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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 본부
 2008년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 본부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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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 때문인가? 일본에서 달리기를 하다 보면 왠지 모르게 묘한 정복의 쾌감을 느끼곤 한다. 뭔 놈의 질긴 감정들이 남아있기에 아직까지 서로 으르렁대는 관계인지…, 단순한 애증의 관계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그 골이 깊고 넓다.

지난 5월 18일 열린 2008년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 나의 고별 대회다. 물론 달리기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지난 5년간 노베야마 대회와의 질긴 인연을 올해로 마무리하고 이제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기존의 오지레이스, 울트라 마라톤에 덧붙여 트레일 레이스를 본격적으로 하려 한다. 6월·9월·10월에 연속적인 일본 대회와 유럽 대회를 준비 중인데 체력보강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평상시 운동 안 하고 현장 박치기로 대회에 임하는 나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노베야마여, 열심히 달릴 테니 딱 한 번만 다시 밀어주라!'

항상 이야기하지만, 나에게 있어 달리기는 여행이다. 처음 시작부터 기록하고는 관계없이 완주를 목적으로 달렸기에, 기록이란 것은 방종을 제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지 기록의 좋고 나쁨은 나에게는 별로 중요한 이슈가 못 된다.

'최고기록? 서브-3? 넌, 어느 별에서 오셨나요?'

'예술'과 '문화'로 승화된 일본의 달리기

산길을 달리는 코스가 많다.
 산길을 달리는 코스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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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달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렇지만 누구와 달리느냐에 따라 기준이 변하는 간사함도 있다. 올해 노베야마 대회는 3명의 일본 언니(?)들과 함께 했다. 물론 아주 젊은 미모의 아가씨들은 아니지만 수년간 여러 대회를 같이 달리며 친하게 지내오는 가족 같은 여성들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많이 가봐서 그리 낯설지 않은 동네다. 하지만 집 떠나면 남의 동네인지라 동행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안심되고 즐겁기 한이 없다. 하하하.

그동안 10번의 오지레이스와 여러 번의 울트라 마라톤를 완주하면서 몇 차례 부상을 당해봤다. 대부분 사소한 부상이라 별문제는 없었지만, 충주 100마일 런에서 접질린 발목과 베트남 레이스에서 돌아간 무릎은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노베야마 대회는 좌 비탈 우 비탈, 비포장의 험난한 코스로 악명을 떨치는 곳이다.

훈련이라도 착실히 했다면야 덜 걱정이 되겠지만, 언제나 '닐리리 맘보'다 보니 은근슬쩍 부담스럽다. 또다시 테이핑과 CW-X 압박 타이즈, 브룩스 신발, 인진지 양말에 의존하는 꼼수를 부려야겠다. 좋은 장비는 나에게 항상 힘과 용기를 준다.

일본의 실질적인 마라톤 대중화는 2007년 도쿄마라톤을 기점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은 마니아를 위한 마니아들의 잔치였지만 도쿄대회 이후 말 그대로 국민 스포츠로 확실한 뿌리를 내렸다. 평상시에도 도심지 공원에는 달리기족으로 넘쳐난다. 경찰도 안전사고를 대비해 항시 대기 중이고, 매장에는 다양한 용품들로 가득 차고 넘친다.

일본에서 달리기가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포츠를 '예술'로, '문화'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관련 협회·단체·업체 그리고 달림이 자신이 변하지 않고는 발전이 없다. 한국의 달리기를 사랑하는 이들도 각성하고 멋들어진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필요하다면 발전 방향에 대한 토론 및 연구도 기대한다.

'스타도'를 외치는 일본 영어

2008년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 출발선. '100km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2008년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 출발선. '100km 울트라 마라톤'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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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상하다지만 확실히 일본사람들의 영어발음은 이상하고 신비롭다. 미안한 소리지만, 그들의 발음을 듣다 보면 괜스레 내가 영어를 잘하는 듯한 자아도취에 빠지는 힘이 생긴다. 사실 별 차이 없는 영어 실력을 갖고 있지만 발음에서 오는 묘한 이질감은 콩글리시의 우수성을 부각시킨다. 오늘 현장에서 만난 일본 사람들 몇몇은 나의 이름표를 보더니 용감하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헤로우, 마이 네이무 이즈 기무라다쿠야. 나이스 투 미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상대방의 영어실력은 분명 기초회화 이상을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일본식 영어 발음에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모든 언어는 상대적이다. 우리 발음이 나쁘다고 '오렌지'를 '어륀지'로 교육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도 있다. 나도 예전에는 발음 교정하면서 나름 신경 써가며 영어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외국인들과의 대화 시 콩글리시를 전면에 내세운다. 왜? 난 한국 사람이거든!

'스타도!'라는 출발 신호와 함께 2000명의 참가자들이 눈 덮인 노베야마의 한 봉우리를 등지고 쏟아져 나간다. 일본 언니들과 그리고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사막 멤버들과 함께 출발선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다. 마지막 대회가 아쉬워서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주변의 분위기를 혼자서 음미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동화책 속의 건물같이 작고 아담한 노베야마 기차역, 주변을 둘러싼 녹색과 흰색의 산들, 출발 게이트, 익숙한 도로, 음식점 할머니, 민박집 주인아저씨도 보인다. 아, 그리고 변함없이 응원해주는 귀여운 치어리더들….

또 다른 도전을 위한 내일의 희망

물맛이 기가 막혔다.
 물맛이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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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5km를 지나 뭉쳐 있던 근육이 풀리자 한결 즐거운 달리기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마라톤을 마라닉(마라톤+피크닉) 즉, 마라톤 놀이(소풍·여행)라 부른다. 기가 막힌 발상이다. 역시 달리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즐겁게 즐기는 게 최고다.

눈 덮인 나가노의 고산들과 막 피어나고 있는 이름 모를 들풀들, 떠오르는 태양을 벗 삼아 상쾌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찾는 토끼처럼 새벽의 안개를 헤치며 숲 속을 달리니 어느덧 길이 보이고 사람들의 기차놀이가 시작된다.

나가노에서도 한참 시골인 이 마을을 달리다 보면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낯선 외지인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코흘리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이곳이 일본인지 놀라기도 하고, 우메보시(매실)를 한 손 가득 담고 지나가는 참가자들을 기다리는 노파의 해맑은 미소에서 잃어버린 순수함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분명히 오늘 날씨는 무덥고 뜨거운 하루였지만 이곳 산속에 있는 노천 온천은 약간의 한기가 돈다.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먼 길을 달려온 지친 근육들이 살 것 같다며 감격의 만세 삼창을 시작한다. 사실 운동 후에는 냉수욕이 근육 회복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물 좋은 이곳 나가노의 온천을 무시하고 냉수욕에 만족한다면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 같다.

71km의 멀지도 짧지도 않은 길을 달려오니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즐거웠던 과거와 현재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비 왕창 맞고 포기했던 첫 번째의 노베야마, 발목 부상으로 씨름했던 두 번째의 노베야마, 처음으로 완주했던 세 번째의 노베야마, 친구들과 함께 완주한 오늘의 노베야마. 이제는 추억 속의 사진으로 남는 아쉬움이 있지만 또 다른 도전을 위한 내일의 희망으로 남겨둔다.

'사요나라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아리가또 나의 친구들!'

완주의 기쁨은 국적이 따로 없다.
 완주의 기쁨은 국적이 따로 없다.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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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최종 기록은 10:04:47 - 전체 남자 순위 129등으로 즐거운 추억 한가지를 남겼다.



태그:#마라톤, #여행, #달리기, #등산, #울트라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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