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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에게 손내민 예수, 지친 촛불에 손내민 사제단

 

"예수님은 전문 시위꾼 맞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김인국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고 몇몇은 감동을 느끼고 몇몇은 불편함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시위꾼이라 표현한데서 불편함을 넘어서서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복음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진흙탕으로 끌어 내렸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스스로 진흙탕으로 내려오신, 하늘의 의자를 뒤로 하고, 말구유, 말똥 냄새나는 곳으로 오신 분입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요?

 

복음은 예수님의 존재 자체이며, 그가 선포하신 말씀이며, 그분이 살아가신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예수님의 존재와 말씀과 삶을, 자신의 행동과 말로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출사표를 던지시지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회당에 앉은 자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아픈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로마제국의 수탈과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억압에 지친 이들을 보듬어 주셨지요. 뒤틀린 세상의 질서에 대항하여 높은 자는 낮아지고 낮은 자는 높아지는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선포하셨지요. 전 인류와 온 생명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고 부활하셔서 모든 소멸하는 생명들에게 소망을 주셨지요.

 

꺼져가는 촛불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상처받은 국민을 위로하겠다는 사제단의 모습은 이천년 전 갈릴리 촌부들에게 손 내미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고, 손에 들었던 분노를 내려놓고 촛불과 평화로 다시 승화시키려고 했지요.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과 재현되는 곳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용서와 위로가 있고, 만남과 화해가 있고, 해방과 자유가 있고, 소망과 생명이 있습니다. 사제단이 이끄는 집회에서 그 복음이 재현된다고 봅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신부님이 웃으며 이 말을 선창했지만, 야유와 조롱을 예상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동안 쥐새끼, 죽일 놈 하던 시민들은 순순히 그 말을 따라했습니다. 또한 일찍 귀가했습니다. 분노의 칼날이 다듬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과연 화해하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복음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전문 시위꾼'이라는 누명 씌운 유대 지도자들

 

물론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를 보면 혁명가나 시위꾼으로서의 자의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분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혁명적이었으나 그것을 당장 실현시키기 위해 제자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거나 자금 모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서셨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희망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칼을 빼든 베드로에게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정말로 다만, 억압 속에 놓인 이들에게 다가가셨을 뿐입니다. 안식일에 일했다고 바리새인들에게 정죄당하는 일용 노동자들 편에 서셨을 뿐이고 굶주린 이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와 같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이따금씩 자기 배만 불리는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일갈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희망과 용기를 주는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지배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아마 지금처럼 언론이 발달했다면, 그들 역시 조중동 비슷한 매체를 활용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름, 여론 장악 능력이 있었는지, 예루살렘에 들어설 때 열렬히 환호했던 인파를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다시 예수님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법정에 정치범으로 고발합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는 단독으로 사형집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넘깁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협박을 합니다. 예수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를 왕이라 칭한 자를 죽이지 않는 것이니 카이사르에게 반역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는 자들 편에 서고, 가난한 자들 편에 섰을 뿐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따랐을 뿐인데, 예수님은 어느새 정치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위협을 느낀 자들로부터 정치범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전문시위꾼으로 몰아간 것은, 당시의 권력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배력을 상실할까 두려워하는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전문시위꾼이라는 누명을 씌워 사형장으로 내몰았습니다.

 

지금 상황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언제 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이 자기들에게 돈 되고 득 되는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습니까? 지금 무슨 콩고물이 떨어진다고 저렇게 단식하며 미사를 드리고 있겠습니까?

 

정치를 종교로 포장하지 말라는 분들께 말합니다. 배고픈 오천 명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기도드리던 예수님의 기도는 정치적인 것이었습니까? 곧 함락당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던 예수님의 눈물은 정치적인 것이었습니까? 광우병 걸려 죽기 싫다고 고함치는 사람들을 보고 하늘을 향해 기도드리는 신부님들의 기도만 정치적인 것입니까?

 

신부님들이 강경진압 장면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오신 이유가 과연 김정일에 세뇌당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부님들 역시 하늘로부터 온 긍휼의 마음으로 국민들을 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위꾼으로 몰아간 이들이 누구인지 기억하기 바라며 지금 사제단 신부님들을 시위꾼이라 몰아붙이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빛은 모든 억압 넘어뜨릴 것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기독교인들께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모두가 끝이 났다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소망을 잃고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한 줄기 부활의 빛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훗날 로마제국을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현재에서도 모든 억압들과  역시 넘어뜨릴 것입니다.

 

촛불과 그 빛을 언제나 동일시 할 수 없겠지만 그 빛의 색감은 갈릴리에서부터 밝혀졌던 그 빛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시위꾼이 아니었지만 결국 시위꾼이란 이름이 붙었고 그 시위의 목적은 아주 역설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현재도 그 하늘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중 일부를 드립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땅에서 사셨으나 하늘을 사셨던 예수처럼 사람들이 하늘 뜻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부님들, 힘내십시오!


#시국미사#촛불집회#김인국 신부님#전문 시위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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