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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오후 2시 시청역 5번 출구 앞이 분주해졌다.

 

'탁탁탁탁'

"○○○씨, 어디 계세요?"

"여기요, 여기로 올라오세요."

 

두세 명씩 짝지은 시각장애인들이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이용해 5번 출구로 나가고 있다. 내게 촛불집회로 익숙한 이곳. 이날은 촛불이 아닌 지팡이를 든 시각장애인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헌법재판소에 시각장애인 안마사 자격증 합헌 판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2006년 헌법재판소는 '안마사 자격증을 시각장애인에게만 부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그후 국회는 '자격증을 가진 시각장애인들만이 안마사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조문을 의료법에 포함시켜 사실상 시각장애인만 안마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비장애인 안마사들이 다시 의료법 위헌 소송을 걸었다. 지난 6월 12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개정 의료법 위헌 여부에 관한 공개 변론이 열렸다.

 

헌법을 배우고 있는 법대생으로서 안마사 자격증 공개 변론에 꼭 참석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당시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열리는 이날 집회에 참석했다. 그들의 절규를 가까이서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후 2시] 그들은 '촛불'과 닮았다

 

인천, 대구, 충청, 전남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수백 명의 시각장애인들이 시청 광장에 속속 모여들었다.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려고 온 지체장애인과 청각장애인들도 눈에 띄었다. 소나기가 오는 궂은 날씨 때문에 몇 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게 안쓰러웠지만 집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2006년 헌재의 위헌 판결이 나오자 시각장애인들의 반발은 거셌다. 일부 장애인들은 마포대교에서 투신하기도 했고, 고속도로를 막고 기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해 주위를 안타깝게 한 시각장애인 안마사도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시각장애인들의 시위가 촛불 집회보다 더 전투적인 분위기일 것이라 생각해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도 똑같은 우리나라 국민이었다. 촛불 집회에서 본 즐거운 분위기를 이 곳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 안마업권 보장 합헌촉구 범장애인계 결의대회'가 열린 이 곳 시청광장에서는 범장애인계 일동의 대국민 호소문이 낭독되었다.

 

범 장애인계일동 대국민 호소문

전 장애인이 2년 만에 국민 앞에 섰습니다. 2년 전과 똑같은 상황, 현실이라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안마업은 100여 년 전부터 시각장애인의 고유 직업으로 육성되어 왔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사회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안마. 그러나 길만 있으면 뺏고자 하는 자들이 '직업선택의 자유'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도심지의 불법 마사지업인 경락, 스포츠, 태국 마시지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가짜 마사지 자격증으로 서로에게 자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기적인 행태와 헌재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국민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이 시각 장애인을 구했습니다. 드디어 2006년 8월 의료법의 개정으로 안마를 시각 장애인들의 고유 직업으로 지정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불법무자격자들에 의해 2년 전과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장애인 안마사 자격이 또 다시 위협받고 있습니다. 7월 헌재 판결을 앞두고 전장애인들은 모두 함께 투쟁할 것입니다.

 

안마업이 아니면 시각 장애인들이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시각 장애인이야 말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입니다. 시각 장애인들은 직업 교육을 통해 철저하게 안마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힘을 보태주십시오.

 

시각 장애인과 모든 장애인들의 삶에 꿈과 희망을 주십시오.

 

잠시 후에는 노회찬, 심상정 전 의원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노회찬 전 의원은 "2006년 인권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 헌법재판소는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라며 "위헌소송을 낸 사람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나, 장애인들에겐 오히려 그 자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각장애인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오후 3시] 인권위 옥상에서 시각장애인들을 만나다

 

집회 도중, 어디선가 노란색 종이가 떨어졌다. 국가인권위원회 옥상이었다. 그 곳에 몇몇 사람들이 보인다. 아, 얼마 전부터 인권위 옥상을 점거하고 시위하고 있다는 학생들이구나. 옥상에 올라간 지 일주일이 됐다던 그들이 보고 싶었다. 무작정 옥상에 올라가 그들을 만났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열심히 임용고시 준비하는 줄 아세요."

