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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로 지정된 500년생 느티나무가 감싸고 있는 연미정. 정자의 초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을 이곳에 모아 놓고 면학케 했으며,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이 체결된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생 느티나무가 감싸고 있는 연미정. 정자의 초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을 이곳에 모아 놓고 면학케 했으며,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이 체결된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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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7일 저녁부터 29일 오전까지 강화도 오마이스쿨에서 열린 ‘시민기자 대회’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1월, ‘제1회 시민기자 기초강좌’를 받으며 기회가 있으면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오마이광장에 공지가 뜨고 회비도 3만 원이라고 하기에 ‘옳다구나!’ 하고 참석했지요.

사는 곳이 ‘부산’이다 보니 KTX 요금은 너무 비싸고, 무궁화호는 6시간 가까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 전(26일)에 출발하여 인천에 사는 둘째 누님과 하룻밤 보내고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새벽까지 정담을 나누느라 시민기자 포럼에 참석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주부(主婦)로 생활하다 몇 년 전부터 돈을 벌며 가장이 된 아내는 카드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옷도 사 입고 기차도 KTX를 이용하라고 말합니다. 고맙지요. 그러나 남자 주부로 변신해 살림을 해보니, 생각처럼 쉽게 사용할 수가 없더라고요.

27일 아침은 된장찌개를, 점심때는 만둣국을 먹으며 둘째 누님이 들려주는 옛날 얘기들을 메모했습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들려주는 얘기 대부분이 모르고 있던 사연들이어서 기사를 쓰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아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누님댁을 출발하면서부터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치약과 칫솔을 놓고 온 것은 그렇다 치고요. 시내버스를 잘 못 탄데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땀을 흘려야 했고, ‘합정’역에서 지하철을 잘 못 갈아타는 바람에 이만저만 고생한 게 아닙니다. 다행히 출발시각에 맞춰 ‘누리꿈스퀘어’에 도착했으나 9층까지만 운행하는 승강기를 타는 바람에 창피를 당했고, 겨우 18층 사무실에 도착해서 인사를 하려는 순간, 버스가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내려오라는 전화가 걸려와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강화행 버스에 오르기까지 일어났던 실수는 서울구경 온 시골영감이 벌이는 해프닝도 아니고,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오마이스쿨에 무사히 도착해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잠자리에 들었으니 재미있는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흘러드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연미정에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남북 분단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해병대 초소 모습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흘러드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연미정에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남북 분단을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아래는 해병대 초소 모습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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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에서 생각해 본 이명박 정권

이튿날 오전에는 '촛불은 한국 언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라는 주제로 MBC 시사교양국 한학수 PD의 강의를 듣고 점심을 먹은 뒤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국 군대와 격전의 전투를 벌였던 강성보에 들러 순국 영령들을 기리고, 강화팔경의 하나인 ‘연미정’(燕尾亭)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민통선 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돼오다 지난 4월에 개방한 연미정은 북한 땅이 마주 바라보이는 강화읍 월곳리 월곶돈대 내에 위치해 있으며,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연미’로 불린다고 합니다.  

태백산에서 시작, 천리 길을 굽이쳐온 한강과 마식령산맥에서 5백리 길을 흘러온 임진강이 섞어지는 지역에 위치한 연미정은 사방이 탁 트여 가슴이 시원했습니다. 그러나 비안개 자욱한 DMZ 속의 유도(流島)와 철조망, 그리고 보초병들이 분단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어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서해에서 만날 것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흐르는 한강과 임진강은 이념과 사상으로 표류하며 7천만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긴 우리의 현대사를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고 겨레의 삶이 동강 난 채 증오와 불신을 키우며 우리의 소중한 역량을 헛되이 소모해온 자화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고난의 시절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바다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엎어지고 갇히고 찢어지는 과정이 폭력을 동반한 탄압과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민중의 저력과 비교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대포에 시달리고 닭장 차에 갇히면서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비폭력 투쟁도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정부가 강경 진압을 천명하자 잔잔한 바다처럼 평화로웠던 민심이 분노하여 서서히 용솟음치고 있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겸손과 평화를 추구하는 바다 같은 민심을 외면하는 이명박 정권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늘의 뜻을 거역한 권력은 파멸을 가져왔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 되는군요. 

국립묘지에 잠든 옛 친구를 떠올리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서해는, 밀물 때 만난 바닷물이 한강과 임진강의 물줄기를 마중 나와 있는 것처럼 보였고, 고요가 흐르는 드넓은 강심에는 인적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저를 부르고 있다는 생각에 발길을 쉽게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왼쪽으로는 북한 땅이 자욱한 비안개를 뚫고 희미하게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김포 군이 보이더군요. 사진으로만 봐오던 고모님 모습과 1972년 해병대에 자원입대해서 김포에서 근무하다 제대를 몇 개월 앞두고 전사한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친구 ‘인’(仁)이의 중학교 앨범사진과 전사하기 몇 달 전 보내온 편지.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몇 달 동안 연락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좋은 친구였는데...
 친구 ‘인’(仁)이의 중학교 앨범사진과 전사하기 몇 달 전 보내온 편지.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몇 달 동안 연락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전사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좋은 친구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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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을 마친 시민기자님들은 역사의 현장에 대해 설명을 듣고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35년 전 전사한 친구를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고 상념에 젖느라 맨 마지막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는 1973년 봄에,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편지를 마지막으로 몇 달 동안 소식이 없더니 그해 여름에 전사했는데요. 그동안 보관해온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합니다.

난 머지않아 멀리 갈 것 같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지만 운명에만 맡기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뜻일세.(꼭 살아야만 하니까)

친구!
앞으로 나의 서신은 뜸할 것일세. 이해하고 재미있는 글은 계속 보내주게(요번에 보낸 주소 말고 직접 내게 보내주게) 언제나 건강과 사업이 안녕하고 번창하길 바라며 짧은 글 안부에 대신하네. 안녕을... 친구 ‘인’

친구가 보내온 편지 몇 통을 보관하고 있는데요.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이고 의문점이 많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군 의문사’라는 낱말도 없던 유신 시절, 친구의 죽음은 의문투성이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당시 부대 책임자는 밤에 수영하다 익사했다고 했는데요. 물놀이를 하다 익사한 부대원을 어떻게 전사로 처리해서 국군묘지에 안장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편지 내용을 보면 또다른 사유가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평소에는 편지 겉봉에 ‘경기도 김포군 지경부락’ 이나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라고 적어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편지에는 ‘해병 ㅇㅇ부대 10중대 2소대’라고 적고 다음 편지부터는 직접 보내달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제 곁을 영원히 떠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요. 

초등학교부터 함께 다녔던 친구는 이름이 ‘정 인’(鄭 仁)으로 외자입니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저를 학급 회계로 추천하는 등 수많은 추억을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떨어져 있었으나 고향의 동창들보다 자주 만났고 편지 왕래가 잦았던 죽마고우이지요. 그시절 라면 한 박스에 30개인 것도 그 친구 하숙집에 가서 알았으니까요. 호국의 달 6월을 보내면서 국립묘지에 외롭게 잠들어 있는 친구에게 마음의 편지를 띄워봅니다.
    


태그:#연미정,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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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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