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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탄금대(彈琴臺)도 기억한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희망은 이곳 탄금대에 있었고, 이곳에서 왜병을 저지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임진왜란을 언급하면서 빠질 수 없는 전투가 탄금대전투이며, 이곳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조정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탄금대의 패배는 조선을 가히 바람 앞의 등불로 내몰았던 것이다.

나와 내 후배의 충주 당일치기 도보답사의 마지막 목표는 바로 이곳이었다. 중원고구려비에서 계속 걸어서 탄금대로 오기로 하였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탄금대. 우리는 탄금호를 지나 탄금대로 걸어갔다.

충주 탄금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신라 진흥왕대의 가야 출신 악사였던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였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러한 운치 있는 전설을 가진 탄금대이지만, 다른 이면엔 피로 물들어진 역사가 아로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가야금의 운치와 한의 핏줄기가 새겨진 탄금대에 오르다

탄금대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장군과 수많은 조선군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든 탑이다.
▲ 판천고혼 위령탑. 탄금대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장군과 수많은 조선군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든 탑이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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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는 지금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다. 충주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관광객들도 산책을 하면서 둘러 볼 수 있도록 꾸며진 것이 특징이다.

탄금대는 몇몇 산성처럼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경남 진주의 진주성이랄지, 충남 부여의 부소산성처럼 성 곳곳에 애국심을 자아낼 만한 요소들을 만들어 놓았다. 대표적으로 충혼탑과 팔천고혼위령탑이 그것이다.

탄금대의 충혼탑은 1955년에 세워진 것으로서 광복 이후 전몰한 충주와 중원지역의 장병들, 그리고 경찰관 군속 군노무자인 2838위의 넋을 추모하고자 건립되었다. 2004년 5월 충주시에선 호국영령의 위패 안치실을 건립하였고 그 위에 이 탑을 옮겨놓았다고 한다.

충혼탑을 지나 계속 걸어 나가다 보면 팔천고혼위령탑이 세워져있다. 이는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장군과 그와 함께 싸웠던 8천명의 군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탑이다. 이 탑의 위에는 혼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모습으로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신립장군과 4인의 군상을 조각해 놓아 죽음으로서 국토를 지키는 불굴의 충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바위와 바닥 부분의 원반모양은 탄금대를 싸고 도는 남한강과 달천의 물결모양을 살려 구성한 것이며, 탑 뒷부분의 부조는 당시 탄금대전투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 외에도 ‘탄금대기’가 적혀있는 비석도 있다. 그리고 돌과 콘크리트로 정자를 하나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올라가서 남한강을 조망할 수 있게 해놓았다. 단양 온달산성도 이렇게 석제 정자가 있긴 하지만, 목제 정자만큼의 운치는 나지 않고 또한 인공적인 느낌이 풍긴다는 점에서 썩 좋지는 않다.

정자는 탄금대의 절벽과 맞닿아있다. 당시 일본군에게 밀렸던 조선군은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파란 강물이 보이고 험한 절벽이 보이는 곳. 이곳에서 뚫리면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신립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사지(死地)에 간 것이다. 사지에서 단순히 죽음만을 기다린 것이 아닌, 왜군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길 것이라고 다짐하였기에.

신립의 패전, 그 원인은 프라이드 때문인가?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한 신립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서, 1981년에 세워진 것이다.
▲ 신립장군 순절비.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한 신립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서, 1981년에 세워진 것이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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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의하면 유성룡과 신립의 대화가 보인다. 이때는 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일로서 신립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조만간 변란이 있게 되면, 공이 마땅히 맡게 될 것이요,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적세(敵勢)가 어떠하오?”

유성룡이 이렇게 물어보았으나, 신립은 심히 일본을 가볍게 보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성룡은 일본은 과거에 근접전 무기만 애용하였으나 지금은 조총을 이용한다고 말하였으나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나 어찌 다 맞추리오”라면서 반문하였다. 그러자 유성룡이 말하였다.