 

옥상을 점거한 시각장애인 중 한 명인 A군. 대구대학교 특수교육과 4학년 학생인 그는 이름을 밝히길 꺼려 하며 말문을 열었다.

 

"안마와는 관계없는 특수학급 교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안마사 자격증 문제는 시각장애인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그는 또 "시각 장애인들은 경쟁사회에서 이미 수많은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다"라며 "안마사 자격마저 경쟁체제로 바뀌면 우리의 생존 자체가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옥상에 돗자리를 펴고 잠을 잔 것도 벌써 일주일째. 추위, 모기와 싸워가며 이 곳에서 머물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그들과 같은 나이인 나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언제쯤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없이 고개만 저었다. 정안인인 내가 시각장애인들과 똑같은 심정일 수는 없지만, 그들을 만나고 대화하며 절박함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오후 4시] "궂은 날씨도 배고픔도 우릴 막을 순 없죠"

 

시청 앞에서 종각까지 예정된 행진이 시작되었다. 촛불집회 행진처럼 몰려나가지 않고, 차례를 지켜가며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약시 시각 장애인들이 큰소리를 외치면서 다른 시각 장애인들의 길을 안내하는 봉사자를 역할을 했고, 장애인들은 서로 의지하고 부축해가며 길을 걸었다.

 

 

나도 시각장애인들을 안내해가며 같이 걸었다. 그런데 몇 시간을 서 있다가 또 걸어가려니,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왔다. 같이 길을 걷는 시각장애인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촛불집회에서처럼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없었다.

 

"힘들지 않으세요?"라는 내 물음에 한 시각 장애인이 답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요, 뭘. 땡볕에 더 많이 걸어간 적도 있었어요. 오늘은 날씨도 선선하고 좋네요."

 

보행이 불편한 이 시각장애인들에게 이 행진을 강요한 것은 이들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사회였을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후 5시] 촛불집회에 가린 우리,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종각 앞에 다다를 무렵 전경들이 우리의 길을 막았다. 더는 행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지선을 뚫고 나가려는 시각장애인들과 이들을 막는 전경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촛불집회와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다. 주최측과 일부 시각장애인들만이 경찰과 충돌할 뿐 대부분 장애인들은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폭력은 안 된다는 분위기인 것이다. 시위대 뒤쪽에 서있던 한 시각장애인은 "꼭 폭력까지 행사해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경찰과 대치한 한 시각장애인은 "우리 목소리가 촛불집회에 묻혀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 시위로 몇몇 장애인들이 부상을 입었다. 한 여학생은 전경의 방패에 머리와 허리를 맞아 부상을 당했고, 한 남학생은 눈 주위 뼈가 으스러지고 눈에도 상처를 입어 응급실에 실려갔다.

 

전경의 폭력에 분노한 시각장애인들은 전경들과 대치를 계속해 나갔지만 저지선을 뚫지 못한 채 밤 10시쯤 해산했다. 시위대도 전경들도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시각장애인들은 며칠 동안 서울에서 머물면서 집회에 참석할 것이며 이번이 끝이 아니라고 말했다.

 

[집으로 오는 길] 역지사지 필요한 때

 

시각장애인들이 해산하는 것을 보고 나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참 힘든 하루였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시각장애인들은 오죽할까. 지저분해진 구두로 터덜 터덜 걸으며 지하철을 탔다.

 

쓰러질 듯 서있는 내 뒤로, 한 여학생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오늘 버스를 타는데 갑자기 안국에서 내리라는 거야. 그래서 내려서 택시를 탔는데, 또 못 간다고 중간에 내리라는 거야. 시각장애인들 시위한다고 교통이 다 마비됐어. 불편하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 여학생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시각장애인들의 이날 집회는 국민들의 미국산 쇠고기 문제와 다를 바 없는 '생존권'에 관한 문제라고. 그들의 처지에서 한 번만 생각해 달라고 말이다.


태그:#시각 장애인 , #안마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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