권유했다.

곧 택시는 나 외에 두 사람의 승객을 더 태우고는 출발했다.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속도계는 150을 넘어 160을 오르내렸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활주로를 달리는 기분으로, 수원에 이르기까지 초긴장 상태로 머리털이 쭈뼛쭈뼛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총알택시 문화는 그무렵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었다. 1970년대 초 남북회담을 앞두고 통일로 공사를 한 건설회사가 49일 만에 공사를 마치고는 무슨 무용담이나 신화처럼 자랑하던 시절이었다. 준공식장 언저리에는 잔디 대신에 보리를 캐어다가, 민둥산에는 나무를 베어다가 옮겨 심어 눈가림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 시절 '빨리 빨리' 졸속 문화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로 인해 숱한 인명이 사고로 다치거나 죽고, 부실공사로 그 뒤 추가비용이 몇 배가 더 들어간지도 모른다.

 '빨리, 빨리' 문화는 때로는 돌이킬 수없는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은 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119대원들이 구조활동을 펼치고 있는 광경
 '빨리, 빨리' 문화는 때로는 돌이킬 수없는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은 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119대원들이 구조활동을 펼치고 있는 광경
ⓒ 송탄소방서

관련사진보기



참 꿈도 야무지다

21세기를 사는 오늘 대한민국 백성들은 그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은 듯, 그 시절 총알택시 기사 같은 이를, 건설회사 십장 같은 이를, 나라의 조타수로 앉히고는 그 시절 무용담이나 신화가 재현되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가까운 친구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다음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들려줬다.

총알택시 기사와 목사가 같은 시간에 죽어서 염라대왕 앞으로 갔더란다. 그런데 염라대왕은 운전자를 곧 천국으로 보내고 목사는 저승에 대기를 시켰다. 목사가 기가 막혀 염라대왕께 물었다.

"도대체 왜 성직자인 저는 대기시키고 총알택시 기사는 바로 천국으로 보냈습니까?"

그러자 염라대왕이 말했다.

"목사인 당신은 설교할 때 신도들이 모두 졸았지만, 총알택시 기사가 차를 몰 때는 모두들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오."

우리는 지금 총알택시기사에게 나라를 맡겨놓고는 그에게 안전운행을 요구하면서, 거기다가 도덕성과 품위를 바라며, 초고속으로 선진국에 이르기까지 달려 주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백성들이 마냥 어리석다고나 할까? 참 꿈도 야무지다고 할까?  


#총알택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