“국가가 평화를 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사졸이 겁내고 약하니 만약 급한 일이 있다면 사세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의 생각으로는 수년 뒤에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하여지면 혹 수습할 수 있겠으나 처음에는 알 수 없으니 나는 매우 걱정되오.”

하였으나, 신립은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하직하고 나아갔다고 한다. 유성룡이 지적하였던 조총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하나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신립 자신도 이 조총에 의하여 대패를 당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방에선 역전의 맹장이자 승승장구하였기에 신립은 다른 이의 지적을 듣고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부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태도, 이는 신립의 프라이드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에서 여진족들과 싸우면서 기마병으로 그들을 소탕하였던 신립은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던 인물로 보인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보면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이때 김여물도 신립을 따라갔었고, 김여물은 이렇게 간언한다.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김여물의 간언은 신립의 한 마디에 무시된다.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다산 정약용, 탄금대를 바라보며 한탄하다

탄금대전투는 이곳을 등 뒤로 삼은 배수진을 쳐서 싸웠다. 하지만 결국 패배하게되고, 신립은 이곳으로 몸을 던지게 된다.
▲ 탄금대에서 바라본 탄금호. 탄금대전투는 이곳을 등 뒤로 삼은 배수진을 쳐서 싸웠다. 하지만 결국 패배하게되고, 신립은 이곳으로 몸을 던지게 된다.
ⓒ 송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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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은 애초에 기마병을 염두해두고 작전을 짰다. 신립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기마병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였는데, 중무장시킨 조선의 기병을 이용하여 여진족에게 돌격하는 식의 전술을 애용하였다. 신립은 이게 일본군에게도 똑같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그대로 적용한다.

기마병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산보다는 들이 제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험의 요새인 조령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신의 예를 들어 아군에게 배수진을 치게 하였다. 배수진은 정말 극단적인 처방이다. 죽음 아니면 승리라는 공식을 두는 것이 배수진인데, 이는 치밀한 작전과 아군의 예봉이 적에게 강타하였을 때 분위기를 타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상대는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둘 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일본의 장군으로서 노련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조총이라는 무기를 이용하여 조선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신립의 특기는 기병의 돌격이었지만, 이는 조총들이 연이어서 공격하면서 허망하게 궤멸되었다. 조선군의 희망인 기병이 전멸됨으로 인하여 일본군은 탄금대를 향해 쳐들어오고, 조선군의 사기는 꺾여버린다. 이게 탄금대전투에서 패배한 주원인이며, 훗날 명나라 장군인 이여송도 이를 듣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이 탄금대에 대한 시를 여럿 남겼다. 그는 이 싸움을 굉장히 아쉬워하였으며 신립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다산이 살던 시절은 임진왜란이 한참 지난 뒤였지만, 후세의 사람으로서 선조의 잘못된 결정에 한탄 한 것은, 잘못된 역사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었으리라. <다산시문집>의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라는 시를 보면 그 당시 다산의 느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             嶺隘度盡地坼開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江心湧出彈琴臺
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좀 해봤으면                  欲起申砬與論事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啓門納寇奚爲哉
회음이 만약 성안 위치에 있었던들                     淮陰若在成安處
적치가 무슨 수로 정형을 통과했으리                  赤幟豈過井陘來
그때 우리는 조였으면서 한이 쓰던 꾀를 썼으니    我方爲趙計用漢
뱃전에 표했다가 칼 찾으러 나선 멍청이로세        鍥舟索劍眞不才
기 휘둘러 물 가리키며 물로 뛰어들었으니           麾旗指水入水去
목숨 바쳐 싸운 군대들 그 얼마나 가련한가          萬夫用命良可哀
지금도 밤이면 도깨비불이 출몰하여                   至今燐火夜深碧
길손들 간담을 섬뜩하게 만든다네                      空使行人肝膽摧

덧붙이는 글 | 2007년 11월 4일 충주 탄금대에 갔다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탄금대, #충주, #탄금대전투, #신립,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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